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렉티브비 정연진 대표

그리 멀지 않은 과거만 하더라도 ‘공간을 브랜딩한다’는 개념은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올해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의 멘토로 참여하는 콜렉티브비 정연진 대표는 주거 공간부터 테마파크, 클럽에 이르기까지 감도 높은 공간을 창조해내며 불모지를 스스로 개척해왔다. 업계 최전선에서 공간계의 지각 변동을 몸소 겪어온 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빛바래지 않은 호기심은 지금도 그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콜렉티브비 정연진 대표
정연진
얼반테이너 공동 설립자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거쳐 2018년 콜렉티브비를 설립했다. 디자인적 사고를 통한 스페이스 브랜딩을 선보이며, 에피소드 수유 838, 제주도 9.81 파크, 클럽 옥타곤, 네이버 팝업 스토어, 커먼그라운드 등 유수의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와 브랜딩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현재 공간을 기반으로 한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 솔루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collective-b.co.kr
콜렉티브비가 어느덧 6년 차에 접어들었다. 아직 젊은 스튜디오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전부터 공간 디자인업계에서 쌓아온 업력이 상당하다. 그 시작은 언제였나?

실내 건축을 전공했지만 처음부터 원해서 입학한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에 많이 방황했고 교수님을 속썩이는 학생이었다.(웃음) 당시 학교에 실내 건축 전공이 신설되며 1기로 입학했는데, 학과 커리큘럼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라 시각 디자인을 비롯한 여러 분야를 두루 배웠다. 원체 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전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만두고 싶었을 때도 ‘인테리어를 10년 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가구도 패션도 섭렵하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도 교수님의 조언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교수님 말씀대로 졸업 이후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친구들과 두루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놀이가 업으로 진화하고 친구는 동료가 되기 시작했다. 얼반테이너를 함께 일군 백지원 대표와의 만남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당시 얼반테이너에서 선보였던 폭넓고 융합적인 프로젝트는 건축과 디자인 신을 허물없이 오가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렸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원동력 삼아 여기까지 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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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 파크. 레이싱에 대한 감성과 흥미를 극대화하는 요소인 생동감을 구현한 프로젝트다. ©김영
얼반테이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얼반테이너 초창기 포트폴리오에 ‘디자인+마케팅’이라는 문구를 적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공간을 브랜딩한다는 개념 자체가 희미하던 시절이었는데도 무의식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비주얼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해답을 도출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마케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간과 디자인, 마케팅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생명력을 어떻게 하나의 그릇 안에 담아낼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던 와중에 네이버 BX팀과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할 기회가 생겼다. 네이버가 공간을 브랜드화하는 작업에 몰두하던 때였다. 당시 네이버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며 프로젝트에 임했던 것이 브랜딩에 대해 많이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클라이언트 관점에서 사고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 운영하는 콜렉티브비 역시 색깔이 뚜렷한 스튜디오나 아틀리에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유연하게 변화하는 회사로 포지셔닝하며 차별점을 만들어가고 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늘 산업군과 브랜드 리서치에서부터 출발하고, 고객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클라이언트의 시선에서 전방위적으로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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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수유 838. 지속 가능한 가치 실현을 위해 폐의류와 페트병을 재활용한 특수 패널과 원단으로 가구와 마감재를 제작했다. ©최용준
공간 브랜딩 분야가 상대적으로 늦게 정립된 건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고 모호한 면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공간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건설사, 운영자, 사용자가 함께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관계를 융합적으로 설계하는 게 중요하다. 그간의 작업을 되돌아보면 공간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유독 치열하게 고민했던 프로젝트일수록 성과가 좋았다. 문제는 공간이 늘 변화한다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일관된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점유하는 브랜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일례로 얼반테이너에서 선보였던 커먼 그라운드 프로젝트는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복합 문화 마켓’을 상정한 뒤 그 콘셉트를 시각 요소로 구체화한 사례였다. 추상적인 콘셉트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항상 브랜드를 축으로 두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 공간은 결코 혼자서 존재할 수 없고 브랜드와의 상호작용이 항상 중요하다.

2018년 콜렉티브비로 독립했다.

얼반테이너의 컨테이너 건축과 옥타곤 클럽 프로젝트가 크게 주목받으며 회사 이미지 자체도 젊고 트렌디하게 굳어진 감이 있었다. 다시 한번 유기적인 조직을 만들어 폭넓은 공간을 다루고 싶은 갈증이 일었고 그렇게 ‘콜렉티브비’라는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공간 브랜딩 회사는 크게 컨설팅 회사와 디자인 회사로 나눌 수 있는데 콜렉티브비는 정확히 그 중간에 위치한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우선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컨설팅 회사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그 솔루션을 정량적인 지표로만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공간이라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콜렉티브비의 가장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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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다스 ‘서울 이즈 컨펌드’ 스페이스 팝업 전시. 시대를 거스르는 오리지널리티를 선보여온 아디다스 문화를 다양한 콘텐츠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강민구
최근 공간 브랜딩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팝업 스토어다. 올해 4월 콜렉티브비가 선보인 아디다스 ‘서울 이즈 컨펌드’ 팝업 행사도 큰 주목을 받았다.

브랜드를 경험하는 방식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근사한 간판과 인테리어만 갖추어놓으면 문만 열어놔도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공간에 대한 대중의 경험이 상향 평준화되어 더 이상 보기 좋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공간 안에 점점 많은 콘텐츠가 유입되고 있다. 일련의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팝업 스토어 열풍이다. 예를 들어 최근 진행한 아디다스 팝업 행사의 경우 제품보다도 브랜드 헤리티지와 정체성을 우선적으로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는데, 일반 리테일 매장과 목적부터 다르다 보니 아디다스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팝업 스토어를 통해 브랜드 정체성이라는 실체 없는 대상을 가시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소한 문화나 타깃을 공부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수많은 파트너사와의 지속적인 소통도 요구된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융합하고 한 방향으로 수렴해나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고, 공간을 매개로 깊이 있는 콘텐츠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팝업 프로젝트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와 별개로 세상이 전부 팝업 스토어처럼 변해가는 건 아쉽다. 너무 고루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웃음)

공간 브랜딩에 관심을 갖는 젊은 디자이너에게 조언한다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호기심이 없어지는 순간 어디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없다. 호기심에 뿌리를 두면 쉽게 지치지 않고 일로부터 상처받는 일도 줄일 수 있다. 한 분야에 대한 깊은 탐구도 좋고, 여러 분야에 걸친 넓고 얕은 관심이어도 상관없다. 가능한 한 많이 보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궁금증을 품은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2호(2024.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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