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의 최전선, 요리스 라만(Joris Laarman)
5월 10일부터 6월 17일까지 삼청동 국제갤러리 2관에서는 그의 최근작 30여 점을 전시한 <요리스 라만 랩: Gradients>전이 열린다. 첨단 기술과 수공예를 결합시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이 실험가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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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 무브먼트’, ‘디지털 제조’ 같은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 선구안을 갖고 앞장서 시대정신을 구현한 개척자들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 디자이너 요리스 라만도 그중 하나다.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 재학 시절 로코코 양식을 곁들인 라디에이터 ‘열파장 라디에이터Heatwave Radiator’로 눈길을 끈 그는 2008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열린 전시 <디자인과 유연한 정신Design and the Elastic Mind>에서 선보인 본 체어Bone Chair로 단숨에 디자인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뼈와 나무의 성장 비율을 알고리즘화해 3차원 모델링 기술로 재현한 이 의자는 당시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로도 그는 대규모 다축 금속 프린팅 기술인 MX3D 프린터를 활용한 작품 등을 선보이며 꾸준히 실험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5월 10일부터 6월 17일까지 삼청동 국제갤러리 2관에서는 그의 최근작 30여 점을 전시한 <요리스 라만 랩: Gradients>전이 열린다. 첨단 기술과 수공예를 결합시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이 실험가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요리스 라만
1979년생. 2003년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을 수석 졸업했고 2004년 과학자,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공예가 등으로 구성된 요리스 라만 랩을 설립했다. 2004년 <월페이퍼>가 주관하는 ‘올해의 젊은 디자이너 상’을 수상했고 2011년 <월 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올해의 혁신가 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등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www.jorislaarm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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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시스템을 차용한 본 체어는 1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디자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이전 세상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컴퓨터나 인터넷 기술이 신선하고 강렬하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기술, 과학, 진화 같은 주제는 늘 나를 매혹시켰다. 본 체어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것은 독일 공학자 클라우스 마테크Claus Mattheck의 이론인 최적 구조optiaml structure였다. 뼈가 생장할 때 자연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보강이 되고 반대로 필요 없는 부분은 줄어든다는 이론인데 이를 컴퓨터 알고리즘과 접목한 것이 본 체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요리스 라만 랩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파트너인 아니타 스타르Anita Star와 단둘이 랩을 열었다. 나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고 그녀는 필름 메이커로서 작업 과정을 영상에 담는다. 실험실lab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나의 작업 방식과 목적이 일반 디자인 스튜디오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랩에서는 주로 새로운 디자인 도구와 기술을 실험하고 연구한다. 미래의 기술과 디자인을 예측하는 것이 이곳의 궁극적 목표다. 요리스 라만 랩은 매우 유연한 조직이다. 한때 인원이 60명에 육박할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규모를 줄여 20여 명 정도 된다. 이렇게 유동적인 조직 체계를 갖춘 것은 실험실을 기업처럼 운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요리스 라만 랩에서는 스토리텔링의 매개로서 오브제를 제작함으로써 시대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하게 될지 가늠해본다. 단순한 의자나 테이블이 아니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인 셈이다. 디자이너는 미래에 디자인이 어떻게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는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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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드래곤 벤치’(2014). 용해된 스테인리스 스틸을 허공에 프린팅해 만들었다. 여기에 사용한 MX3D 프린터는 요리스 라만이 디자인하고 팀 고티젠Tim Geurtjens, 오토데스크 등이 공동 개발했다.
초기부터 필름 메이커(아니타 스타르)를 팀 내부에 둔 점도 흥미롭다.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한데.
랩에서 아니타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인간적인 면을 부각해주기 때문이다. 영상은 어떻게 각각의 오브제가 만들어지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의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며 실험적인 면모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우리에게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 작품들은 단지 3D 프린터의 버튼 하나를 눌러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제작 과정 자체가 기계와 사람 사이의 협업이자 커뮤니케이션이며 이를 담는 도구로, 영상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실험실은 본래 많은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요리스 라만 랩을 운영하면서 겪은 가장 인상적인 실패는 무엇이었나?
한번은 셀룰로오스 스펀지 소재로 의자를 만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물이 닿으면 팽창하는 소재의 특성을 활용해 의자를 미니어처 크기로 압축한 뒤 배송 후 물에 불리면 다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의자 크기로 커질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성공했다면 운송비나 배송에 따른 환경 문제에 대해 긍정적 해답이 제시되었겠지만, 여러 시도 끝에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직까지는 입체적으로 의자를 압축하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실패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실험 과정에서는 종종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솔직히 얼마 전 실험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웃음) 그래도 항상 안전한 길만 가서는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MX3D 프린터를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많은 기술자나 전문가들이 개발을 반대했다. 안전성까지 고려해봤을 때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는 안전 수칙을 조금씩 어겨가며 실험을 이어갔고 결국 새로운 차원의 프린터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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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보텍스 콘솔Vortex Console’(2014). 예술가이자 과학자, 프로그래머인 마크 J.스탁의 보텍스 기법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평범한 일자형 선반 디자인에 고성능 컴퓨터 알고리즘을 입력해 소용돌이치는 듯한 장식성을 가미했다. 사용자에 따라 매번 새로운 변주를 적용해 생산할 수 있다. ©안천호
직접 개발에 참여한 MX3D 프린터로 ‘드래곤 벤치’, ‘그래디언트 스크린Gradient Screen’ 등을 선보였다. 최근에는 이 기술을 활용해 암스테르담에 다리를 만드는 브리지Bridge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MX3D 프린터 개발에 앞서 로보틱 프린팅 회사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이후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허공에 직접 프린팅할 수 있는 프린터를 고안하게 됐다. 이 프린터는 프레임 안에서 형상을 만드는 기존 3D 프린터와 달리 지지대 없이도 출력이 가능하다. 3D 프린터에 로봇 팔을 접목해 좀 더 자유로운 움직임을 준 것이다.
요리스 라만의 디자인이 주목받는 것은 단지 첨단 기술을 활용해서만은 아니다. 전통적인 수공예를 곁들이는 점이 당신의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단순히 첨단 기술을 활용해 손쉽게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은 내게 전혀 의미가 없다. 공예를 결합한 것은 곧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만들고자 하는 정신과 맞닿아 있다. 새로운 기술과 공예를 융합할 때 비로소 ‘공예는 구식’이라는 편견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공예가 21세기에 걸맞은 예술 형태로 승화하는 것이다. 알고리즘 기술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대 알고리즘 기술을 적용하면 1초 만에 45분짜리 곡 하나가 탄생한다(그는 인터뷰 현장에서 알고리즘 기반으로 만든 음악을 한 곡 들려주었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연주자가 없다면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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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메이커 체어’(2014). 수학 공식을 적용해 기하학 패턴을 설계하는 파라메트릭parametric 기술을 적용했다. 호두나무나 그물망 패턴을 작은 단위로 구성한 뒤 마치 퍼즐처럼 각 부위를 끼워 맞춰 완성하도록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메이커 무브먼트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일고 있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무척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산업 시대에는 제품의 제조가 지엽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등 제조업 밀집 지역에서 물건을 생산한 뒤 유통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단계가 생략되었다. 메이커 무브먼트를 통해 제작의 영역이 넓어졌고 원 창작물에 새로운 요소를 덧입히거나 변형하는 일 또한 용이해졌다. 메이커 체어스Maker Chairs가 좋은 예다. 나는 이 디자인의 도면을 웹상에 올려놓아 누구나 쉽게 다운받아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전 세계적으로 3D 프린터 보유자가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기술이 확산될수록 변화의 진폭 또한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메이커 무브먼트와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의 핵심은 창작자가 권력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데 있다.
튜링 테이블은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인 것으로 안다. 이 작품에 대해 소개해달라.
앨런 튜링은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로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이다. 비록 그의 삶은 비극이었지만 말이다. 특히나 정통성에서 비켜난 그의 방식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의 튜링 패턴은 우주 어디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수학적 요소를 담고 있는데 이를 작품에 적용해보았다.
시대 변화에 따라 디자인, 그리고 디자이너의 개념도 변한다고 느껴진다.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디자이너는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나?
건축, 디자인, 시, 요리 등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형식에는 작가와 장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를 장인과 함께 일하는 작가라고 여긴다. 이상적인 디자이너라… 글쎄, 내 생각에는 ‘이상적인 디자이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난관은 각각 독창적인 접근 방식으로만 해결할 수 있고 여기에 보편적인 합의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런 지루한 보편성이 없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