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허브로 재탄생한 폴란드 조선소의 오래된 산업 건물
역사적인 19세기 산업 건물을 아티스트 스튜디오와 카페, 커뮤니티 공간으로
폴란드 그단스크(Gdańsk)의 역사적인 조선소 부지 한복판에 새로운 문화 허브가 문을 열었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조선소 31B 홀Hall 31B은 목재 건조장, 직원 식당, 복싱 훈련장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조선소의 켜켜이 쌓인 역사를 고스란히 품어온 건물이다.

폴란드 그단스크(Gdańsk)의 역사적인 조선소 부지 한복판에 새로운 문화 허브가 문을 열었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조선소 31B 홀Hall 31B은 목재 건조장, 직원 식당, 복싱 훈련장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조선소의 켜켜이 쌓인 역사를 고스란히 품어온 건물이다. 폴란드 공산주의 정권 붕괴의 도화선이 된 연대운동(Solidarity movement)이 탄생한 그단스크 조선소의 일부로, 유럽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철거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은 이 건물은 2년에 걸친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현재는 그리드 아트허브(Grid ArtHub)라는 이름으로 아티스트 스튜디오, 레스토랑, 카페&바를 한 지붕 아래 아우르며 그단스크의 활발한 창작 생태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재활용과 DIY 정신으로 공간을 빚는 건축가, 필립 코자르스키
이번 프로젝트를 이끈 것은 폴란드 건축가 필립 코자르스키(Filip Kozarski)가 운영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IPA다. IPA는 공공 인테리어 및 건축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전문으로 하며, 특히 문화 영역에서의 공간 기획 프로젝트, 임시 건축, 그리고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건축 작업을 핵심으로 삼는다. 스튜디오의 이름이자 철학인 ‘i prefer analog’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지금, 잠시 속도를 늦추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코자르스키는 민간과 공공을 아우르는 폭넓은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복잡한 프로젝트 환경 속에서도 상황에 맞는 설계 방향을 찾아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IPA는 2008년부터 그단스크·그디니아·소포트를 아우르는 트로이미아스토(Trójmiasto) 지역에서 폴란드 최초의 페차쿠차(Pecha Kucha) 행사를 공동 주최해오며, 지역 창작 커뮤니티와의 긴밀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다.

폐자재가 예술이 되는 공간
건물 1층에는 채식 레스토랑 더스트 키친(Dust Kitchen), 카페&바 플롯 소셜 클럽(Plot Social Club), 그단스크 관광청 사무실이 자리해 있다. 이 상업 공간에서 발생하는 임대 수익은 2층의 문화 활동을 뒷받침하며, 덕분에 그리드 아트허브는 건축·그래픽 디자인·시각예술·도시 연구 등 창작 분야 종사자들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스튜디오 9개와 레지던시 공간 3개를 제공하고 있다. 워크숍·네트워킹·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위한 공용 공간과 함께 지역 공동체를 위한 라디오 방송 인그리드(Radio Ingrid)도 이곳을 거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공간이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건물의 구조를 그대로 살리면서 공간의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는 방향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코자르스키는 콘크리트 기둥과 벽돌, 철골 구조 등 건물의 외피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른 곳에서 수거하거나 재활용한 소재들로 공간에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었다. 레드·옐로·블루의 포인트 컬러가 거칠고 투박한 기존 공간 위에 생동감과 경쾌함을 더하며 각기 다른 공간을 하나의 시각적 흐름으로 이어준다.

버려진 소재들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공간의 개성을 만들어내는 요소로 적극 활용한 것이 이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드 아트허브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목재 바닥재는 체트니에보(Cetniewo) 올림픽 트레이닝 센터에서 옮겨온 것인데, 건축가는 체육관 바닥에 칠해져 있던 경기장 라인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살려두었다. 마룻바닥 곳곳에 불규칙하게 남은 이 라인들은 마치 추상화의 붓 터치처럼 공간에 생동감을 더한다. 코자르스키는 “경기장 바닥재 특유의 색채와 라인을 일부 남겨둔 덕분에 공간은 단 하나뿐인 개성과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스튜디오 창문은 홀 지붕에서 떼어낸 천창 유리로 마감되었고, 버려진 석기 타일 조각들은 재활용되어 바닥 곳곳에 덧대어졌다. 욕실의 카운터, 칸막이벽, 문 손잡이는 인근 업체에서 수거한 빨간 코카콜라와 초록 스프라이트 플라스틱 케이스로 만들어졌다. 재활용 소재만으로 채울 수 없었던 부분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DIY 방식으로 직접 제작되었다. 그리드 아트허브 중앙 홀에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레드 테이블과 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비계 파이프와 옐로 합판으로 제작된 선반 유닛이 그 대표적인 예로, 두 가구 모두 필요에 따라 분리하거나 재조립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레스토랑과 카페&바의 좌석 역시 중고 가구와 맞춤 가구가 혼합되어 있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
100년 넘는 역사를 품은 31B 홀의 재탄생은 오래된 산업 건물을 어떻게 오늘날의 문화 공간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사례다. 코자르스키의 설계는 역사적 건물의 뼈대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재활용 소재와 DIY 방식을 통해 공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1층 상업 공간의 수익으로 2층 문화 활동을 지속시키는 구조는 문화 공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하며, 그단스크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적 맥락 위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이 공간이 앞으로 그단스크의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