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유산에 주입한 21세기형 오피스 DNA SK서린빌딩 리모델링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로 1999년 준공한 SK서린빌딩은 한국 오피스 빌딩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대표작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종성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요람에서 출발한 모더니즘 건축은 그렇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서울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20세기의 유산에 주입한 21세기형 오피스 DNA SK서린빌딩 리모델링
SK서린빌딩 20층과 21층 2개 층의 공용 공간을 연결해주는 계단식 홀. 미디어 파사드로 둘러싸인 개방형 서재다. 이는 층간 소통과 교류를 유도하는 한편 기존 사무 공간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층고를 확보하는 기능도 한다.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로 1999년 준공한 SK서린빌딩은 한국 오피스 빌딩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대표작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종성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기도 하다. 바우하우스의 요람에서 출발한 모더니즘 건축은 그렇게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서울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은 그저 과거의 유산으로 머물기를 거부한 모양이다. SK그룹은 2018년부터 서린빌딩을 베이스캠프 삼아 새로운 오피스 실험을 벌이고 있다. 다양한 계열사를 거느리는 그룹사가 이 같은 모험을 단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작고 가벼운 조직이야 유연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리스크 역시 크지 않지만, SK그룹과 같이 몸집 큰 조직의 모험은 수많은 근로자들의 작업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실험은 그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국내 기업들의 DNA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2016년부터 일하는 방식의 혁신에 대한 그룹 차원의 논의가 이뤄졌다. 매일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사람들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SK가 내린 판단이었다.” 이번 리모델링 프로젝트의 주요 멤버 중 한 명인 SK SUPEX 추구협의회 Infra-TF 정형진 PL의 말이다. 이런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선택한 SK그룹의 묘안은 공유 좌석제였다. 개인의 이동성을 높이고 부서를 넘어 그룹 내 다양한 계열사 사람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세렌디피티적 만남을 유도하겠다는 것. 직원들은 사내 앱인 ‘온 스페이스’에 접속해 그날 자신이 일할 자리를 예약한다. 개인 물품은 별도로 마련한 사물함에 넣어둔다. 물론 관성적으로 행해지던 업무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거대 조직 생활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일종의 완충 장치였다. 따라서 SK그룹은 SK SUPEX 추구협의회를 비롯해 SK이노베이션 계열, SK홀딩스, SK E&S 등 9개 계열사의 실무진을 모아 서린빌딩 입주사 워킹 그룹을 결성하고 일하는 방식부터 공간 시공, IT 업무 설계 등을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변화시켜나갔다. 단순히 톱다운 방식의 지침을 내린 것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를 구축해 프로세스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어나간 것이다. 완충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서 흥미로운 점이 또 하나 있다.

이번 리모델링 프로젝트는 3분의 1씩 나누어 진행됐는데 이 기간 동안 인근 빌딩 4개 층을 임차해 일부 직원들이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단지 임시 거처 정도로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SK그룹은 이곳을 일종의 테스트 베드로 삼았다. 실제에 준하는 사무 환경을 조성하고 구성원들이 일하면서 새로운 업무 방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업무를 보면서 발생하는 여러 부차적 문제를 모니터링해 서린빌딩 공간에 적용하는 순기능 구조를 만들었다. SKM 아키텍츠 민성진 대표소장은 SK그룹이 가진 이상과 개념에 물성을 입혀주었다. SKM 아키텍츠는 총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개의 지하 직원 식당과 20~22층에 있는 회의실, 라이브러리, 카페, 파티 룸, 운동실 등 공용 공간을 설계했다. 또한 34~36층의 계단식 홀과 이벤트 홀 등을 디자인했는데 이들이 중점을 둔 키워드 역시 공유와 다양성이었다. SKM 아키텍츠 민성진 대표소장은 “현대사회에서 공유라는 개념이 다양한 분야와 접목되고 있다. SK 서린사옥 내의 공유 공간은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섞이며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기능과 용도가 다른 각 층별로 다른 소재와 컬러 톤을 부여해 비언어적 방식으로 공간의 성격을 반영하기도 했다. 물론 SK그룹의 실험이 아직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핫 데스킹의 숨겨진 지옥’이라는 칼럼에서 밝혔듯이 공유 좌석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기업들이 뒷짐을 진 채로 외쳤던 혁신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캐치프레이즈로 남았는지 상기해보라. 그런 점에서 SK그룹의 이번 실험은 분명 ‘진짜 혁신’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Healing & Thinking’을 콘셉트로 디자인한 20층 공용 공간. 도서관과 같은 서재 공간, 전통 한옥을 모티프로 한 미팅 룸, 물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라운지 등을 마련했다.

“SK그룹의 실험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정형진 SK이노베이션 PL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사가 이 같은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SK그룹의 가장 큰 목표는 일하는 방식의 혁신이었다. 그런데 칸막이 공간에서 혼자 일하고 늘 같은 사람들과 형식적인 회의, 미팅만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목적은 조직 간에 발생하는 사일로 현상을 없애고 새로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었다. 리모델링은 그 혁신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일종의 물리적 장치였다.

하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개인 공간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공유 좌석제를 도입해도 한자리에 반복적으로 예약을 걸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

처음에는 부정적 의견도 있었지만 구성원들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같은 자리만 고수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한자리에 며칠 이상 예약할 수 없도록 룰을 만들었다. 더 나아가 근무 층 역시 주기적으로 바꿔야 하도록 원칙을 만들었다. 대신 다양한 형태의 업무 공간을 조성해 선택의 폭을 넓혔는데 이러한 다양성이 개인이 느끼는 불편함을 상당 부분 상쇄하고 있다.

바뀐 체계와 물리적 환경으로부터 생겨난 업무의 변화도 있나?

예전보다 업무를 지시하는 방식이 체계화되었다. 모든 팀원이 한자리에 모여 일하는 것이 얼핏 더 효율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팀장이 눈에 띄는 팀원에게 그때그때 업무를 지시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조금 더 명료하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업무 외의 부분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동하면서 업무를 봐야 한다는 특성상 구성원들이 개인 짐을 줄여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전에 책상 크기와 비례하던 보이지 않는 위계 의식도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향하는 회사 입장에서 매우 긍정적인 결과다. 벽을 없애고 이동성을 높이며 수평적인 소통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HR 조직 등도 이러한 기조에 맞춰 변화하게 될 것이다. SK그룹의 실험은 (완성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물리적 변화만으로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물론이다. 공간의 구성은 환경을 마련해주는 차원이라고 봐야 하다. 우리는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파티, 강좌, 소규모 클래스 등 크고 작은 만남의 시간을 기획해 제공하는 것인데 위워크의 커뮤니티 매니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사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서 이종 간의 협업 활성화까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기 조직의 성과나 개인의 KPI가 달려 있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작동되기는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경험과 시간이 축적되면서 차츰 우리가 바라는 혁신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성진
SKM 건축사사무소 대표
“오피스는 그 자체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호스피탤리티가 되어야 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을 넘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커뮤니티와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콘셉트를 실제 구조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인터뷰와 설문 조사, 미팅을 거쳤고 SK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모바일 기기와 클라우드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공간에서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사람들의 능률을 향상시키고 긍정적인 동기를 일으키는 동시에 멋지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공간에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증폭시켰다. 오늘날 커피 전문점이나 공유 오피스 등을 찾아가서 일하는 사회적 현상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SK그룹 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더 나아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건축가로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도 많은 신경을 썼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기존 사무 공간에서 느낄 수 없는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품위와 격을 갖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20~22층은 층별로 각각 ‘Thinking & Healing’, ‘Fun & Joy’, ‘Active & Healthy’를 콘셉트로 분위기에 맞는 공간과 디테일을 디자인했다. 짙은 우드 마감재와 어두운 조명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거나 따뜻한 우드 컬러와 다이내믹한 곡면 벽으로 편안함과 역동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도 타공 메탈 루버, 컨테이너 오브제, 노출 콘크리트 페인트, 테라조 바닥 마감, LED 조명 등을 각 공간의 특색에 맞게 외장재와 내장재로 조화롭게 사용해 도시의 일부가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실내의 답답함과 한계를 도시의 스케일과 재료, 디테일, 다양한 공간감을 적용시키면서 극복했다. 각 공간의 대비와 조화 그리고 리듬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21층의 컨테이너 룸은 의도적으로 숲속 느낌이 나는 회의실과 우드 톤 가구가 배치된 복도를 지나야 진입할 수 있도록 구성했는데 따뜻한 느낌의 나무와 차가운 철의 상반된 물성이 긴장감과 조화가 동시에 느껴지도록 한다.

21층 카페. 직원 편의 시설에 많은 공을 들였다.
SKM 아키텍츠가 생각하는 최고의 오피스 디자인이란?

오늘날 거의 모든 분야에서 틀을 깨는 창의력, 협업, 진취성, 효율성, 공유성, 모빌리티 등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근무 시간이 줄어들면서 기업들은 구성원들의 업무 효율성과 집중력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통은 효율성을 높이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재정립해 소통이 원활하게 하고 복잡한 프로세스를 간소화함으로써 중복되는 업무를 줄이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융합해 새롭게 일하는 방식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의 오피스 디자인에 대한 콘셉트도 변화하는 사회를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하면 얻을 수 있다. 집중력을 높이는 독립적인 공간부터 다양한 구성원들이 협업하는 공용 공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식 공간 그리고 이 모든 영역 사이의 중간 지대와 같은 공간을 적절히 배치해 소통과 화합을 유도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오피스는 그 자체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호스피탤리티가 될 수 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00호(2020.02)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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