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의 생애, 조성룡 x 이인규

도시의 웰빙과 웰다잉에 대한 이들의 질답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면서 동시에 아파트 불모지라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나아가 아파트 단지의 새로운 생애 주기를 설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선행해야 할지 어렴풋하게나마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단지의 생애, 조성룡 x 이인규

건물의 생사는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완공된 순간부터 서서히 낡기 시작하며, 노화를 피할 수 없지만 그 또한 자연스러운 나이 듦이다. 아파트를 얘기할 때 반드시 호명되는 국내 몇 안 되는 건축가 조성룡과 아파트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어야 할 거주의 가치를 기록해온 이인규가 재건축을 말하기에 앞서 단지의 생애를 톺아본 이유다. 도시의 웰빙과 웰다잉에 대한 이들의 질답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면서 동시에 아파트 불모지라는 씁쓸한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된다. 나아가 아파트 단지의 새로운 생애 주기를 설계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선행해야 할지 어렴풋하게나마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왼쪽) 조성룡 1944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우일건축연구소에서 일하다 1975년 우원건축연구소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1983년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 선수촌 및 기념 공원’ 국제 설계 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하면서 건축계에 등단했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인하대학교 학생회관, 의재미술관,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한강 선유도공원, 서울어린이대공원 꿈마루 등이 대표작이다. 현재 조성룡도시건축(UBAC) 대표이며 소록도 마을 프로젝트 ‘건축의 소멸’, 잠실5단지 주거 복합 시설 국제 설계 공모 당선작 ‘잠실의 큰 그림: 잠실대첩蠶室大帖’ 등의 작업을 통해 도시와 관계를 맺고 있다.
(오른쪽) 이인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나고 자랐다. 유년 시절을 보낸 소중한 동네가 재건축으로 사라진다기에 2013년부터 그곳을 기록하고 기리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 둔촌주공아파트의 40년 생애를 정리한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두 번째 이야기 ‘2013년의 봄 그리고 여름’, 구석구석 샛길이 많은 둔촌주공아파트, 4단지로 가는 길. 사진 이인규

이인규 최근 도서출판 마티에서 새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2013년에 출간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가 지극히 거주자 관점으로 기록한 아파트였다면, 곧 선보일 책에서는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요. 대단지라는 기형적인 도시 조직이 어떤 집단을 만들어내는지, 그 사람들은 지역사회에서 어떤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지, 아파트 담장 너머에서 바라본 이야기가 될 거예요.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조선 시대 궁보다 커요. 애초에 짓기 전부터 그렇게 계획했다는 것을 상상하면 이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죠. 단순히 아파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들여다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도시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뚝 잘라낸 듯한 아파트 단지의 물량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심지어 재개발하며 더 큰 단지를 조성하기도 하니까요.

조성룡 아주 중요한 얘기를 꺼냈어요.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는 천지 차이예요. 규모와 질서 자체가 달라지죠. 지금 재건축하고 있는 곳들도 전부 그냥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거든요. 하지만 처음부터 아파트가 단지로 지어진 것은 아니에요. 1970~1980년대부터 단지화 열풍이 불었죠. 국가가 마련해줘야 할 기반 시설이 분명히 있는데 단지를 세우면 저절로 인프라가 구축되니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어요. 사실은 거주하는 사람이 다 돈을 내는 것인데 입주자들은 그래도 집값이 오르니 좋아했고.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떠한 정의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어요. 도심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데 반해 제대로 된 사회적 리뷰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산업이 커지면 그에 따른 담론이 생기고 사회적 시스템도 체계를 갖춰가는데 주택 산업에서는 그게 전혀 작동이 안 된다는 것이 참 희한하죠.

이인규 잠실 같은 경우 거의 신도시급 시가지잖아요.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 당시에는 정말 필요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중산층을 키워내기 위한 기반이 된 것 같아요. 단지 자체가 하나의 행정동이 되다 보니 정치적 세계관을 심기에 상당히 좋은 모델이자 단위였다는 생각도 들고요.

조성룡 6.25 전쟁이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대학교에 들어간 1962년도에는 교수들조차 공부할 서적이 많지 않았어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책을 구할 길이 없었던 거죠. 우연히 어떤 기회에 일본 잡지를 한 권 봤는데 그때 ‘커뮤니티’라는 단어를 처음 봤어요. 알고 보니 그게 결국 아파트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유럽에서 아파트가 어떻게 출발했는지, 산업혁명 이후 영국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도시 주택의 발전 과정에서 어떤 기반 시설이 들어섰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그 끝에 르코르뷔지에가 등장해요.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는 ‘컴’이라는 글자만 들어가도 ‘코뮤니즘’이니 ‘코뮤니스트’니 하면서 불온하게 바라봤거든요. 지금이야 너무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6.25 전쟁을 겪은 우리에겐 하나의 큰 벽이 세워져 있었고 그 벽을 넘는 것을 금기시했어요. 한국에는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어요. 단절된 60년이죠.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도시 주택 분야의 역사는 상당히 짧았고,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일이 설명할 수조차 없는 빠른 프로세스로 흘러가버렸어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세 번째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들의 놀이터’, 기린 미끄럼틀. 사진 김기수

이인규 사실 오늘 대담을 나누기에 앞서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관한 것이었어요. 한 아파트의 설계자가 40년 가까이 그곳에 거주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짜 살기 좋은 집의 방증 아닐까요? 저는 건설사가 자주 사용하는 ‘명품 아파트’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하지만, 지금 우리가 명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파트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이 두 곳이라고 생각해요. 아파트는 분양이 끝나면서부터 상대적 지위가 점점 낮아지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그 둘은 좋은 아파트 단지로 지금까지 평가받고 있잖아요.

조성룡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관한 제일 유명한 소문은 거주자들의 연령대가 높다는 거예요.(웃음) 어쨌든 편안한 동네죠. 공원도 있고 편의 시설이나 교통 시설도 탄탄해요. 도시의 중산층이라면 선호할 만한 것을 다 갖추고 있죠. 야구 좋아하는 사람이 부러워하는 단지로 독특하게 인식되기도 하는데, 그래도 노인층이 많이 산다는 것은 아마 걸어 다니기에 쾌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단순히 아파트 단지가 넓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에요. 이곳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도 바로 어린아이와 노인, 그리고 운전을 하지 않는 가정주부들이 걷기 좋은 길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당시 남자들은 다 차 타고 일하러 나가고, 결국 아파트에 가장 오래 머무는 사람은 아이, 노인, 가정주부였거든요. 걸어 다닐 마음이 안 생기는 외부 공간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지금은 다행히 노인이 많아서 재건축 투표를 해도 맨날 부결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또 어떤 욕심을 부릴지 몰라요. 잠실주공1단지부터 4단지까지는 도시 문제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서 재건축을 마쳤어요. 단지 안에 학교가 있는데 4~5층짜리 아파트를 30층까지 올리면서 교통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혔어요.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동선이 당장의 편리함을 줄진 몰라도 운전을 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노인은 도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어요. 완전한 약자죠.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도시 설계 전반에 상당이 큰 영향을 끼칠 거예요. 일찍이 자동차 도시를 이룬 미국에서는 50년 전 이미 비슷한 문제를 고민했고요.

이인규 모든 것을 정제해놓거나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획일주의가 가끔 오싹할 때가 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집으로 돈을 벌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는, 20세기적인 소시민이었던 것 같아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처음 준비할 때만 해도 도시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어요. 이렇게 좋은 아파트를 없애는 데 왜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혈안이 되어 있나.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아파트가 사라진다니 믿기지 않았고, 이곳을 재건축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죠. 고등학생 때 둔촌동을 떠나 하남시로 이사를 했는데 한번 떠나봤으니 이곳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클지 미리 알았나 봐요. 프로젝트를 2013년에 시작해서 사람들이 이주한 게 2017~2018년쯤인데, 재건축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줄도 몰랐으니까.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도 좀 무모했어요. 둔촌주공아파트가 정말 좋은 거주지였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찾고 싶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박철수 교수를 만났고, 도시 주택에 대한 서사를 한 꺼풀씩 벗겨내며 단지의 또 다른 사이클을 이해하게 된 거죠. 그곳에 살 때는 정말 좋았는데, 그 존재 자체는 굉장히 기형적이었다는 것을 공부하면서 서서히 알게 된 거죠. 재밌는 점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도 여전히 둔촌주공아파트가 좋았다는 거예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한 건축가의 고민과 노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분명히 거주자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하거든요. 그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앞으로 재건축이 이뤄지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이 생겼죠.

조성룡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원설계자인 우규승 건축가를 섭외해 재건축 단지 배치 계획안 수립을 요청했어요. 이게 좋은 사례가 되길 바라요. 잠실주공5단지는 현재 치킨 게임에 가깝다고 봐요. 저희 설계안에서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가로변 저층부에 상가를 배치하고 상부 보행 공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초고층에 의해 변화되는 햇빛과 바람을 고려하는 것. 50층에 이르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회오리바람이 생기면서 공기의 흐름과 일조 자체가 바뀌는데,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없이 사업성을 위해 층수만 내세워선 안 된다는 것이죠. 재건축이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나 단지를 재생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내심 생각했는데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아시아선수촌아파트 국제 설계 경기(1983) 때 제출한 조성룡+문정일+강기효 안의 모형.

이인규 단지라는 울타리 안에 폐쇄적으로 형성해놓은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도시를 사유 재산과 공유 재산의 이분법적 사고로만 구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조성룡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아파트는 법률상 공동주택이에요. 공동으로 쓰는 것은 인프라뿐인데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놀이터를 기록한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재건축 과정에서 기린 놀이터 정도는 그대로 옮겨놓아도 됐을 텐데. 보니까 높이도 꽤 되는 것 같고, 애들이 굉장히 좋아했겠어요. 어른이 보면 우스울지라도 어린이 세계에서는 자신만의 모험이 꼭 필요하거든요.

이인규 맞아요. 한 5m 돼요. 기린 놀이터는 뭐랄까, 내가 완전 꼬맹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꽤 수준 있는 곳이었어요. 이곳의 미끄럼틀을 탈 수 있는가에 따라 어린이들의 체급도 나뉘었거든요. 그리고 너무 안전하기만 하면 위험을 못 배운다고 해요. 둔촌주공아파트에는 놀이터가 12개 있었는데, 저도 기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어요. ‘어린애’, ‘좀 더 어린애’, ‘조금 큰 애’를 꽤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고려해서 만든 놀이터라는 것을요. 또 놀이터와 놀이터 사이에는 보행자 전용로가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었고요. 둔촌주공아파트 어린이들은 설계자의 의도대로 살았던 셈이죠. 그래서 어쩌면 이곳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실감이 컸을지도 몰라요.

조성룡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교환했겠어요. 기지도 만들고요. 정말 중요한 경험이에요. 조금 큰 애들은 또 주차장을 그렇게 좋아해요. 놀이 기구가 있는 곳만 놀이터가 아니잖아요. 아이들은 자신이 뛰노는 곳을 전부 놀이터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요즘 지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시대가 바뀌고 있는 만큼 아파트 단지도 이런 문제를 조금씩 극복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인규 ‘잠실대첩 프로젝트’나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설계를 맡기 이전부터 아주 오랜 시간 이런 고민을 해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상계주공4단지도 있었고요. 잠실주공5단지는 단순히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안 대로 아파트를 지을지 말지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아마도 아파트의 현재뿐 아니라 재건축 이후의 30~40년까지도 염두에 두셨겠죠. 저 또한 둔촌주공아파트가 사라지는 지난한 과정을 보면서 한편으론 재건축이 끝이 아니라,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이 새롭게 쌓이고 그 시간이 꽤 길 것이라는 가늠을 하게 됐거든요. 아파트 단지의 엄청난 시간 축을 세우고 직접 경험한 사람의 관점이 궁금해졌어요.

잠실주공5단지 재건축 국제 설계 공모 당선작 ‘잠실의 큰 그림: 잠실대첩蠶室大帖’.
총괄 UBAC조성룡도시건축 (조성룡)
도시 컨설팅 KCAP Architects & Planners(케이스 크리스티안제)
조경 Design Studio Loci(박승진)
기획 수류산방중심(박상일·심세중)

조성룡 상계주공4단지 얘기를 하니까 그 기억이 나요. 내가 사무실 열고 얼마 안 됐을 때쯤 중산층을 대상으로 아파트를 만들어 파는, 소위 ‘아파트 회사’가 생겨요. 그 선두 주자에 우성이 있었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도곡동의 우성캐릭터빌이라는 곳을 내가 설계했어요. 타워팰리스가 생기기 전에 들어선 지상 26층 규모 건물인데 당시 우리나라에 갑자기 왜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오냐, 말이 많기도 했어요. 미국과 유럽에서는 도심 공동화를 해결하기 위해 복합 개발(mixed use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회사가 그야말로 한국식 주상복합건물을 만든 거죠. 그래서 주상복합건물이라는 개념 때문에 내가 좀 오버했나 봐요. 스스로 보기에 건물의 완성도가 떨어져요. 상계주공4단지도 비슷한 경우죠.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25층 초고층 아파트 모델을 제시한 것인데 딱 한 동만 지었잖아요. 결과적으로는 뭘 하나씩 하다가 꽃을 못 피운 셈이에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도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는 재건축을 해보자고 한 것인데 또 실패할 가능성이 커 보이죠. 오늘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끈질기게 무언가를 매듭짓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내가 건드려만 놓고 쉽게 떠나버렸나 반성하게 돼요.

이인규 건축계 전반에서 아파트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말 많이 짓고 있는 건축물임에도 막연하게 아파트는 닭장이고, 좋은 집이 아니라며 담론 자체를 회피했다는 점에서 아쉽기도 하고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아파트를 지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건축가 개개인의 고민은 있었겠지만 애초에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면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조성룡 맞아요. 내가 사무실 다닐 때만 해도 위 세대 선배들은 우리에게 건축사는 아파트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고, 좀 더 예술적 차원에서 건축에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어찌 보면 내가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설계를 맡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 건축가들이 아파트에 무관심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가치관을 지속할 수 있도록 건전한 의미의 힘을 기르고, 탄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하지 못한 우리 세대가 문제였구나. 이제는 정말 제대로 해야 할 텐데, 큰일이네.

이인규 한편으로는 재건축 단지 조합원도 이해는 돼요. 내 집이 나에게 벌어다 줄 수 있는 마지막 소득, 이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서 주식 투자하듯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실은 자본주의의 일상적인 패턴이니까요.

조성룡 재건축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건물의 가치가 사라지거나 주변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는 조건으로 고치거나 다시 지을 수 있죠. 그런데 지금 재개발 사업과 절차는 그 대응 방식이 너무 이상해요. 집 지은 지 30년이 지나면 재건축의 충분조건이 성립되도록 법이 정해져 있는데 그 근거조차 불분명하죠. 집을 많이 지어서 돈을 벌고자 하는 건설사와 그것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어떠한 인식 없이 그것을 좇고, 정작 그 집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묻혀 있고. 지금 지은 집이 30년 후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부동산 정책은 널을 뛰는 현실이 오늘날 재건축의 큰 문제라고 봐요. 결국 건축사가 할 일은 건축주가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더 올려주는 거예요. 돈으로 모든 가치를 잴 순 없지만 최소한 보장은 해주는 게 건축사의 임무이고, 자신이 지은 건물에 대해 상업적 책임을 져야 하죠. 좀 더 끈질기게 지탱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내 결점이에요. 한국 아파트의 속성을 들여다보면 정말 전장이 따로 없어요. 전투하는 마음으로 임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데 이제 좀 지치기도 하고요.

이인규 우리나라 건축계에서 명성이 높은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니 왠지 좀 서글프네요. 한국 건축가는 대체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우리는 대체 어떤 도시에 살고 있는 걸까요? 그래도 저는 공간을 경험한 사람은 분명히 그 힘을 느낄 것이라고 믿어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와 우성캐릭터빌에 오래 사는 사람들도 결국 그 시간으로 공간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 시절부터 오랫동안 둔촌주공아파트를 사랑한 저처럼요.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40호(2023.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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