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위해, 채경선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가 잔인한 경쟁 구도 속에서 목숨을 건 게임으로 연결되는 설정으로 출발한 이 드라마는 채경선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세트와 이미지를 통해 가장 강력하고도 특별한 미장센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캐릭터, 이야기와 더불어 관객에게 남는 건 화면 속 이미지의 잔상이다. 론칭 28일 만에 1억 1100만 명이 시청하며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오징어 게임〉을 다시 떠올릴 때 역시 그렇다. 우리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섬뜩하게 외치는 소녀 형상의 로봇 병기, 끝없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계단, 수수께끼 같은 세모, 네모, 동그라미 도형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추억의 놀이가 잔인한 경쟁 구도 속에서 목숨을 건 게임으로 연결되는 설정으로 출발한 이 드라마는 채경선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세트와 이미지를 통해 가장 강력하고도 특별한 미장센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어떤 계기로 영화 프로덕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
학창 시절 일기장에 영화 감상 평을 남기는 걸 즐겨했다. 그때 쓴 일기장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아끼는 애장품이다. 부모님도 영화를 무척 좋아하셔서 어릴 적부터 나를 극장에 자주 데리고 가줬다. 내 유년 시절은 문화예술과 그림으로 채워졌기에 자연스럽게 무대미술학과에 진학했는데 학과 수업을 통해 영화미술에 더욱 흥미를 가지게 됐다. 당시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 제작을 도우면서 아카데미 및 연출부 친구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이들과 단편영화나 독립 영화 작업을 함께 하면서 경험을 쌓아갔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첫 작품이 〈조금만 더 가까이〉다.
2004년 김종관 감독의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보고 팬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출부 친구가 2010년에 개봉하는 김종관 감독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의 조감독을 맡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김종관 감독을 직접 찾아가서 용감하게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저예산 영화였지만 미술적 측면을 살리기 위해 집에 있는 소품을 몽땅 가져가서 세팅했던 기억이 난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초현실주의 판화가 에셔M.C. Escher의 무한계단을 오마주한 미로 복도를 비롯해 다양한 세트가 인상적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한국적 정서를 담은 잔혹 동화 같았다. 1970~1980년대 아이들이 즐겼던 게임을 통해 인간의 잔혹성과 이기심을 엿보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 매력적이었다. 여섯 가지 게임 속 공간에 캐릭터를 부여하고 싶었고 동화적 컬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동시에 컬러가 가진 상투적 느낌을 벗겨내고자 했다.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새로운 게임장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었다. 게임장은 현실인지 과거인지, 진짜인지 거짓인지 혼동되는 동화적인 공간으로 목숨을 건 게임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의 치열한 경쟁을 세트에서 더욱 비극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더 큰 공포심과 아이러니한 감정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린(참가자)과 핑크(감시자) 등 의상의 컬러를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황동혁 감독은 거칠고 리얼한 현실과 동화적이고 판타지스러운 게임 속 세상의 충돌로 부조리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이 가장 차가운 현실로 변모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만 했다. 컬러에도 그런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오징어 게임〉 의상감독이 주요 의상 컬러 중 하나를 핑크로 제안했는데, 내가 미술 콘셉트로 구상한 컬러도 핑크여서 마음이 통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핑크는 유년 시절을 연상시키는 유아적인 컬러지만 극 중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주는 색으로 심리적인 작용을 한다. 이와 보색 관계에 놓인 참가자들의 녹색 트레이닝복은 1970~1980년대 운동회 때 입었을 법한 느낌이다. 참가자와 감시자, 두 집단의 컬러 맵을 만들고 나니 공간 등 미술적인 미장센에 들어가는 컬러 맵을 만들기도 수월해졌다.
세트 공간 역시 극명한 색 대비가 느껴진다.
게임장 진입 전 거쳐가는 미로 복도에 감시자 의상과 동일한 핑크색을 적용한 것은 참가자들에게 억압된 감정을 심어주고자 한 것이다. 서브 컬러로 파스텔 옐로와 스카이블루를 사용해 동화적인 느낌을 주었다. 반대로 감시자들의 숙소와 복도는 녹색 공간으로 조성했다. 복잡한 미로 복도를 지나면 나오는 대기 장소에서 참가자들은 앞으로 어떤 게임이 등장할지, 누구와 짝을 짓고 의논해야 할지 모르는 무지 상태가 되는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공간 전체에 화이트 컬러를 적용했다. 사실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프로덕션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화이트는 사용하기 어려운 컬러다. 비어 있는 듯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내게 큰 도전이었다.
여섯 단계의 게임 세트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트가 있다면?
배우들이 현장감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실제 게임장과 흡사하게 만드는 것이 감독의 요구 사항이었다. 이를 위해 CG를 최소화하고 각각의 게임 세트는 물론 400여 평의 공간에 침대 456개를 쌓아 올린 숙소까지 거의 모든 세트를 실제 크기로 제작했다. 이 중 ‘깐부’ 편의 세트로 미국 미술감독조합상(ADG)을 받았는데, 오일남 할아버지(오영수 분)의 추억 속 조각들을 모아놓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구성하는 것이 콘셉트였다. 생존과 죽음, 양면성이 보이는 진실과 재현의 허구, 친구를 맺거나 소중한 이를 잃어야만 하는 정서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해서 더욱 많은 공을 들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 또한 중요한 시각적 요소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 도형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한 상징이자 관리자들의 계급을 나타내며 참가자들을 초대하는 명함과 게임 속 도구, 공간 속 픽토그램, 마지막 참가자 3명의 식탁 등 곳곳에 숨어 있다. 무표정함을 연출해야 하는 관리자의 가면을 디자인하기 위해 많이 고민했는데 펜싱 선수들이 쓰는 마스크를 차용해 도형을 넣어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특수소품팀과 샘플을 작업하며 형태를 잡아가면서 개미 얼굴처럼 보이도록 느낌을 살렸다. 공간의 높낮이에 따른 소품 배치도 중요했다. 456억 원이 든 돼지 저금통은 마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신처럼 참가자들이 언제나 우러러보고 열망하도록 천장 꼭대기에 매달았다. 고공과 평지를 오가며 높이가 제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각 게임장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자신의 위치에 따라 차별받고 때론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는 현실을 투영한 것이었다. 즉 현실과 게임 속 세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다.
시대극부터 현대극까지 다양한 영화미술을 맡았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장르가 있나?
사극은 과거의 공간이지만 실제 누군가가 존재했던 공간처럼 영혼을 담아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프레임 안에 세세하게 미술적 요소를 더하고자 더 많은 역사적 자료를 찾아보며 연구한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아프고 처절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표현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임했던 작품이다. 여타 사극과는 달리 컬러를 절제해 추위와 비참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실제 청나라 자료를 살펴보면 8색 깃발을 그린 그림이 많지만 황색으로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차가운 그레이 컬러, 우리나라 전통 색이름으로 말하자면 ‘치색’을 활용했다. 평창에 오픈 세트장을 조성하기에 앞서 몽골까지 가서 당시 청나라 유목민들이 살던 주거 형태인 게르를 구해 왔고, 남한산성에 수십 차례 방문해 돌 하나하나의 사이즈를 확인해가며 성첩을 만들었다. 이런 밀도 있는 작업이 사극의 매력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역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의도를 알고 보면 같은 영화도 다르게, 또 입체적으로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소개하고 싶은 세트가 있는지 궁금하다.
2019년 개봉작 〈엑시트〉는 옥상 헌팅을 가장 많이 했던 작품이다. 스태프들과 자주 옥상에 올라가서 “우리가 저 멀리 크레인까지 살아서 갈 수 있을까?”라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염없이 건물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운전하거나 길을 걷다가 멈춰서 옥상과 건물을 살펴보며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한국에는 획일적인 아파트도 많지만 저마다 사연이 있을 법한 이색적인 형태의 건물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외관에 부착된 각양각색의 간판도 눈에 띄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활용해 영화 속 재난 상황에서 두 주인공이 뛰어넘는 건물들에 다양한 캐릭터를 부여할 수 있었다. “35년…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육교의 문구나 “체중계에 올라가, 할 수 있어”라고 써놓은 헬스장 건물, “청년들을 살려내라”, “취업률 100%”와 같은 현수막 문구 등을 활용했던 것. 이는 삼포세대라고 불리는 청년들에게 전하는 응원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는데 주인공 의주(임윤아 분)가 ‘헬스’ 간판을 밟고 올라갈 때 ‘스’ 자가 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헬’이라는 글자가 ‘지옥(Hell)’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기에 주인공들이 과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싶었던 것인데 안전상 문제로 그 부분은 실행되지 못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강세를 보이면서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오징어 게임〉 덕분에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전까지 프로덕션 디자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분들까지 우리 일의 중요도를 알아보고 응원해주어 힘이 난다. 넷플릭스 초청으로 감독, 배우들과 함께 LA에 가서 홍보 활동을 했는데 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몸소 체험했던 순간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으로 함께했던 스태프들과 곧바로 시즌 2 재계약을 마쳤다. 다음 편에서도 흥미로운 프로덕션 디자인을 보여줄 계획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100명이 넘는 스태프들과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년을 함께 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도가 떨어지면 힘이 들기 마련이다. 일에서 오는 육체적인 고통과 피로보다 사람에게 상처받아 화가 나는 경우가 있다. 미술팀은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하기에 서로의 희로애락을 목도하게 된다. 나에게 사람에 대한 애정은 영화를 하면서, 또 영화 속 캐릭터를 분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람이 만드는 창작물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사람과 이야기와 시각적 요소를 밀도 있게 담아내는 직업이기에 더욱 그렇다. “영화미술은 매혹적인 절제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물건들처럼 비쳐져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상상과 허구의 세계를 위해서 재구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미술처럼 세상을 주의 깊게 살피게 해주는 직업은 좋은 직업임에 틀림없으며, 영혼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직업이다.” 폴 오스터가 쓴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문구인데 우리가 하는 일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