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인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디자이너 김상규

“디자인에는 한 나라가 지닌 여러 가지 모습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는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말대로 그의 행보에는 문화적인 신화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문화적 정체성이 굳어진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한국 디자인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디자이너 김상규
서울대 산업디자인학과, 국민대 대학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퍼시스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드록 디자인> <한국의 디자인>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등의 전시를 기획했고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 겸 사무국장을 맡았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의자의 재발견>(세미콜론, 2011), <착한디자인>(안그라픽스, 2013), <사물의 이력>(지식너머, 2014) 등이 있다.

디자인이 나라의 경제와 산업을 일으킬 자원으로 추앙받던 시대를 지나 보통명사처럼 쓰이게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 김상규는 늘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았다. 정치ㆍ경제ㆍ산업ㆍ생활 문화 전반에서 한국의 디자인 속성을 찾아내고 이를 디자이너이자 평론가, 저자, 큐레이터라는 다양한 활동으로 풀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의자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해 2000년대 초반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드록 디자인>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등 화제를 모은 전시를 기획하고, 저자이자 디자인 연구가로 정제되지 않은 한국 디자인사를 연구하는 등 디자인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끝없이 펼쳐내는 그를 만나보았다. “디자인에는 한 나라가 지닌 여러 가지 모습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는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의 말대로 그의 행보에는 문화적인 신화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문화적 정체성이 굳어진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정리: 김민정 기자, 사진: 김정한(예 스튜디오)

디자이너뿐 아니라 디자인 전시 큐레이터, 평론가, 저자,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교 때부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학부 시절에도 구체적인 분야를 정한 건 아니지만 내가 디자인한 걸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일종의 로망이 있었죠.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실무적인 디자인 외에도 디자인 전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특히 안드레아 브란치(Andrea Branzi)가 쓴 <러닝 프롬 밀란Learning from Milan> 등을 읽고 건축가이자 디자이너가 책도 쓸 수 있다는 게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한 결과물로 사용자와 만나기 때문에 그 의도나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밝힐 순 없어요.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로는 오해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죠. 반면 디자이너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직접 얘기할 수 있다면 좀 더 명쾌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커리어의 첫 시작은 퍼시스의 의자 디자이너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논문을 쓰면서 만약 내가 평생 디자인을 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좋은 아이템은 의자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디자인사나 비평을 공부해보면 제품 쪽에서 늘 예시로 드는 것,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매개체로 의자만 한 것이 없어요. 예전 모더니스트들이 선언적인 의미에서 의자를 디자인하고 멤피스(Mempis) 그룹 역시 자신들의 생각을 투사하기 위해 의자를 디자인한 것처럼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수 있는 독보적인 아이템인 거죠.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업할 때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전자회사보다는 가구 회사를 생각하게 됐고 그중에서도 의자를 디자인할 수 있는 퍼시스에 들어갔습니다.

의자 디자이너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과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서울 본사가 아니라 성남의 공장으로 출근했습니다. 당시 의자만 따로 만드는 회사가 성남에 있어서 공장 옆 개발실로 간 거죠. 저도 작업복을 입고 디자인했는데 팀장은 엔지니어였고 조형적인 완성도보다는 시장의 요건에 맞는 의자를 설계ㆍ생산하는 게 우선이었어요. 의자를 제조하는 곳이었으니 필요한 모든 재료를 다루면서 기술적인 면에서는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나름 바라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럽진 못했죠. 우울한 마음으로 성남으로 출퇴근하던 버스 안에서 <디자인정글>에 기고하던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이후 회사의 구조 조정으로 서울 본사로 출근하게 됐지만 곧 외환 위기가 왔어요. 슬림한 타이프의 회전의자 ‘피자’ 시리즈를 출시하고 더 이상 신규 개발을 하지 못했습니다. 1998년 4월까지 다니면서 4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했죠.

퍼시스를 나온 뒤에는 1999년 개관한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큐레이터가 아니라 오픈 개관전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디자인을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얘기도 하고 글도 쓰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최범 선생님을 통해 디자인미술관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게 됐죠. 당시 저는 다른 디자인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개관전과 관련해 글도 쓰고 전시도 하면서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이후 디자인미술관 자문회의에 참여하다가 계약직 직원을 한 명 더 뽑는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지원했어요. 급여나 고용 조건은 디자인 사무실보다 열악했지만 낮엔 일하느라 밤에만 해야 했던 글쓰기나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큐레이터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를 전공한 예술 기반의 전형적인 모델을 지향한 게 아니었어요. 큐레이터도 디자이너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한 거죠. 예술의전당에서 디자인미술관을 개관하기 전, 한샘에서 만든 서울디자인박물관이 있었어요.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장 정시화 교수님이 당시 초대 관장이었는데 잡지도 많이 구비해두고 필요한 책도 꼼꼼하게 챙겨져 있던게 기억납니다. 영구 소장품 목록을 비롯해 전시장 한쪽에는 디자이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레퍼런스도 잘 갖추어져 있었고요. 그때 막연하게 디자이너도 이런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말 그런 일을 하게 된 거죠.

“구체적인 계기와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태생적인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가져주지 않으니까요. 한국 디자인에 관한 전시는 언젠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1세대 디자이너에 대한 연구를 해보고 싶었어요.”

200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
특별히 이상적으로 생각한 디자인 박물관이나 큐레이터의 롤모델이 있었나요?

머릿속으로는 쿠퍼 휴잇 디자인 박물관(Cooper Hewitt, Smithsonian Design Museum)을 그리고 있었죠. 그곳의 엘런 럽튼(Ellen Lupton) 같은 큐레이터가 되고 싶었고요. 직접 가서 전시를 볼 순 없으니까 엘런 럽튼이 기획한 전시 도록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웃음).

2003년 첫 전시로 <드록 디자인No Design, No Style: Droog Design>을 기획하셨는데요,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드록 디자인>은 제일 처음 야심 차게 기획한 전시였어요. 외국 잡지에 종종 등장하는 그들의 기사를 읽고 큐레이터가 되면 꼭 이들의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멋진 디자인이 아니라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만큼 디자이너가 창작자로서 사람들과 직접 만날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2001년부터 준비해서 연락했지만 그들 입장에선 한국에서 뭔가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겠죠(웃음). 2002년에는 그들이 전시 중이던 밀라노로 직접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 해에는 암스테르담의 스튜디오로 찾아가고요. 그때는 아예 드록 디자인에 대한 연구를 완벽하게 끝내고 전시 작품 목록까지 만들어서 가져갔어요. 마침 드록 디자인이 10주년이 되던 때라 시점도 좋았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서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었죠.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디자인을 전시하고 큐레이팅하는 것은 낯선 일이었을 텐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미술관에 들어가서 처음 한 일이 해외 디자인 박물관에 대한 자료 조사였어요. 독일, 영국, 미국, 일본의 디자인 박물관에서는 어떤 전시를 했고 최근 몇 년간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했는지 모두 조사했습니다. 처음엔 문화ㆍ예술 정책의 일환으로 개관했지만 수장이 바뀌고 실무자들이 교체되면 왜 우리가 이런 전시를 해야 하고 정부가 우리한테 지원을 해줘야 하는지 그들을 설득 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매년 예산을 책정할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니까 일종의 자료집을 만든 거죠. 2005년에 열린 <모호이너지의 새로운 시각> 전시 역시 몇 번이나 기획안을 낸 끝에 진행할 수 있었어요. 담당자는 모호이너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계속 하고 싶다고 하니까 결국 통과시킨 거죠.

<신화 없는 탄생, 한국디자인 1910-1960> 전시를 비롯해 한국 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저술 등 관련 활동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구체적인 계기와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태생적인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가져주지 않으니까요. 한국 디자인에 관한 전시는 언젠가 꼭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1세대 디자이너에 대한 연구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또 디자이너들의 출신 학교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혀서 전시가 자꾸 미뤄지더라고요. 결국 이런 미묘한 이해관계를 피해 좀 더 앞 세대로 가서 1910년부터 1960년까지 일제강점기의 한국 디자인을 다루게 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2005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1980년대 이후 한국 디자인에 관한 전시 <한국의 디자인: 산업, 문화, 역사>를 기획했어요.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다가 2008년 발족한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으로도 근무했습니다.

2006년 12월에 예술의전당으로부터 계약이 만료됐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당시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됐는데 2년 이상 근무하면 무조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전까진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고 1년씩 자동으로 계약이 연장됐는데 바로 계약이 만료되었다는 공식 문서가 날아오더군요. 그런데 또 문화부 내부에서는 디자인미술관 운영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나 봐요. 예술의전당에 지원하던 예산으로 전시와 아카이빙은 물론 사업을 다각도로 확장, 진행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2008년 2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설립됐습니다. 저는 원래 재단 설립까지만 함께 할 계획이었는데 깊숙이 관여하다 보니 정책연구 팀장을 맡게 됐어요.

디자인을 연구하고 아카이빙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만큼 정책연구팀장으로서 다양한 일을 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디자인 유산을 아카이빙한 <우리를 닮은 디자인>과 디자인 백서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다들 디자인이 중요하다고는 하는데 근거 자료가 없으니까 왜 중요한지 설명을 못 하는 거예요. 그 팩트를 만들기 위해선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 기관이 필요했던 거죠. 근데 산하기관은 정책을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실행하는 곳이잖아요. 연구는 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해야 하는데 그들은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고 현황 파악만 하는 것도 바빠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도 당시 적은 예산을 가지고 단행본과 정기간행물을 비롯한 디자인책도 많이 내고 1세대 디자이너 연구도 했습니다. 작지만 디자인 영화제 같은 행사도 열고 젊은 디자이너들의 프로모션을 위해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동분서주했어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에서 <디플러스D+>라는 잡지도 창간했습니다. 어떤 콘셉트의 잡지였나요?

일종의 담론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던 것은 단순히 광고가 없는 국ㆍ영문 잡지였어요. 클라이언트가 있고 사업성을 고려해야 한다면 기존의 잡지와 다를 바 없잖아요. 민간과 공공 기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서로 확실히 다르기 때문에 공적으로 다뤄야 하는 이슈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또 외국의 독립 서점이나 디자인 미술관, 박물관에 비치할 수 있도록 한글과 영문 병기를 주장한 것이고요.

그럼에도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생명력은 매우 짧았습니다.

2008년 3월부터 2010년 2월까지 2년간 존립했으니 짧았죠. 사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준비 기간부터 짧았어요. 기관을 만들려고 한 때가 정권이 바뀔 무렵이어서 새 정부가 들어서고 관련 정책이 바뀌기 전에 얼른 체계를 갖추고 만들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역시나 정권이 바뀌면서 재단설립을 함께 했던 공무원들이 하나 둘씩 좌천되거나 실적이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새로 재단을 맡게 된 담당자는 또 저희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고요(웃음). 결국 나중에는 한국공예문화진흥원과 통합되었습니다.

근 15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디자인 정책과 방향, 이해관계가 만든 소용돌이를 모두 겪은 셈이네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을 나온 이후에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자리로 옮겼습니다. 교육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이었을 것 같은데요.

만약 재단이라든지 기관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면 전 끝까지 남았을 겁니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 민간이나 학교보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고 다른 부처의 협조를 받기도 수월하니까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거든요. 그럼 자연스레 교육 현장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테고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민간 연구와 공적 자금이 결합되는 겁니다. 혜안이 있는 공무원이 공적 자금을 마련해주고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산하기관의 팀장이나 사무국장을 맡아 대학, 디자이너, 디자인 단체들과 연계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꾸려나가는 거예요. 그럼 기업에 손 벌리거나 대학 눈치 볼 필요 없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는 것이죠.

기러기 아빠를 위하여(For Goose Daddy)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해 두루 많은 경험을 한 만큼 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나요?

특정 방향을 제시하진 않지만 연구자, 저널리스트,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한 크리에이터 등 졸업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얘기해줍니다. 특히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려는 학생들에겐 디자이너로 활동하려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는 디자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프로젝트, 스스로 클라이언트가 돼서 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다는 걸 강조합니다. 이를 연습해볼 수 있는 게 바로 직접 전시를 해보는 것인데요, 자신의 작품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경험하게 되는 거죠. 매해 한두 번씩 고학년 학생들과 함께 전시를 하는데 <엔조 마리>전에서 선보인 ‘아우토프로제타지오네 2014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틈틈이 사무용 의자 브랜드 파트라(Patra)의 제품이나 웰즈의 듀엣 의자 등을 디자인했는데, 의자 디자이너로서 더 활발하게 활동할 계획은 없나요?

제품으로 생산하는 디자인도 계속하고 싶지만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도 많으니까 저는 다른 방식의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하는 제품을 제조 회사와 계약해서 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생산하거나 어떤 소스를 제공해주는 디자인 같은 거죠. 소규모 생산을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도 있고, 설계를 해주거나 아니면 아예 생산까지 할 수 있는 작은 스튜디오를 만들어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제작 문화에 기반을 두고 지금 막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려고 합니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사물학2-제작자들의 도시>에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제작 문화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나요?

디자이너가 활동하는 영역은 대량생산, 대량 소비 체제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개념보다는 좀 더 ‘로컬’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일 수 있죠. 예전에는 기술적 제작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가능해요. 각 지역의 요구를 알고 적절한 솔루션을 경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역 디자이너로서 카운슬러, 코디네이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식당이 간판을 바꿀 경우에도 그 식당에서 밥도 먹어보고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보는 디자이너가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건축가도 글로벌하게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느 특정한 지역의 환경과 조건에 대해 잘 아는 동네 건축가도 있는 거예요. 마치 환자의 몸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주치의처럼 그 지역을 잘 아는 로컬 디자이너가 필요한 것이죠.

“저는 다른 방식의 디자인 비즈니스 모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하는 제품을 제조 회사와 계약해서 하는 디자인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생산하거나 어떤 소스를 제공해주는 디자인 같은 거죠.”

제작연대기: 1967-2014(A Chronicle of Making in Korea: 1967-2014), 2015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사물학2-제작자들의 도시>에 전시한 작품으로 기능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1967년부터 최근까지 산업 정책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기계공고 설립 등 한국 제작 문화의 특성을 연대기로 보여주었다.
<의자의 재발견> <착한디자인> <사물의 이력> 등 여러 가지 디자인 담론과 이야기를 풀어낸 책도 썼습니다. 사물을 다루고 대하는 태도에서 디자인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흥미로웠는데요.

새로운 사물이 등장하면 많은 변화가 생기는데 늘 그것을 좇아갈 것인가, 아니면 변화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것인가 잘 생각해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새로운 기술의 산물이 등장할 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기술 속도, 기술이 제시하는 솔루션이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 수도 있으니까요. 디자이너들은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또 그걸 응용해서 실질적인 이미지와 오브제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기술의 정책이나 주된 사상이 우리 삶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면 문제가 심각하잖아요. 긍정적이지 않은 그 무엇을 확산시키는 데 우리가 큰 기여를 할 수도 있으니까 디자이너는 적어도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디자인 비평가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이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한 이유는 교조주의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디자이너들한테 도덕적인 순수성 같은 걸 요구하면 힘들어집니다. 결국 어떻게 영민하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인데 이건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게 아니라 사전에 공적인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계속해서 논의해야 합니다. 비평하는 사람들, 학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슈에 대한 담론을 계속 이끌어줘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결론이 이상한 도덕주의로 귀결돼서 ‘착한 디자인’ 이랄지 ‘재능 기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 선택 방향이 있어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 취향 등에 따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메인스트림이 하나의 가치관을 제시하고 나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비평가들은 계속 그것(메인스트림)을 쪼개는 역할을 해야 해요.

디자인 비평가로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봐야 할 이슈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우선 교육에 관한 것이 있고 ‘노동으로 보는 디자인’, 즉 디자이너들의 사회적 보상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그리고 디자인 연구소의 부재를 들 수 있는데 디자인의 현재 역할과 오늘을 고민하는 국책 연구소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날 디자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교육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참 큰 사회적 낭비인 거예요 디자인에 엄청난 교육적 자원을 들이고 디자인 재단 같은 곳에서도 많은 돈을 쓰는데 정작 기관에서 키워낸 정책 연구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죠. 이렇게 되면 결국 10년 뒤에도 디자인계에선 오피니언 리더가 나올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지금 사회적으로 각 분야에 관한 어떤 이슈가 발생했다면 건축계에는 그것에 관해 물어 볼 수 있는 전문가가 있는 반면 디자인계에는 마땅한 인물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정부가 디자인 정책과 관련한 예산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 예산 중 상당 부분이 이벤트 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어떤 행사를 치르느라 정작 사람을 키워내지 않으면 10년 뒤, 20년 뒤에도 디자인 전문가는 그냥 ‘업자’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요.

듀엣 체어(Duet Chair), 2012 제작 웰즈(Wellz)) 프레임에 해당하는 입식 의자와 좌식 의자를 분리할 수 있게 만들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하게 디자인했다.
처음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할 때에 비하면 지금은 디자인 관련 전시의 형식과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습니다. 또 요즘에는 디자인 전시를 선보이는 미술관과 디자인 미술관을 표방하는 곳도 많아졌는데요.

지금은 미술관에서도 디자인 관련 전시를 하지만 장르의 다양화를 위한 것이지 잘 기획한 예술 전시처럼 전문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디자이너들 역시 아직은 미술관 진입을 자신의 경력에 발판이 될 좋은 경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고요. 이상하게 건축가든 디자이너든 미술관 전시 초대를 받으면 갑자기 예술가처럼 태도를 바꾸고 자꾸 예술가 흉내를 내려고 해요. 디자이너의 솔루션, 디자이너의 프로세스, 디자이너만의 방법론이 있으면 그걸로 밀어붙이면 되는데 거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것 같아서 아쉬워요. 만약 지난 10년간 이런 시도가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짝퉁 아트’ 같은 걸 오랜 시간 하다보니 스킬은 늘었는데 감동은 없다고 할까요. 돈은 많이 투자했는데 계속해서 맛없는 음식을 먹는 느낌이에요. 처음엔 욕을 먹을망정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고유의 것을 계속해서 실험적으로 만들었다면 지금쯤은 그럴듯한 요리가 나왔을텐데 늘 조미료를 뿌려서 대충 구색을 맞추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것이죠. 몇 해가 지나도 여전히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보는 그림 이상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정말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끝장내보지 않고 늘 타협적인 태도로 구색 맞추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교수, 큐레이터, 비평가 등 다양한 타이틀이 있습니다만, 본인을 한 가지로 규정해야 한다면 무엇일까요?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도 있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좋은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제품을 디자인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도 있고, 전시를 기획하거나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그런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는거죠. 저는 이 모든 것을 디자인 활동이라 생각하고 계속하는 겁니다. 다만 그 사람 나름의 철학이 모두에 반영돼야 하겠죠. 제가 생각하는 제 역할은 메인스트림에서 빠져 있는 부분을 계속 밝혀내는 것인데요, 그게 비평적인 태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디자인의 본질 그 자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로 디자인도 하고 기획도 하고 글도 쓰는 것이지, 다양한 일을 한다는 데 의미를 두진 않아요. 형식은 여러 가지여도 상관없지만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사람들과 오랫동안 소통하고 싶은지 지향점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기획하고 싶은 전시나 책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한국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것을 인문학이든 사회학이든 다른 분야와 어떻게 접목할지를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에 기획한 전시<맛MATT: 한국의 멋과 정>처럼 한국 디자인의 여러 가지 쟁점을 또 다른 분야와 접목해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디자인 관련 책을 쓰는 것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전공자들이 디자인에 접근할 수 있고, 또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또 다른 대중에게 전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드는 겁니다. 이 밖에도 디자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할 때 전시 기획서만 쓰고 해보지 못한 주제가 있는데 바로 여성 디자이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기라기보다는 주류와 비주류의 문제,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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