[Creator+] 영화감독 이환: 독립 영화의 ‘실험’에서 상업 영화의 ‘협업’으로 나아가다

이환 영화감독

인물의 본질과 낯선 삶을 향한 집요한 탐구는 이환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박화영>, <어른들은 몰라요> 이후 첫 상업 영화 <프로젝트 Y>로 확장된 그의 시선은 대중적 호흡 속에서도 변함없는 진심을 보여준다. 전문가들과 유연하게 호흡하며 찾은 창작의 새로운 균형점은 무엇인지 직접 만나 물었다.

[Creator+] 영화감독 이환: 독립 영화의 ‘실험’에서 상업 영화의 ‘협업’으로 나아가다

editor’s note

창작자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합니다. 배우에서 연출가로, 그리고 독립영화에서 상업영화로 영역을 넓혀온 이환 감독을 보면 그 집요한 탐구의 시간이 느껴지죠. 그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들의 결핍과 욕망을 자신만의 불규칙한 리듬으로 그려내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첫 상업 영화 <프로젝트 Y>를 통해 더 많은 이들과 소통하려는 그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창작의 균형을 잡았을까요. 사람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 연출자 이환 감독을 만나, 그가 견뎌온 고민의 시간과 유연한 협업의 철학을 들어보았습니다.

resize DSC08252 2 1
영화감독 이환

PLUS 1. 결핍과 욕망이 교차하는 곳, 영화 <프로젝트 Y>

영화 <박화영>(2017)<어른들은 몰라요>(2020) 한국 독립 영화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시네필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난 1월 21일 개봉한 <프로젝트 Y>는 감독님의 세 번째 장편이자 첫 번째 상업 영화라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데요. 첫 상업 영화 작품인 만큼 제작 과정에서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무엇보다 더 많은 관객, 그리고 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독립 영화는 시네필이라는 비교적 한정적인 관객층과 소통하는 면이 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대중 예술’의 영역에서 나다운 작업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요.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려다 보니 그 전보다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상업 영화라는 시스템 안에서 발을 맞춰보는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숨죽이고 볼 수 있도록 속도감 있는 전개에 많은 공을 들였고, 오락적인 ‘스낵 무비’의 결에 맞춰 전작들과는 또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려 노력했습니다.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번 영화의 그 시작점도 궁금해요. 최초 시나리오는 남녀 주인공을 필두로 한 멜로 장르였다고요.

맞아요. 사실 데뷔작으로 알려진 <박화영>보다도 먼저 썼던 작품이에요. 원래 이 영화를 가장 먼저 만들고 싶었거든요. 당시에는 ‘미선’(한소희 역)라는 인물은 그대로 있었고, ‘도경’(전종서 역) 같은 캐릭터가 남성인 아주 처절하고 현실적인 멜로였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APM(Asian Project Market)에 선정되어 피칭도 진행하며 한창 작품을 개발하던 중이었죠. 그러다 <어른들은 몰라요> 작업을 마칠 때쯤 연상호 감독님을 만났는데, 예전에 제 시나리오를 모니터해 주셨던 기억을 떠올리시며 “장르 영화로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라고 제안해 주셨어요. 그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의 <프로젝트 Y>로 모양새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장르물로 시작하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여성들이 욕망에 눈을 뜨고 치닫다가 결국 자신들의 감정적인 이야기로 나아가는 하나의 여정을 그려보고 싶었죠.

DSC07805
영화 <프로젝트 Y> 스크립트
두 편의 전작에서도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직시하고자 노력해 오셨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주제 혹은 메시지를 던지고 싶으셨던 걸까요?

저는 우리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는 점에 집중합니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마주쳤을 때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껴 멀리하고 싶어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캐릭터를 구체화하곤 하죠.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취재하며 느낀 핵심은 결국 ‘사람’과 ‘생존’이었습니다. 각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치열한 생존 싸움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의 선택조차 스스로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단순히 드라마틱 한 사건을 넘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인물 간의 현실적인 생존 본능을 영화적으로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한편, 이번 작품은 캐스팅만으로도 화제였죠. 한소희 그리고 전종서 두 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시나리오 집필 단계부터 두 배우를 염두에 두신 건가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가상 인물들을 공간에 집어넣고 창작하는 단계라 특정 배우를 딱 생각하고 쓰지는 않았어요. 어느 정도 리빌딩을 하던 시점에 누가 어울릴지 고민하다 두 분을 1안으로 떠올렸는데, 결과적으로 제가 생각한 첫 번째 배우들과 작업을 같이하게 된 거죠.

resize 01 1
resize 02 1
영화 <프로젝트 Y>의 주연으로 활약한 한소희(위), 전종서(아래) 배우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섭외 과정도 잊을 수 없는데요. 제작사를 통해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첫 미팅을 했을 때 저는 이후 여러 차례 만남이 필요할 거라 예상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두 배우와 4~5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두 분이 “감독님, 저희 하는 거예요”라고 바로 결정을 내려주셨어요. 덕분에, 머릿속에 있던 2안, 3안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죠. 특히 소희 배우가 저에게 “그래서 누가 무슨 역이에요?”라고 물어보던 그 순간이 기억에 남네요. 저는 배우를 캐스팅할 때 그들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색깔을 보고 캐스팅하는데, 두 배우가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 보여줄 그들만의 본연의 색깔을 믿고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PLUS 2. 감각의 총체, 영화를 설계하는 법

d15fc4d3c83f06724d68e74304cd10e6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에 초청된 영화 <프로젝트 Y>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전반적인 색채도 독특하더군요. 꼭 특수 필름 효과를 넣은 듯했달까요.

이번 영화의 주무대인 ‘화중시장’은 온갖 욕망과 생존 본능이 뒤엉킨 가상의 공간이에요. 이질적인 인간 군상들이 모여드는 곳인 만큼, 그 혼돈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일부러 여러 색을 혼재시키고 필름 특유의 거친 질감을 살리고 싶었죠. 90년대 홍콩 영화 르네상스 시절의 룩을 참고해 인물 개개인에게 고유의 색을 부여했습니다. 단순히 배경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속 인물들의 욕망과 개성이 색채라는 언어를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의상부터 공간의 톤까지 세밀하게 조율하려고 노력했죠.

3daae6c727c770b1b7f40d6f72972325
<프로젝트 Y> 스틸컷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주요 무대인 ‘화중시장’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인 만큼,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VFX(시각특수효과)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요. 덱스터스튜디오(DexterStudios)와 협업하셨더군요.

맞아요. 전작들에서는 휴대폰 화면처럼 일상적인 소소한 ‘생활 CG’ 위주로 작업해 왔다면, 이번에는 덱스터 스튜디오와 함께 대대적인 CG 작업을 진행하며 공간의 밀도를 높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CG라는 영역을 깊게 다뤄본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가상의 공간인 화중시장에 제가 원하는 무드와 리얼리티를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며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창작자로서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한편, 인물마다 개별적인 색채를 부여하셨다는 말도 흥미로운데요. 특히 황소, 토사장, 가영 같은 조연 캐릭터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이들 캐릭터를 디자인할 때 어떤 점을 신경 쓰셨는지도 궁금해요.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모든 인물이 각자의 욕망을 가진 주인공처럼 보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황소(정영주 역), 토사장(김성철 역), 최가영(김신록 역), 석구(이재균 역), 하경(유아 역) 같은 조연 한 명 한 명에게도 어떤 욕망을 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개별적인 전사를 부여하고 그에 맞는 색깔을 정했죠.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부터 그분들이 가진 본연의 색깔을 보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캐릭터에 녹아들 수 있도록 의상 실장님과도 톤을 세밀하게 맞추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단순히 배경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며 화중시장이라는 공간의 생동감을 완성해 주길 원했거든요.

resize 4757da13d3af16ad336360ffe45ac656
두 주인공 미선과 도경의 선배이자 엄마로 등장하는 인물 최가영(김신록 역)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resize 6995eacaf95f79582d073d0c3acef120 2
미선과 도경의 계획을 방해하는 인물 석구(이재균 역)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resize 3f5081681ed4b7dd414008290d0e4012
극 중 토사장의 아내로 등장하는 하경(유아 역)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흔히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하죠. 이번 작품에서도 스타일리시한 미장센만큼이나 영화 중간중간 비집고 들어오는 힙합 음악들이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기더군요. 이번 영화 속 음악들은 어떤 의도로 설계하셨나요?

<프로젝트 Y>의 음악 감독으로 프로듀서 그레이(GRAY)가 함께 했습니다. 대중에게는 힙합이나 R&B 프로듀서로 익숙하겠지만, 사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굉장히 높은 음악적 능력치를 가진 아티스트예요. 전작인 <어른들은 몰라요>에서는 힙합을 전면적으로 사용했다면, 이번에는 그레이 감독님의 전매특허인 힙합을 최소화하는 대신 꼭 필요한 지점에만 ‘엣지 있게’ 배치했죠. 오히려 제가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건 고전 영화의 클래식함이 묻어나는 재즈나 리듬앤블루스 같은 음악들이었어요. 한소희, 전종서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두 배우의 조합이 이런 고전적인 선율과 부딪혔을 때 발생하는 묘한 이질감이 있거든요. 그 감각적인 충돌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킬 것으로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독보적인 음악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PLUS 3. 영화라는 이름의 공동 창작

이번 작품은 기존 독립 영화 시절보다 협업의 규모와 주체가 훨씬 다양해졌잖아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일하며 새로이 느낀 점이 있다면요?

이번 현장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의견을 교류하며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예전에는 제가 직접 구축한 시스템 안에서 저만의 호흡으로 밀고 나갔다면, 이번에는 상업 영화라는 정해진 프로세스에 발을 맞춰야 했거든요. 처음에는 제 방식이 바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아 고민도 많고 조금은 눈치를 보기도 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의 에너지를 조화롭게 섞는 유연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흡수하며 ‘이환다움’을 어떻게 녹여낼지 치열하게 고민해 본 시간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죠.

“누군가는 멀리하고 싶어 할 수도 있는 인물들을 탐구해서, 이들도 우리와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창작자로서 제 역할이라 믿습니다.”

제작 규모가 커진 만큼 연출의 역할에 대해서도 새롭게 정의하거나 고민하신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감독’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인가요?

결국 감독은 끊임없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든 독립 영화든, 배우들과 함께 인물을 탐구하고 그것을 영상화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이번에는 그 본질을 풀어내는 방식에서 유연성을 좀 배웠어요. 전작들에서는 제 고집을 조금 더 강하게 부렸다면, 이번에는 상업 영화의 프로세스를 따라가 보며 그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녹여낼지 고민해 본 거죠. 결과적으로 감독이란 자기 색깔을 지키면서도 여러 전문가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습니다.

ab3f194d59caf20a807de7e4c52fcd2a
가상의 공간 화중시장 곳곳의 모습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resize cbc90a6ec44b080a16ab42b7dac376e6
극에 등장하는 인물 개개인의 욕망을 헤어, 의상, 특수 효과 등을 통해 표현했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여러 창작 주체와 협업하다 보면 본래의 색깔을 유지하며 조율하는 과정이 쉽지 않잖아요.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창작자로서 본인만의 색을 잃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요?

저는 인물 개개인에게 부여한 ‘전사’를 중심에 둬요. 제가 설계한 캐릭터의 욕망과 삶을 의상 실장님, 음악 감독님, 특수 효과 팀 등 각 파트의 전문가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거치죠. 그러면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아이디어가 더해져도 인물의 본질은 흔들리지 않거든요. 특히 배우를 캐릭터에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 그 배우가 가진 본연의 색깔이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투사되도록 조율하는 게 제 방식이기도 하고요. 결국 제 색깔만 고집하기보다 전문가들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그 속에서 캐릭터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게 균형을 잡는 게 제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던 것 같아요.

PLUS 4. 사람을 읽는 눈, 영화를 짓는 마음

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리셨잖아요. 영화 <똥파리>부터 영화 <암살>, <밀정>까지 굵직한 현장에 계셨는데, 카메라 뒤편인 연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요?

배우로 살면서 틈틈이 단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운 좋게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기회들이 생겼어요. 그러다 이번 작품의 원안이 된 시나리오가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연출을 준비하게 됐죠. 이후 명필름 랩에서 보낸 시간이 연출가로서 성장하는 데 정말 큰 밑거름이 됐고요. 연기할 때나 연출할 때나 결국 ‘사람’을 탐구한다는 본질은 같아서, 자연스럽게 이 흐름에 올라타게 된 것 같아요.

DSC08134 1
디자인플러스와 인터뷰 중인 이환 감독
배우 출신 감독이라 그런지 현장에서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유독 독특하다고 들었어요. 특히 긴 시간 이어지는 ‘워크숍’이 감독님 연출의 시그니처인데, 이를 통해 배우들에게서 무엇을 끄집어내고 싶으신 건가요?

저는 배우들이 가진 본연의 색깔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번에 함께한 유아 씨만 해도 그렇죠. 대중에게는 걸그룹 오마이걸 멤버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워크숍을 통해 제가 본 건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배우 유시아’의 얼굴이었거든요. 저부터 먼저 마음을 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신뢰를 쌓다 보면, 배우 본인조차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낯선 표정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해요. 그런 날 것 그대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 연출자로서 정말 큰 쾌감을 느껴요. 관객들에게 “유아에게 이런 서늘한 얼굴이 있었어?” 하는 식의 기분 좋은 ‘배신감’을 선사하는 것, 그게 제가 배우들과 협업하며 끝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목표이자 즐거움입니다.

“우리 곁에 숨겨진 낯선 삶들을 찾아내 영화라는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 그 치열한 탐구 과정이 제가 영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인 것 같아요.”

이쯤 되니 지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도 궁금한데요.

글쎄요. 수다? (웃음) 사실 제 일상은 거의 작업의 연장선이에요. 요새도 다음 작품을 준비하며 스태프나 제작사 PD들, 배우들을 만나 끊임없이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거든요. 저한테는 그 대화들이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인 셈이죠. 무언가를 새로 구상하고 만드는 게 여전히 지치지 않을 만큼 재밌어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다음 작업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그런 일상의 대화 속에서 얻는 영감들이 제 창작의 가장 큰 연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감독 이환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우리 곁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일 거예요. 누군가는 불편해서 멀리하고 싶어 할 수도 있는 인물들의 삶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요. 비록 조금 거칠고 이질적일지라도 그들 역시 우리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이라는 걸 영화로 보여주고 싶거든요. 단순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넘어, 그들의 생존과 욕망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창작자가 되고 싶습니다.

PLUS LIST

이환 감독에게 영감을 준 영화 3

-<스위트 식스틴 (Sweet Sixteen)>(2002) by 켄 로치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이 영화는 실제 배우가 아닌 비연기자들을 기용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특징이다. 이환 감독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정서를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를 설득하는 과정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그 이면에 흐르는 지독한 외로움을 포착해낸 지점을 특히 좋아한다.

-<디스 이즈 잉글랜드 (This Is England)>(2006) by 셰인 메도우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또 다른 수작이다. 동네 무리와 어울리게 된 한 어린아이가 나치즘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비연기자들이 참여해 연기했는데, 인물의 변화와 그들이 처한 환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연출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1993) by 짐 셰리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을 맡은 실화 바탕의 법정 영화로, 국가라는 거대 조직이 국민을 어떻게 희생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소외된 사람들이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항하는 과정이 매우 처절하면서도 힘 있게 그려진다. 이환 감독은 부당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증명해 내는 인물들의 여정을 인상 깊게 보았다.

TIPPING POINT

이환 감독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사람에 대한 지독한 호기심이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던 배우의 시선은 독립 영화 특유의 날것을 지나, 이제 상업 영화라는 거대한 협업 속에서 인물의 본질을 찾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소외된 이들을 이상하다 단정 짓지 않고, 그들이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이면을 집요하게 궁금해하는 마음. 이 담백한 호기심은 효율과 공식이 지배하는 상업적 시스템 안에서도 인물의 생동감을 건져 올리는 이환만의 독보적인 언어가 된다.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타인의 전사를 탐구하는 태도.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불규칙한 감정과 디테일을 믿는 고집처럼, 사람을 향한 그의 시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