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를 손에 든 총체적인 경험 디자이너, 이진준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기술과 학문으로 세상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하는 창의 집단을 만들고 싶다.

데이터를 손에 든 총체적인 경험 디자이너, 이진준

이진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미디어 아티스트, 디지털 조각가 등 다양하지만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포괄적 경험이다. 방송국 PD를 돌연 그만두고 조각가로 전향했고,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다가 다시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미술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티븐 호킹, 카를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등이 소속되어 있는 영국 왕립예술학회에 한국인 최초로 종신 석학 회원으로 임명된 그는 현재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1900년대의 무성영화에 소리를 입히는 실험을 하고 있다.

현재 카이스트KAIST 초대 미술관 관장이자 TX 랩을 이끌고 있다. TX라는 개념이 다소 생소하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총체적 경험(total exprience) 디자인을 연구하는 곳이다. UX가 나와 컴퓨터의 관계라면 TX는 나와 전체의 관계다. 존 듀이John Dewey라는 교육학자가 말한 ‘하나의 경험(one experience)’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정원에 산책하러 간다고 나무 밑의 벌레, 작은 꽃의 줄기,풀과 나무 등을 하나하나 다 보고 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정원을 거닐다 오는 것, 이 자체가 총체적 경험이다. 이처럼 어떤 공간에서의 경험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 지각하지 못한 것 모두가 아우러져 형성된다. 그 공간이 자동차 안이건 메타버스건 간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총체적 경험을 설계하는 질서를 연구한다.

Empty Garden〉이라는 작품으로 블룸버그의 뉴컨템포러리즈 2021 작가에 선정됐다. 어떤 작품인가?

구상도에서 영감을 받은 영상 작품이다. 시체가 썩어가는 아홉 단계를 그린 그림으로, 마침내는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나타냈다. 불교 승려들이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체 옆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팬데믹 시대상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됐다. 어떤 곳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시체가 나뒹굴기도 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명의 시작과 죽음을 2분짜리 영상에 담았는데, 마지막에는 텅 빈 화면이 된다. 2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덧없음도 함께 표현했다.

서구 중심 AI의 윤리적 문제를 꼬집은 Satue Garden도 흥미롭다.

아세안 8개국의 국제 교류전에서 선보인 메타버스 전시다. 현재 AI 연구와 관련해 윤리적인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백인 남성 연구자 중심으로 개발된 AI가 특정 성별과 인종에 따라 편향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시아인,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인은 이런 논의에서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동남아시아에 설치된 후기 식민주의와 관련한 공공 조각을 보고 AI가 어떻게 인식하는지 메타버스에 모아봤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돼지 조각상이 생명과 부를 상징하는데, 이를 정보를 읽을 줄 아는 AI에 인식시켜보면 그저 ‘돼지’일 뿐이다. 서양의 조각상을 인식시켰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역사적 맥락도,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배경음악에도 AI 기능이 깔려 있는데, 메타버스 전시 이곳저곳에 심어놓은 동남아시아 풍경을 인식하면 그에 어울리는 동남아시아의 전통 악기를 찾아 소리를 들려준다. 시각적으로 AI의 한계를 드러내고, 청각적으로 AI가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대치해 보여줬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Audible Garden’이라는 프로젝트인데 쉽게 말하면 식물의 반응을 시각화하는 작업이다. 식물은 동물보다 훨씬 많은 생존 전략을 가지고 있다. 포자를 터트리기도 하고, 화학 작용을 하기도 한다. 숲에서 나무 하나를 베면 그 숲 전체에 들리지 않는 경보가 발동된다. 식물이 움직이지 않고, 이들의 언어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식물에 지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공간에서 만나는 식물이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로 들을 수 있다면, 앞으로 인간의 경험은 또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상호작용하는 공간에 대한 연구의 하나이다.

앞서 말한 작품의 제목에 모두 정원(garden)’이 사용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정원은 인공의 공간도, 자연의 공간도 아닌 완벽한 경계 공간이다. 계단이나 공항, 창문처럼 이곳도 저곳도 아닌 경계 공간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중첩되는 현재 시대와도 맞닿아 있다. 이러한 시기에는 미래학자와도 같은 예술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카이스트 초대 미술관 관장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기술과 학문으로 세상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하는 창의 집단을 만들고 싶다. 한국에 세계적인 미디어 아트센터와 함께 아시아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커다란 디자인 컨설팅 그룹을 구축하고 싶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