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에서 플랫폼으로, 제9회 타이베이 패션 위크

올해 2.0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제9회 타이베이 패션 위크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꾀한 모습이었다.

이벤트에서 플랫폼으로, 제9회 타이베이 패션 위크

문턱을 낮춘 패션쇼

타이베이 패션 위크는 올해 2.0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말뿐인 슬로건이 아니었다. 지난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제9회 타이베이 패션 위크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꾀한 모습이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서울, 상하이, 도쿄 등 인근 도시를 모방하는 게 아니라 대만의 고유한 패션 디자인 신을 구축하는 것. 행사가 열린 쑹산 문화창의공원은 이러한 의도를 보여 주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옛 담배 공장 건물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되살린 이곳은 대만의 과거와 현재, 역사와 문화가 오가는 교차로다. 담뱃잎을 보관하던 낡은 창고, 공장 복도, 노동자들이 피로를 풀던 목욕탕까지 디자이너의 무대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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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패션 위크의 무대가 된 쑹산 문화창의공원. 오래된 창고가 쇼장으로 탈바꿈했다. 사진 ©TPE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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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밥 장(Bob Jian)은 오래된 대중목욕탕을 무대로 10벌의 오트 쿠튀르 룩을 전시했다. 사진 ©TPEFW

올해 행사는 ‘런웨이’, ‘프레젠테이션’, ‘마켓’의 세 축으로 전개되었는데, 20분 남짓한 런웨이에 모든 시선이 쏠리는 여느 패션 위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프레젠테이션과 마켓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위해 마련했다. 유명인에게만 프런트 로를 내주는 대신 남녀노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쇼장의 문턱을 낮춘 것. 이곳에서는 올해의 A/W 컬렉션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컬렉션 피스를 현장에서 바로 구입할 기회도 주어졌다. 패션 위크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려는 시도인 동시에, 하룻밤의 꿈같은 축제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12개의 패션 브랜드로 톺아보는 대만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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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진의 A/W 컬렉션 ‘Sa Ta Na Ma’는 교토의 공방 쇼비엔(Shobien)과의 협업으로 완성했다. 1200년간 이어져 온 전통 납염 기법을 현대 의복에 적용했다. 사진 麥羨雲

이번 시즌의 중심에는 12개의 브랜드가 있었다. 런웨이와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각각 6개의 브랜드가 이름을 올리며 A/W 컬렉션의 방향을 제시했다. 흐름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여전히 뜨거운 지속 가능성 담론에 편승하거나, 자국 문화에 기대어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씨 진(C Jean)은 전통 염색 기술에 신소재를 결합해 환경적·미학적 가치를 두루 충족했고, 웨이 쯔위안(Wei Tzu-Yuan)은 바다를 수호하는 토속 신 마주(Mazu)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에 친환경 소재를 더해 설계부터 제작까지 일관된 맥락을 보여 줬다. 지속 가능성은 디자인 신에서 늘 거론되는 화두이기에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 해답을 전통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눈여겨볼 만했다.

한편 자국의 정체성을 더 깊숙이 파고든 사례도 더러 있었다. 왕리링(Wangliling)의 이번 시즌 컬렉션 ‘Forms of Formosa’는 대만의 자연 풍광에서 영감을 얻었다. 완만한 산 능선, 토종 꽃의 선명한 색, 여름이면 불어오는 태풍까지. 자연에서 추출한 컬러와 실루엣을 재조합해 몸에 걸치는 옷으로 구현해 냈다. 이 외에도 18팀의 브랜드가 B2C 마켓에 참여해 힘을 보탰는데, 각기 다른 미학과 철학을 보여 주며 패션 위크의 외연을 확장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진입 장벽을 낮춘 운영 방식과 개성 강한 패션 브랜드로 중무장한 올해 행사는 패션 위크가 산업과 소비를 잇는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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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왕(Sue Wang) 국립 칭화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듀크 대학교에서 국제개발정책학을 공부했다. 타이난시 정부 관광여행국 국장과 타이난시 부시장을 거쳐 현재 대만 문화부 차관으로 재직 중이다.
타이베이 패션 위크가 2.0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행사의 역할을 어떻게 재정립했나?

우리는 지난 8년간 글로벌 패션 산업이 구조적으로 재편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대중이 브랜드와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가치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 위크가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타이베이 패션 위크가 올해 대대적인 체제 전환을 선포한 배경이다. 이번 변화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벤트에서 플랫폼으로의 전환’. 그럴싸한 쇼를 선보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장기적인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대만 디자인 연구소(TDRI)와 긴밀히 협력하며 장기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전통적인 오프닝 쇼를 없애는 대신 프레젠테이션과 마켓, 라이브 스트리밍 등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

우리로서는 굉장한 변화였다. 브랜드와 대중 사이의 연결 고리를 튼튼히 다지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물리적 좌석의 한계를 없애기 위해 라이브 스트리밍 쇼케이스를 도입하고, 다양한 브랜드를 패션 매거진처럼 큐레이션한 ‘에디터스 픽 마켓’을 개최해 방문객이 현장에서 제품을 직접 살펴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B2B에서 B2C까지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만 패션 브랜드가 전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로컬 소비자층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런웨이는 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만 플랫폼은 비즈니스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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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패션 위크가 올해 처음 도입한 ‘에디터스 픽 마켓’. 사진 ©TPEFW
올해 패션 위크의 기조에 맞춰 비주얼 아이덴티티도 새로 디자인했다고 들었다.

행사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도입했다. 올해 아이덴티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교차와 표현’이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을 거듭하는 동시대 대만의 모습을 담았다. 타이베이 패션 위크의 영문명 앞 글자 T와 F를 디자인 시스템으로 변환해 도시, 산업, 문화가 교차하는 모습을 담았다. 중요한 건 ‘대만 스타일’을 특정한 스타일이나 조형 언어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패션이 고정된 형태가 아닌 만큼 아이덴티티도 의도적으로 유연하게 설계했다.

대만은 지속 가능한 신소재 연구에 앞서 있다는 평을 받는다. 소재 산업과 디자인 분야의 접점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대만은 세계 8위의 섬유 수출국이다. 연간 120억 달러 규모의 생산력을 갖추고 있고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강점이 패션 브랜드의 경쟁력으로 충분히 전환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앞으로 텍스타일, 디자인, 기술을 적극적으로 연결해 대만 패션 산업만의 고유한 장점을 공고히 하고자 한다. 올해 패션 위크가 스타트를 잘 끊어주었다.

많은 신진 디자이너들이 개인 작업에서 브랜드 운영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디자인과 비즈니스는 확실히 다른 역량을 요구한다. 디자인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유능한 비즈니스맨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이번 2.0 전환을 계기로 1:1 맞춤형 멘토링을 제공하기로 했다. 생산, 마케팅, 해외 진출 등 디자이너들이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정부의 역할은 위에서 관리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지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문화부 정책의 목표는 언제나 창작자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멘토링 프로그램의 결과는 올해 10월에 열리는 S/S 시즌부터 점진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향후 10년을 바라볼 때, 대만의 패션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나?

타이베이 패션 위크는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섰다고 본다. 대만 패션 신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바라는 건 성공적인 쇼가 아니라 순환하는 생태계다. 앞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대만 패션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소재나 제조 기술을 넘어 디자인, 문화, 지속 가능성, 일상까지 결합된 비전을 떠올리기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타이베이 패션 위크가 비로소 진정한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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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장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 사진 ©TPEFW

기간 3월 26~29일
장소 쑹산 문화창의공원
주최 대만 문화부
주관 대만 디자인 연구소
웹사이트 tpefw.com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5호(2026.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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