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가 남긴 위대한 유산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리는 엔조 마리의 영국 최초 회고전
엔조 마리의 대규모 회고전이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총 3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이 중 대부분은 영국에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전후 이탈리아 디자인의 선구자인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엔조 마리(Enzo Mari)의 60년 경력을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가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이 대규모 회고전에는 디자이너로서뿐만 아니라 예술가, 교사, 비평가, 이론가로서 엔조 마리가 남긴 다작의 모든 스펙트럼이 포함되어 있다. 총 300여 점의 오브제가 전시되며, 대부분 영국에서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작품들이라는 사실이 이목을 끈다. 밀라노 트리엔날레가 제작한 이 전시는 2020년 밀라노에서 첫선을 보인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전시는 1990년대 엔조 마리와의 일련의 인터뷰를 통해 긴밀히 협력하고 이후에도 꾸준한 교류를 이어온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가 기획을 맡아서 화제가 되고 있다. 오리지널 전시는 엔조 마리가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열렸었다. 이번 전시의 구성은 작가가 생전에 기획한 마지막 전시인 2008년 토리노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엔조 마리: 디자인 예술>에서 발췌한 것으로, 프란체스카 자코멜리가 수집한 아카이브 자료를 포함하여 엔조 마리의 주요 프로젝트 창작 과정을 풀어내기 위해 더 확장된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디자인의 양심, 엔조 마리
엔조 마리는 이탈리아 디자인 역사의 거장으로서 그의 삶과 작품이 전 세계 여러 세대의 크리에이터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구부터 개념적인 설치 작품, 제품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엔조 마리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어린이책과 게임도 전시되는데, 이는 어른들만큼이나 어린이들의 창의적 요구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엔조 마리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전시 전반에 걸친 아카이브 자료는 엔조 마리의 연구 과정을 안내하는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며 관람객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한다.
마리의 작품을 재조명하고 그의 렌즈를 통해 지속 가능성과 접근성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시기입니다. 마리와의 많은 대화에서 마리는 디자인 오브제는 일회성 자원 낭비라는 생각에 맞서 오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이는 변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도 연결됩니다. 형태는 그에게 모든 것이었지만, 그는 이러한 형태를 통해 다른 사회를 위한 모델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탈리아와 벨기에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를 마친 디자인 뮤지엄이 런던으로 전시를 옮겨 영국 관객들이 엔조 마리의 놀랍고 천재적인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전시를 발전시켜 기쁘게 생각합니다.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타협하지 않는 신념과 전복적인 의견으로 유명한 엔조 마리는 ‘디자인의 양심’으로 불렸다. 그는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지식에 대한 접근을 촉구하는 행동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가격이 저렴하며 다양한 기능을 갖춘 그의 오브제는 설치 기반의 광범위한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신념을 대변한다. 또한 엔조 마리는 물질성과 미학이 모두 담긴 지속가능하고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으며, 오늘날 그는 디자인과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많은 문제에 대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의 중요한 지침서인 <Autoprogettazione>(Proposal for self-design)는 오픈 소스 디자인 관행의 선구자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례다. 오랜 경력을 이어오면서 엔조 마리의 시대를 초월한 많은 디자인이 전 세계 곳곳의 가정을 채웠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과와 배를 그린 ‘Nature Series’ 판화, 사출 성형 플라스틱으로 만든 영구 달력, 시대를 초월한 가구와 주방용품 등이 대표적인 아이템이다.
엔조 마리의 많은 작업의 근간에는 ‘놀이’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세상을 배우는 데 필요한 활동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장난감과 게임을 디자인하기로 결심했다. 이 작품들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일부가 되었으며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1957년 그가 만든 ‘16 Animals’은 낙타, 코끼리, 캥거루 등 16가지 동물의 실루엣으로 구성된 나무 퍼즐이다. 밀라노의 제조업체(Danese)가 제작한 이 퍼즐은 큰 인기를 끌었고, 16년 후 엔조 마리는 물고기, 물개, 문어 및 기타 바다 생물의 실루엣이 특징인 또 다른 버전인 ‘16 Fish’를 디자인했다. 두 퍼즐 모두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발견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엔조 마리가 만든 다른 장난감과 게임으로는 ‘The fable game’과 ‘The apple and the butterfly’가 전시되어 있다.
엔조 마리는 윤리가 모든 프로젝트의 목표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 다른 생산 및 생활 방식을 위한 모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프로젝트는 관조하거나 소비하는 형식이 아니라 지식에 의해 인식되는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변혁의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프로젝트 자체의 일부가 되는 것, 즉 수동적인 소비자 역할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희망으로 평생을 바친 하나의 프로젝트의 우화적 파편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식의 도구로 만들어진 그의 유산을 보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큐레이터 프란체스카 자코멜리
연대순으로 만나는 엔조 마리의 대표작과 예술가들의 헌정 작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프로젝트는 엔조 마리가 제작한 약 2,000여 개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분야, 매체, 연구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연대순으로 전시되는 게 특징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는 장소별 설치 작품과 특별 의뢰를 받은 새로운 작품을 통해 마리의 특별한 삶과 유산을 반영한 동시대 국제적인 예술가들의 헌정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흥미를 돋운다.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미모 조디체(Mimmo Jodice), 도지 카누(Dozie Kanu), 아드리안 파치(Adrian Paci), 바바라 스타우파처 솔로몬(Barbara Stauffacher Solomon),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 난다 비고(Nanda Vigo), 단 보(Danh Vō),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작품이 전시의 마지막 섹션을 구성하고 있다.
한편, 관람객들은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인터뷰 영상 시리즈를 통해 엔조 마리의 끊임없는 윤리적 긴장감을 목도할 수 있다. 디자인 뮤지엄 최초로 이 전시는 뮤지엄 발코니에서 추가 무료 전시를 진행하여 모든 방문객이 마리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13명의 현대 디자이너가 엔조 마리의 사상이나 그의 유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중 엄선된 작품을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여 디자이너로는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 스튜디오마마(Studiomama), 마르티노 감퍼(Martino Gamper), 인터스트리얼 파실리티(Industrial Facility), 안두 마세보(Andu Masebo), 마이클 메리어트(Michael Marriott), 스페셜 프로젝트(Special Projects), 재클린 파파라르도(Jaclyn Papparlardo), 어 프랙티스 포 에브리데이 라이프(A Practice for Everyday Life), 리오 코바야시(Rio Kobayashi), 사운드 어드바이스(Sound Advice), 리비아 라우버(Livia Lauber), 스터디오포터블(StudyOPortable)이며, <Grazie Enzo: Contemporary Responses to Enzo Mari>라는 제목의 전시로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