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의 재해석과 확장, 〈오: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전

빈지노, 250 등이 소속된 비스츠앤네이티브스가 지난 4월 제주도에 복합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를 열었다. 오픈 기념 첫 전시로 픽사 출신의 애니메이터 에릭 오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오: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전이 열리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재해석과 확장, 〈오: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전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들을 위한 예술이라는 편견은 깨진 지 오래다. 하지만 대중 친화적인 형식에 대한 선입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픽사의 애니메이터로 〈인사이드 아웃〉 〈도리를 찾아서〉 〈코코〉 등에 참여했던 에릭 오는 이러한 선입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지난 4월 제주도에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의 오프닝 전시 〈오: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 이야기다.

복합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 전시장 외에도 예술영화 상영관, 편집숍 등을 오픈할 예정이다.

픽사 퇴사 후 독립해 2020년 〈오페라Opera〉를 발표한 에릭 오는 런던 애니메이션 영화제 관객상, SXSW 관객상, 슬램 댄스 영화제 창조미래혁신상을 수상하고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는 등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오페라〉를 중심으로 전작과 미공개작까지 한데 모아 그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수작업 애니메이션을 벽과 천장을 배경으로 상영하는 것 외에 공간 디자인과 조경, 사운드 디자인, 각종 설치물 등을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리진〉. 벽면 대신 천장에서 상영하는 구조로 관람객의 시야를 새로운 구도로 전환시킨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문명이 몰락한 뒤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바닥과 계단, 벽면의 틈 곳곳에 자리한 식물이 이러한 분위기를 강화한다. 이는 문명의 태동부터 몰락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오페라〉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지만, 전시장 밖으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공간으로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사운드도 외부와의 차단을 돕는다. DJ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250이 제작한 사운드는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 같으면서도 일견 몽롱한 느낌을 전하는데,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사운드가 웅장해지며 전시장을 압도한다. 이는 관람객끼리 서로 느낌을 공유하기보다 각자의 감상에 빠져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오페라〉. 계급 사회를 은유한 6m 높이의 피라미드로 인류의 역사를 압축했다.

동선상 중앙에 위치한 〈오페라〉는 단연 이번 전시의 핵심이자 에릭 오의 작품 세계를 함축한 작품이다. 장내 가장 큰 공간에서 상영하는데, 계급 사회를 은유한 거대한 피라미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묘사한다. 우측의 스크린에서는 피라미드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고, 좌측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점이 이동하며 사회 속 개인들을 조명한다. 약 5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피라미드 속 개인들은 협동과 전쟁을 반복하다 멸망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문명이 재건되어 과거를 되풀이한다.

<오페라>를 상영하는 벽면 하단의 바닥에 설치된 검은 스크린에 비친 모습. 벽면에서 작품이 상영되는 동안 바닥에서는 물고기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에릭 오의 핵심 키워드인 ‘순환’은 개별 작품을 비롯하여 전시장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작품들의 러닝타임을 모두 동일하게 설정해 전시 전체가 거대한 순환 작용을 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작품 설명을 최대한 배제해 친절히 해설하기보다 관람객이 전시의 의미를 스스로 유추하고 자신만의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이처럼 〈오: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전은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삶과 사회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며 감상층과 애니메이션의 개념 모두를 확장했다.

순환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오르빗〉.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했다.

“그동안 소규모 전시를 열어 일부 작품을 공개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대규모 전시를 연 것은 처음이었다.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점차 구체화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 뒤 그에 맞는 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완성해나갔다. 이번 전시에서는 순환을 비롯하여 우주와 자연, 현대사회 등 평소 관심을 가졌던 키워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해 작품 곳곳에 숨겨놓았다. 물론 전시의 의도를 해석하는 일은 전적으로 감상자의 몫이다. 다만 관람객에게 삶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나 나름의 위안을 선사할 수 있었으면 한다.”

에릭 오 애니메이터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2호(2024.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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