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26 리뷰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이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지난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11개 디자인 디스트릭트에서 350여 개 이벤트가 열리며 도심 전역을 물들였다.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26 리뷰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이 올해로 24회를 맞았다. 지난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11개 디자인 디스트릭트에서 350여 개 이벤트가 열리며 도심 전역을 물들였다. 공동 설립자 벤 에반스Ben Evans는 “커미션으로 제작하는 스페셜 프로젝트는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핵심 정체성”이라며 2007년 자하 하디드와의 첫 협업 이후 지금까지 15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고 밝혔다. 밀라노나 파리처럼 거대한 단일 전시장 없이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미술관의 권위와 지역 커뮤니티의 활기, 브랜드의 상업성과 신진 디자이너의 실험성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것이 이 페스티벌만의 특징이다. 특히 올해는 AI를 둘러싼 담론과 몰입형 전시, 공예적 감각이 공존했다. 도시 곳곳에서 발견한 올해 행사의 주요 흐름을 짚어본다.

AI가 던진 5개의 화두
V&A x LDF26: 깨어남Awak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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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과 V&A는 AI를 주제로 한 영상·설치 프로젝트를 다수 선보였다. V&A 사우스켄싱턴 갤러리에 설치된 이은조의 작품. 사진 Tim Readhead ⓒ V&A

모두가 AI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얼마나 활용하는지는 공유하기를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허브인 V&A가 올해 큐레이션한 9개 영상·설치 작업 중 5개가 AI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됐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V&A는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영성, 신체, 생태, 노동, 공예라는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을 탐구하는 매개로 다뤘다.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은조는 신작 커미션 ‘공허가 응시할 때When the Void Gazes Back’로 영성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AI가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갖춰가는 지금, 그것이 영적 각성과 비인간 존재의 의식을 어떻게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지 탐구한 것이다. 스크린 앞에는 재활용 점토로 만든 조각상을 설치해 관객과 영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유도했다. 니나 데이비스Nina Davies의 ‘이미지 싱커Image Syncers’는 신체와 기술의 관계에 주목했다. AI가 만들어낸 기묘한 춤 동작을 따라 하는 틱톡 트렌드에 착안해, 인간이 점차 AI가 생성한 미학에 자신의 몸을 맞춰가는 현상을 퍼포먼스로 풀어내 눈길을 끌었다. 세네갈과 레바논계 작가 린다 두니아 르베이즈Linda Dounia Rebeiz는 생태적 상상력을 확장한 작업을 선보였다. 멸종 위기 식물 자료를 바탕으로 AI를 통해 꽃의 시각 데이터를 재구성한 영상 작품 ‘옛날 옛적 어느 정원에서Once Upon A Garden’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50종의 가상 식물을 통해 생태계와 기억의 문제를 환기했다. V&A 연례 신진 디자인 커미션 수상자인 아티스트 듀오 플레이풀Playfool의 ‘더 서버The Server’는 AI 산업을 떠받치는 데이터 센터를 매개로 자동화 시대에도 남아 있는 인간 노동의 역할을 조명했다. 영국에서만 2030년까지 약 100개 데이터 센터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청소와 유지·관리 같은 업무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이 간극을 게임 형식의 설치로 풀어내 관람객이 대형 서버를 유지·관리하며 AI 인프라를 떠받치는 노동을 체험하게 했다. 런던 기반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작가 아지자 카디리Aziza Kadyri는 ‘발신자 미상Sender Unknown’에서 우즈베키스탄 누로타 지역의 전통 자수 기법과 디지털 프린팅을 결합한 AI 모델을 개발해 공예와 기술의 관계를 탐구했다.

멸종 위기종에서 길어 올린 보호와 연대의 구조물
천산갑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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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갑의 비늘에서 착안한 대나무 그리드셸 파빌리온 ‘천산갑의 방패’. 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프로젝트다. 사진 Mark Cocksedge

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또 다른 키워드는 자연과 생태, 공존 방식의 탐구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법 밀매되는 포유류는 무엇일까? 바로 천산갑이다. 다소 생소한 이 동물은 잘못된 약용적 가치에 대한 맹신과 사치품 수요로 인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영국과 인도 기반의 건축 스튜디오 스튜디오 사르Studio Saar와 건축 구조 엔지니어링 회사 아틀리에 원Atelier One은 천산갑의 비늘과 몸체에서 착안한 대나무 그리드셸gridshell 구조의 파빌리온 ‘천산갑의 방패The Pangolin Shield’를 선보였다. 표면에는 인도의 두 가지 전통 요소를 적용했다. 경찰이 사용하는 진압 방패와 농부들이 비를 피할 때 쓰는 크눕knup이다. 구조를 떠받치는 대나무는 인도 3개 주에서 조달해 연대의 의미를 담았다.

최종 컨펌 전 진행형의 미학
〈완벽하게 불완전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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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 졸업생들의 프로젝트 ‘원 툴 원 스툴One Tool One Stool’. 사진 Andy Stagg

완성된 결과물보다 디자인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도 있었다. 크롬웰 플레이스에서 열린 브롬튼 디자인 디스트릭트의 기획전이 대표적이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스트 알렉스 티에히워커Alex Tieghi-Walker는 “디자인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작품의 최종 형태가 결정되기 이전에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일어나는 결정, 대화, 발견이 핵심이다. 관람객이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전했다. 전시 제목이 ‘완벽하게 불완전한Perfectly Imperfect’인 이유다. 영국 패션 및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토스트Toast는 그간 브랜드와 협업한 디자이너와 장인들의 작업실을 재현했다. 아트 퍼니처처럼 작품의 권위를 강조하는 테이블 대신, 철제 작업대 위에 도구와 소재를 올려두고 관람객이 직접 살펴보고 만져볼 것을 권했다. 이 밖에도 미완과 완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2026년식 브루탈리즘 유산의 재해석
메이드 x 바비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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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칸 단지에 놓인 플린치 라운드 테이블.

도시의 건축 유산을 동시대 디자인 언어로 재해석하는 시도도 이어졌다. 영국 가구·인테리어 소품 브랜드 메이드Made가 브루탈리즘 건축 유산인 바비칸Barbican과 협업한 23종의 제품을 공개한 것. 페스티벌 기간 동안 바비칸 센터에서 선보인 이번 컬렉션은 1960년에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미리엄 하윗Miriam Howitt이 바비칸 레지던스 홍보를 위해 제작한 모델 하우스와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았다. 미리엄 하윗은 명확한 타깃층을 설정하고 그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가구와 소품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바비칸의 주거 공간을 소개하며, 거칠고 산업적인 이미지로만 받아들였던 브루탈리즘 건축에 대한 반감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이번 컬렉션은 바비칸 단지의 발코니 구조에서 착안한 디테일을 적용한 플린스 사이드보드Plinth Sideboard와 책장, 격자형 천장에서 영감을 받은 정사각형 우드 프레임의 코퍼 월Coffer Wall 조명, 대담한 컷아웃 형태와 얇은 금속 크로스바, 벨벳 패브릭이 어우러진 듀얼 액센트 체어Dual Accent Chair를 비롯해 러그와 쿠션 등 다양한 생활 제품을 아우른다. 특히 바비칸 외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입주자만 이용할 수 있는 성큰 시팅 포드의 구조적 특징을 접목한 플린치 라운드Plinth Round 테이블은 평소 바비칸의 팬이라면 눈여겨볼 만하다.

제약 속에서 발견한 신진 디자이너의 실험
〈제약이 만든 창조성〉

디자인 위크나 페스티벌 기간에 브랜드와 기관의 커미션으로 제작한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은 ‘올해 꼭 봐야 할 작업’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는다. 그렇다면 아직 이름을 알리지 않은 신진 디자이너의 작업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올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는 영국 기반의 비영리 컬렉티브인 디자인 에브리싱Design Everything과 런던의 디자인 리테일 브랜드 아람Aram이 공동 개최한 전시 〈제약이 만든 창조성With Limitations〉에서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디자인 에브리싱은 오픈 콜을 통해 모집한 신진 디자이너 100여 명의 작품을 아람 쇼룸 지하 갤러리에 가상의 주거 공간처럼 꾸려 전시했다. 가구, 텍스타일, 그래픽, 제품 디자인을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공간, 예산, 시간, 재료, 장비 접근성 같은 제약 조건이 어떻게 창의성과 혁신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한 작업에는 오늘날 디자인 산업이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이 담겨 있었다.

다시 뜨거워진 이스트런던
하우스 오브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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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앉아도 좋아〉에 참여한 마라 브라가노로Mara Bragagnolo의 배드 포스처 체어Bad Posture Chairs. 사진 Megan Taylor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은 지역적 특징에 따라 총 11개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나뉘어 열린다. 그중 올해 쇼디치 디자인 위크Shoreditch Design Week는 몇 해 전까지 트루먼 브루어리를 중심으로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의 열기를 이끌었던 이스트런던의 영광을 되돌려 놓은 듯했다. 특히 쇼디치 타운홀에서 열린 큐레이션 플랫폼 ‘하우스 오브 아이콘House of ICON’은 2년 만에 주요 방문지로 자리 잡으며 한층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올해 메인 전시는 단연 런던 기반 디자인 스튜디오 2LG가 기획한 그룹전 〈우리와 함께 앉아도 좋아You Can Sit with Us〉였다. 네 번째 에디션을 맞은 이 신진 디자이너의 쇼케이스는 ‘뒤엉킨 마음Messy Heart’을 주제로 완벽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온기와 위트를 담은 디자이너 20명의 작품을 소개했다. 밀라노와 두바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솔라 디자인 그룹Isola Design Group의 그룹전은 이스트런던 로컬 신에 국제적 시선을 더했다. 패널 토크, 인터뷰, 라운드 테이블, 퀴즈 등으로 구성한 스피크이지Speakeasy 세션은 디자이너와 관람객이 교류하며 담론을 나누는 장이었다.

하드우드 수종의 가능성
〈나무에서 목재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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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목재로〉전. 사진 Thomas Adank ⓒ쇼디치 탭 센터

크고 작은 디자인 이벤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페스티벌 기간에 〈나무에서 목재로Wood for Tree〉는 잠시 걸음을 늦추게 하는 전시였다. 쇼디치 탭 센터에 들어서자 미국활엽수수출협회(AHEC)가 조성한 숲과 나무 향이 공간을 채우며 실제 숲에 들어선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런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마이트레 & 먼데이스Mitre & Mondays가 기획하고 영국 목가구 브랜드 벤치마크Benchmark가 제작한 이 몰입형 스토리텔링 전시는 나무의 생애를 성장부터 디자인에 이르는 여섯 단계로 나누어 목재가 탄생하는 여정을 보여주었다. 전시에서는 목재 시장에서 상업적 가치나 선호도가 낮아 비교적 주목받지 못했던 하드우드 수종의 다양한 가능성을 소개하며 책임감 있고 균형 잡힌 목재 소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 2026
웹사이트
londondesignfestival.com

글 신정원 객원 기자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80호(2026.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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