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그래픽 언어로 번역한 전통, CBR 그래픽 채병록 대표
채병록은 한국의 전통적 소재를 동시대 시각 언어로 재구축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는 오랫동안 서구 모더니즘이 제시한 명료함과 질서, 보편성의 문법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그러나 오늘날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의 정답을 따르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는 일이다. 채병록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한국의 문자와 전통 문양, 의례와 기억, 생활의 감각을 바탕으로 구축한 독자적 시각 세계는 동시대 그래픽 디자인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조용히 증명한다.

동아시아 시각 문화의 탐구자

‘디자이너 채병록’ 하면 한국 내지 동아시아적 그래픽을 만드는 창작자라는 인상이 강해요. 그래서 한때 서구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어요.
처음부터 한국적인 그래픽을 의식적으로 말하거나 작업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커리어 초기에는 스위스 국제주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포스터 디자인의 명료한 구조와 질서, 형태를 정제하는 방식, 정보와 이미지를 긴장감 있게 조직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이어가면서 제가 다루는 이미지와 문자가 서구의 그래픽 문법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모더니즘 디자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더니즘은 저에게 질서와 구조를 가르쳐주었고, 한국과 동아시아의 시각 문화는 작업에 밀도와 정서, 상징과 질감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작업은 서로 다른 두 감각이 충돌하고 겹치며 만들어진 시각 언어라고 할 수 있죠.
일본에서 활동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잔류도 생각해 보았지만 제 스승인 사토 고이치 디자이너로부터 “한국에 돌아가 고국의 이야기를 주제로 작업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일본에서의 경험으로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제가 어떤 시각적 기억과 감각을 지녔는지 더 분명히 자각하게 됐습니다. 낯선 환경에 놓였을 때 자신의 기원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이 있죠. 유학 생활을 거치며 유학 이전에 안병학, 민병걸 등 한국 스승들이 보여 준 태도와 방식이 되려 더 깊이 각인됐어요. 전통의 이미지를 문자와 이미지, 구조와 감각을 통해 동시대 언어로 재조직하는 방식은 이후 제 작업의 중요한 기준이 됐습니다.
그런 소재가 사실 트렌디한 것은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 어떤 경향만 좇다 보면 디자인 생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트렌드보다 중요한 것은 오리지널리티라고 판단했죠. 모두가 똑같은 디자인 교육을 받고 유사한 스타일을 양산하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요? 제 작업이 주류가 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물론 독창성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기와 독창성, 조형 감각, 실용성과 기능성에 대한 사유, 통찰력, 여기에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까지 고루 균형을 이룰 때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생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옥춘당을 소재로 한 ‘축’ 포스터가 큰 관심을 받았어요.
‘축’ 포스터는 제게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옥춘당이라는 소재는 매우 한국적이면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억하는 사물이죠. 잔치, 축하, 의례, 가족, 색, 단맛, 유년기의 감각 같은 것들이 그 작은 사탕 안에 압축돼 있습니다. 사실 제 관심사는 민속적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지닌 반복, 색의 층위, 장식성, 원형의 구조를 그래픽 언어로 재조직하는 것이었죠. ‘축’이라는 문자 역시 축하의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조형적으로는 하나의 중심과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사탕의 이미지와 문자의 구조가 서로 겹치고 밀도를 만들며 하나의 축적된 장면처럼 보이기를 바랐습니다. 단순히 전통의 재현이 아니라 개인적 기억과 사회적 상징, 그리고 그래픽 구조가 만나는 지점이었던 것이죠.
타협 없는 자체 프로젝트


이후로도 길상 문자, 12간지 등 동아시아 문화권의 요소를 반영해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귀국 후 자연스럽게 저만의 방식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축적, 반복, 겹침을 통해 평면을 입체로 전환하는 방식, 장식성, 기본 구조에 관한 시각적 탐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직조하는 방식이었죠. 동시에 일련의 표현 방식과 어우러질 이야깃거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연하장 디자인이었어요. 한국에서 막 활동을 재개할 당시만 해도 연하장 문화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어요.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에 익숙한 문화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자기 주도적 작업이었습니다.
연하장 프로젝트 외에도 자체 프로젝트를 왕성히 이어가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클라이언트 작업을 하다 보면 집요하게 파고들기도 전에 어느 지점에서 멈춰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황은 이해하지만 창작자로서 해갈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더군요.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타협하고 변명하게 되기도 하고요. 담당자 때문에, 예산 때문에, 그 외 여러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에게 자체 프로젝트는 이런 변명거리를 원천 봉쇄하는 일입니다. 클라이언트 작업이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죠. 오히려 더 큰 책임감이 필요해요. 더 많은 절제도 필요하고요.



자체 프로젝트에 ‘IFIO’라는 이름까지 붙였죠.
IFIO는 ‘I’ll Figure It Out’의 약자예요. 우리말로 ‘내가 알아서 할게’죠.(웃음) 의뢰하지 않아도 알아서 멋지고, 흥미롭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만들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지를 넘어 여러 형태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 주겠다는 포부도 담겨 있고요. 디자이너로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결국 매번 새로운 조건과 문제 앞에서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IFIO는 그래픽을 옷, 오브제, 일상의 표면 위로 확장하며, 이미지가 착용되고 움직이고 사용되는 방식을 실험하는 플랫폼에 가깝습니다. 저는 이 확장이 그래픽 언어가 다른 물성과 관계를 맺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손으로 빚은 영감


인천국제공항의 아트 포트 프로젝트도 외연의 확장 면에서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한국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덕분인지 국가적 프로젝트에 요청받은 적이 많았습니다. 궁중 문화 축전이나 재외 한국문화원의 키 비주얼 프로젝트가 그 예죠. 국립중앙박물관, 우란문화재단이 협업한 〈Books & Things: 물아일체〉전이 인연이 되어 아트 포트 프로젝트에 참여 작가로 선정됐습니다. 당시 저는 ‘행운의 길’을 콘셉트로 작업을 했어요. 그것이 유학이든 여행이든 사업차 방문이든,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디자인했죠. 민화 속 호랑이와 문자도, 무릉도원, 〈별주부전〉, 상상 속 동물인 해태 같은 한국적 요소를 활용했고요. 뻔하게 통으로 시트 출력해 부착하고 싶지는 않아서 별색 등 다양한 색상을 구분해 커팅 시트로 작업했습니다.




월간 〈디자인〉의 자매지인 〈행복이 가득한 집〉 제호 리뉴얼도 진행했습니다. 매체 제호를 디자인한 것은 처음인데 부담은 없었나요?
오히려 설레고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이영혜 발행인께서 역대 제호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디자인계 선배들의 계보를 이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죠. 물론 그만큼 고민도 많았습니다. 행복, 풍요로움, 집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집요하게 탐구한 뒤 레터링했어요. 특히 ‘집’이라는 단어가 지닌 정서와 생활의 온도,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매체의 신뢰감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과하게 새롭기보다 기존 독자들이 느끼는 친숙함은 유지하면서도 지금의 감각에 맞는 균형을 찾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강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만이 그래픽 디자이너의 소임은 아니죠. 때로는 오래된 관계를 존중하면서 아주 섬세하게 조정하는 것도 디자인에서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젝트의 발표 주기나 작업의 밀도를 봤을 때 매우 성실한 디자이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영감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작업을 하면서 감각을 만들어가는 사람에 가까운 것 같아요. 작업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험과 실패, 반복과 수정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방향이 만들어지죠. 평소에는 이미지, 문자, 사물, 전통적 요소, 우연히 발견한 질감을 계속 모읍니다. 설령 그것이 곧바로 작업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어느 시점에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그래픽 언어로 발전합니다. 밀도가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마 한 번에 만든 장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 모은 것들이 겹치고 쌓인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업할 때는 부단히 손을 움직이는 편입니다. 스케치, 디지털 테스트, 출력,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죠. 포스터 한 장을 만들더라도 처음부터 완성된 이미지를 상상하기보다 여러 요소를 쌓고 지우고 다시 겹쳐 보며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밀도와 균형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손과 시간을 통해 밀도를 축적한다는 뜻이네요. 요즘처럼 AI로 쉽고 빠르게 결과물을 산출하는 시대에도 그와 같은 ‘느린 디자인’이 유효할까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느린 디자인’이 꼭 오래 걸리는 디자인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중요한 것은 ‘시간이 들어간 만큼 작업 안에 판단과 태도, 물성, 경험이 축적돼 있느냐’ 입니다. AI를 포함한 새로운 도구는 분명히 디자인의 속도와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고요. 다만 이미지를 빠르게 생성할 수 있는 시대일수록 디자이너가 무엇을 선택하고, 왜 그것을 남기며, 어떤 기준으로 이미지를 조직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타이포그래피, 어디까지 왔나?


작업 영역뿐 아니라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있어요. 국제전과 해외 강연의 빈도도 늘었고요.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역성이 오히려 세계성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국제적 그래픽 디자인을 생각하면 보편적 시각 언어를 먼저 떠올렸죠. 하지만 지금은 각자의 문화적 배경과 시각적 기억이 분명할수록 더 흥미로운 대화가 가능합니다. 여러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제 작업이 한국의 시각 문화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동시대 그래픽 언어 안에서도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서구적 미감과 차별화되는 동아시아의 감각이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동아시아의 감각은 완결된 하나의 형태보다 관계와 흐름, 축적된 시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쌀을 주식으로 한 식문화의 영향일지도 모르겠군요. 동아시아의 시각 문화에는 모호함, 겹침, 여운, 상징, 장식, 기원의 감각이 강하게 존재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문자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한자 문화권과 한글의 시각 문화 안에서 문자는 이미지이자 구조이고 때로는 장식이며, 동시에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동아시아 그래픽의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작업에서 문자는 읽히는 대상인 동시에 보이는 대상입니다.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질감이 되고, 형태가 되고, 하나의 장면을 구성합니다. 그 양가성이 동아시아적 그래픽의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의 그래픽 신 자체의 위상이 높아졌어요.
분명히 한국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이전보다 커졌다고 보입니다. 한국의 대중문화, 출판, 음악, 전시, 브랜드, 영화, 패션 등 다양한 분야가 주목받으며 그래픽 디자인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새롭게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그래픽의 위상은 단지 외부의 관심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각자의 자리를 지켜온 디자이너, 출판인, 교육자, 연구자, 문화 생산자들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갑자기 생긴 유행이 아니라, 그동안 쌓여 온 장면이 비로소 더 넓게 보이기 시작한 결과인 셈이죠.

이런 상황에서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장까지 맡게 됐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군요.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학회는 기록하고 연구하고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한국의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커지는 시기에는 그 흐름을 비평적으로 정리하고 다음 세대와 공유하는 일이 중요하죠. 학술 대회, 전시, 출판, 아카이브, 국제 교류가 하나의 순환 구조를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술 발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고, 연구로 확장하고, 다시 교육과 현장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한국 타이포그래피가 아시아와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언어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