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정수’를 담는 용기 디자이너 정수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동차 디자이너로, 또 생활 가전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2011년 용기 디자인 전문 회사 디오리진을 설립하고 새로운 모험을 시도 중이다. 디자이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다름 아닌 ‘용기’와 ‘인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디자인 세계 안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코카콜라, 앱솔루트 보드카, 항아리 모양의 바나나 우유…. 이 제품들의 공통점은 용기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는 점이다. 용기는 이제 내용물을 담는 용도를 넘어 하나의 브랜드가 지닌 역사와 비전, 철학과 가치를 담는 역할까지 한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경쟁 제품과의 승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만큼 날카로운 비즈니스적 통찰력도 담아내야 한다. 정수 디오리진 대표는 그 누구보다 용기 디자인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동차 디자이너로, 또 생활 가전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2011년 용기 디자인 전문 회사 디오리진을 설립하고 새로운 모험을 시도 중이다. 디자이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은 다름 아닌 ‘용기’와 ‘인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디자인 세계 안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정리: 최명환 기자, 인물 사진: 한도희(스튜디오 얼리 스프링)
대우자동차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예술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과 달리 미술이나 디자인 계통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거든요. 재수 생활을 하면서 간신히 다시 미술을 시작할 수 있었고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과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사실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국민대 김철수 교수님과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경배 교수님 덕분이었습니다. 학교에 붙들려 있다시피 하면서 과제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우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볼펜잉크가 다 닳을 때까지 스케치를 하게 한 다음에야 퇴근을 시킬 정도로 하드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그때 디자인에 대해 참 많이 배웠던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1986년 1월호 월간 <디자인>에 ‘1986년에 기대되는 신진들’이라는 이름으로 제 인터뷰가 실린 적이 있어요. 28년 만에 다시 월간 <디자인>에 실린다니 감회가 새롭네요.(웃음)
2002년부터 코다스디자인으로 자리를 옮겨 대표까지 역임했습니다. 코다스디자인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우자동차와 대우 기획조정실 등에서 경험을 쌓고 2002년 코다스디자인 이사로 가게 됐습니다. 제가 코다스디자인으로 옮기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코다스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생활 가전용품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코다스 디자인은 산업 장비나 의료 기기 디자인에 집중했거든요. 이후 부사장을 거쳐 공동 대표까지 지냈습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코다스디자인이 용기 디자인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용기 디자인의 비중이 컸던 것은 아니었어요. 초기에는 회사에서 차지하는 매출의 비중도 크지 않았고요. 하지만 용기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비중도 늘어나게 됐죠.
클라이언트 롯데칠성음료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크로스포인트
백두산의 알칼리성 화산암층을 통과해 오랜 기간 자연 정화돤 천연 광천수의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지충 구조를 용기 디자인에 적용했다. 사각 용기임에도 부드러운 형태가 특징이다. 상단에는 백두산 천지에 담긴 물을 표현해 백두산 하늘샘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했다.
(중) 석수, 2008
클라이언트 하이트진로
라벨 디자인 크로스포인트
빙하의 이미지를 단순화한 용기 디자인.
(우) 에이수, 2009
클라이언트 한국알카리수
브랜드 개발 & BI 크로스포인트
프리미엄 미네랄 알카리수 브랜드 에이수의 용기 디자인. 심플한 형태로 디자인했다.
용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죠?
용기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이 채 안 되지요. 예전에는 대체로 똑같은 공용 용기에 라벨만 다르게 부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부터 용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용기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마케터들이었어요. 별 개성이 없는 용기 디자인에 라벨만 바꿔 달아서는 더 이상 차별성을 둘 수 없었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지금은 기업의 CEO들도 용기 디자인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용기 디자인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죠. 이런 요구가 늘어나면서 전문성을 갖춘 용기 디자인 회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는 디오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기 디자인 전문 회사에 도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코다스디자인에서 분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밤에 잠도 안 오더군요.(웃음) 아마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희 팀 내부에서조차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1년 365일 100% 용기 디자인만 전문으로 하는 곳은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일부 제품 디자인 회사에서 용기 디자인을 병행하는 경우는 있지만요.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용기 디자인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는 찾기 어려워요. 하지만 당시 코다스디자인 이유섭 대표와 저는 이런 고도 전문화가 용기 디자인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장성 측면에서도 분명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고요. 다행히 2011년 6월 분사 이후 지금까지 좋은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사실 디오리진은 다른 신생 회사들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코다스디자인 내부의 용기 디자인 팀이 별도로 분사해 나와 설립한 회사인 만큼 이미 제법 많은 노하우와 클라이언트, 포트폴리오가 확보된 상황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성과는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 롯데칠성음료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씨디스어소시에이츠
기존 아이시스 용기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줘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그립감을 개선하고 물의 흐름을 표현한 용기 구조로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중) 바리스타, 2013
클라이언트 매일유업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빅앤트 인터내셔널
기존 바리스타 브랜드를 고급화하기 위해 유리 용기를 사용했다.
(우) 블루마린, 2007
클라이언트 롯데칠성음료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롯데칠성음료 디자인팀
후면 백 라벨을 적용해 매대에 진열했을 때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했다. 모서리 부분에 구조를 적용해 용기의 내구성 문제를 해결했다.
용기 디자인 분야의 시장성을 판단한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용기의 개념을 폭넓게 바라본 것이죠. 생수 용기만 본다면 여름철이 되기 전에 모든 디자인 프로젝트가 완료됩니다. 여름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의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용기 디자인 회사로서는 비수기인 셈이죠. 하지만 계절을 타지 않는 술이나 잼, 세탁 세제, 샴푸 등 사실 용기의 영역은 무궁무진합니다. 디오리진에서는 실제로 코다스디자인과 함께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는 용기를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사업을 확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냉장고도 하나의 커다란 용기 아닌가요? 컨테이너로서의 기능을 하는 모든 제품을 용기라고 생각했고 이런 아이템들 간의 균형을 잘 맞추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용기 디자인과 일반 제품 디자인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용기 디자인은 일반 제품 디자인에 비해 소비자와의 밀착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소비자의 손에 들리는 제품이 대다수인 만큼 형태감뿐만 아니라 손에 쥐었을 때의 그립감 역시 중요합니다. 또 음료의 경우 식감도 매우 중요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호성입니다. 소비자가 생수병을 보고 향수병처럼 생겼다고 인지하면 곤란합니다. 모든 용기 디자인은 ‘소비자는 어떻게 느낄까’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기 디자이너들은 늘 소비자 관점에서 생각하고 디자인해야 하죠.
클라이언트 롯데칠성음료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아이디엔컴
‘내 몸에 흐를 류’라는 브랜드 네임에 맞게 용기 디자인 역시 유기적인 형태로 표현했다.
(중) 아임리얼, 2009
클라이언트 풀무원식품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씨디스어소시에이츠
원형에 가까운 사각 용기 디자인과 블랙 캡으로 디자인을 차별화했다. 비스듬한 라벨 디자인에 최소화한 문구로 간결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표현했다.
(우) 칠성사이다, 2013
클라이언트 롯데칠성음료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롯데칠성 디자인팀
칠성사이다는 출시 60년 만에 최초로 소용량 용기(300ml)를 내놓았다. 라벨 디자인은 기존의 느낌을 그대로 이어가고 용기는 어깨 라인과 허리 라인을 강조해 그립감을 줬다.
용기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은 무엇인가요?
모든 과정이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프로토타입 찾기’ 과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프로토타입 찾기란 소프트폼으로 목업을 만들어보는 과정을 말합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용기 디자인은 소비자와의 밀착도가 높습니다. 그만큼 디자이너가 실제 용기 디자인을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로토타입 찾기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생산 과정에 있습니다. 용기들이 생산 라인을 타고 움직여야 하는데 높이와 하단의 면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이동 중에 다 넘어지게 됩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말이죠. 용기 하단 모서리의 R값을 너무 둥글게 디자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넘어질 위험이 있죠. 실제로 유산균 요구르트 음료 퓨어의 경우 용기 하단이 좁은 편이기 때문에 생산 과정에서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 직접 만든 프로토타입을 생산 라인에 올려 이동시켜보면 안정성을 미리 점검할 수 있죠.
기술적인 노하우가 많이 필요한 분야인 것 같습니다.
용기 디자이너는 절반은 엔지니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이기도 하죠. 용기를 디자인할 때는 용량이나 소재, 유리나 페트의 무게, 용기 입구의 넓이까지 꼼꼼히 계산해야 합니다. 또 일반 생수와는 달리 주스 같은 음료수의 경우 고온 충진을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용기의 형태가 찌그러질 수도 있어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용기에 구조를 넣고 내구성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클라이언트 매일유업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빅앤트 인터내셔널
바나나의 굴곡진 느낌을 용기 디자인에 적용했다. 껍질 속에 숨겨진 하얀 바나나를 표현한 라벨 디자인도 재미있다.
(우) 백년동안, 2012
클라이언트 샘표식품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샘표식품 디자인팀
고급스러운 느낌을 반영하기 위해 절제된 형태로 디자인했다. 이중 캡은 용기의 보디 라인과 조화를 이룬다. 발효 식품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진한 갈색 병을 사용했다.
새로운 제품 용기를 디자인할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신제품과 유사한 제품군에서 가장 매출이 좋은 제품을 찾고 분석해야 합니다. 똑같은 성격의 제품은 아닐지라도 유사한 제품은 어딘가에 있기 마련이죠. 국내에 사례가 없을 경우 해외 시장을 분석하기도 합니다. 가장 먼저 매대 환경을 분석합니다. 성공한 제품이 매대의 어느 위치에 놓여 있고 또 어떤 제품들과 경쟁하는지 참고하는 것이 전략을 수립할 때 많은 도움을 주죠. 두 번째는 타깃이 되는 소비자의 성별과 연령층을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 주부들이 사용하는 제품이라면 주부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분석해서 이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죠. 이 밖에도 새롭게 만드는 용기인 만큼 제조 공정상에 문제가 없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새로운 용기를 디자인할 때와 기존 용기를 리뉴얼할 때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신제품을 출시할 때보다 기존 용기를 리뉴얼할 때가 몇 배는 더 어렵습니다. 물론 이런 제품을 리뉴얼할 때도 노하우가 있습니다. 기존 사용자들을 인터뷰해 일종의 버그 리스트(bug list)를 만드는 것이죠. 기존 용기의 불편 사항을 개선해나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다 보면 새로운 콘셉트가 도출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용기 리뉴얼에는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일단 생산 설비의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제품의 경우 아예 생산 설비 과정부터 함께 조율하지만 기존에 나와 있는 제품의 경우 현존하는 설비에 맞춰 디자인을 진행해야 합니다. 또 기존 용기를 리뉴얼할 때는 제품의 역사와 헤리티지(heritage)를 유지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의 폭을 최소화하면서도 소비자들이 용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클라이언트 CJ Lion
라벨 디자인 브랜드앤브랜더스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자 여인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움을 콘셉트로 디자인을 차별화했다. 기존 샴푸의 펌프와 차별화하기 위해 펌프 형태를 별도로 개발했다. 파손을 막기 위해 상단의 펌프 부분과 하단의 몸체 부분을 일체형으로 만든 것이 특징. 기능에 따라 용기 색상도 네 가지로 선보인다.
(우) 연두, 2010
클라이언트 샘표식품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소디움파트너스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느낌으로 주방에 놓았을 때 주부들이 친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복음자리 5℃, 2011
용기 디자인을 차별화해서 성공한 사례를 들려주세요.
사실 한 가지 제품이 성공하려면 제품의 품질과 마케팅, 그리고 용기 디자인이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용기 디자인 하나를 바꿔서 성공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용기 디자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물을 담느냐 만큼 그 내용물을 어디에 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인 사례로는 코다스디자인 시절에 디자인한 생과일 음료 브랜드 아임리얼을 들 수 있습니다. 신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제품을 일부러 생과일 판매대 옆에 비치한 전략도 주효했죠. 복음자리의 5°C잼 역시 투박했던 용기 디자인을 바꿔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인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용기 디자인의 글로벌 트렌드가 궁금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이 대세라고 봅니다. 노르웨이의 프리미엄 생수 브랜드 보스(Voss)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반적인 흐름일 뿐 용기에 담기는 내용물의 종류나 브랜드마다 선호하는 용기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럼주나 위스키 같은 술은 아직도 클래식한 용기를 선호합니다. 또 에비앙(Evian)은 용기 디자인은 크게 변화시키지 않되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으로 독특한 디자인의 용기를 선보이기도 하죠. 조니워커(Johnnie Walker)는 라벨 디자인을 유사하게 유지하되 용기의 병목이나 어깨 등에 조금씩 변화를 가미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결국 브랜드의 독특한 아이덴티티와 헤리티지를 유지하면서도 약간의 변화로 적절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벨 디자인 씨디스어소시에이츠
브랜드의 정통성과 100% 자연 재료가 갖는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단순하게 디자인한 프리미엄 냉장 잼 용기다. 세련된 용기 디자인에 라벨 또한 심플하게 표현해 프리미엄 제품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였다.
용기 디자인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디오리진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나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합니다. 사실 디오리진 직원들은 코다스디자인 시절부터 용기 디자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별도의 트레이닝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소재 박물관’이라 불리는 뉴욕의 머테리얼 커넥션(Material Connexion)이나 프랑스의 식음료 박람회 등에 보내 세계적인 흐름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합니다. 크지 않은 회사 규모를 감안했을 때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긴 하지만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바쁜 일정 가운데에서도 디자인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잠재력 있는 디자이너를 엄선해 이들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는 것 역시 디자인계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런티어 기업을 선정하는 자리나 서울디자인재단의 DMC 입주 기업 심사, 디자인경영대상이나 특허청에서 주관하는 정약용상 등에 자주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데 그때마다 가능성 있고 열정 있는 디자이너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가 올해로 디자이너가 된 지 29년이 됐는데요, 자동차 디자인에서부터 생활 가전 디자인, IT 제품 디자인, 용기 디자인까지 여러 분야를 거친 것이 신인 디자이너들의 자질을 평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반드시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또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용기 디자인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전하기도 합니다. 2011년부터 서울디자인지원센터에서 ‘소비자의 기호성을 심어주는 용기 디자인 프로세스’라는 이름의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 유한킴벌리주식회사
라벨 디자인 푸른이미지
손 세정제 시장에서 다른 제품과 차별화하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기능적인 용기로 디자인했다. 이중 용기, 상단 캡과 펌프 모양 등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다. 2011년 펜타워즈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젊은 디자이너가 참 많습니다. 긍정적인 일이죠. 하지만 처음의 열정에 비해 끈기 있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끈기 있게 꾸준히 열정을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또 디자이너들 사이의 소통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커리어와 실력을 쌓는 데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디자인을 좀처럼 오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별로 좋은 태도가 아니에요. 디자인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양한 교류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습니다. 디오리진은 비록 용기라는 하나의 분야에만 집중하는 회사지만 하나의 용기를 만들어내기까지 많은 지식과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경영학이나 인문학, 심지어 과학 서적을 통해서도 자신의 저변을 넓힐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인문학 강좌나 인문학 책을 접하면서 깊이 있는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최근에 진행한 한라수 프로젝트가 많은 화제를 낳았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만큼 의미도 컸습니다. 사실 처음 저희에게 이 일이 들어왔을 때 ‘전 세계에 판매할 프리미엄 물을 왜 해외 유명 디자이너에게 맡기지 않나’라는 수군거림도 많았습니다. 생수 용기 디자인 분야에서 그렇게 많은 실적이 있는데도 말이죠. 아직도 한국 디자인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에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네이밍과 라벨 디자인 등을 맡았던 크로스포인트 손혜원 대표가 끝까지 우리를 믿어준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죠. 디오리진에서 디자인한 용기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을 검증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CEO 피터 잭(Peter Zec)을 포함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 평가 그룹의 자문도 받았습니다. 디자인이 확정된 이후에도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디자인은 이미 지난해 6월에 나왔지만 유리병 제조업체, 캡 제조업체, 페트병 제조 업체를 돌며 일일이 직접 확인하고 감리를 봤습니다. 병을 정확히 반으로 잘라서 단면의 면적이 균일한지, 얼룩이 지진 않았는지 등을 철저하게 확인했죠.
특별히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는지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그동안 백두산 하늘샘, 디엠지(DMZ) 생수, 블루마린, 아이시스, 풀무원 샘물, 에이수, 한라수 등 수많은 국내 생수 브랜드의 용기를 디자인했습니다. 이제는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고 싶어요. 몇몇 해외 클라이언트와 협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는 에비앙이나 볼빅(Volvic) 같은 해외 프리미엄 생수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고 싶습니다. 레킷벤키저(Reckitt Benckiser) 같은 글로벌 생활용품 브랜드의 용기 디자인에도 관심이 있고요. 얼마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주선으로 레킷벤키저의 아시아 총괄 본부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한국에 용기 디자인 전문 회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반가워하더군요. 이런 만남이 앞으로 좋은 기회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지금 빠르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 시장의 문도 두드려볼 생각입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고급 용기 디자인의 경우 국내에 의뢰를 하는 경우가 제법 있는데 앞으로는 더욱 본격적으로 중국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