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셉트 공간 디자이너 전시형

강남역 디스코텍의 시초였던 ‘월드 팝스’, 공간에 과감히 커다란 기둥을 들여놓은 청담동 레스토랑 ‘궁’ 등 발표할 때마다 세간의 관심을 끈 핫 플레이스를 30년 가까이 꾸준히 디자인해온 전시형. 그가 손댄 공간마다 족족 성공한 이유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자리를 그저 그럴싸하게 디자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공간에 힘 있는 콘셉트를 부여해서다.

콘셉트 공간 디자이너 전시형

1984년 이태원에 들어선 클럽 ‘도시선언’은 일본 디자이너의 디자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앞선 디자인이었다. 강남역 디스코텍의 시초였던 ‘월드 팝스’, 공간에 과감히 커다란 기둥을 들여놓은 청담동 레스토랑 ‘궁’ 등 발표할 때마다 세간의 관심을 끈 핫 플레이스를 30년 가까이 꾸준히 디자인해온 전시형. 그가 손댄 공간마다 족족 성공한 이유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자리를 그저 그럴싸하게 디자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공간에 힘 있는 콘셉트를 부여해서다. 콘셉트를 바탕으로 언제나 진보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그를 만났다.

순수예술을 전공했는데, 어떤 계기로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요?

그림이 없는 내 인생을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신문을 혼자 만들고 사생대회에서 상을 휩쓸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꽤 유명했습니다. 어머니와 절친한 분이 노천명 시인이었는데, 어린 시절 노천명 시집의 표지는 전부 내가 만들었어요. 응당 내 미술 감각은 최고구나 하고 살았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99.99%이고, 노력은 0.01%인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71년 형 소개로 연대 앞의 청바지 가게 ‘풀잎’을 디자인했는데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로고도 디자인하고 판매 방침까지 알려드렸죠. 요즘 말하는 토털 디자인 관점에서 접근했습니다. 각종 축하 카드를 만들어 판 돈으로 생활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상업 행위에 대해 어렴풋이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만 그리다 직접 디자인한 가게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공간뿐만 아니라 간판까지 직접 그린 매장이 많았습니다. 이름을 지어준 적도 허다하고요. 그림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묘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장을 좋아하는 특정의 사람들, 즉 타깃이 보이더군요. 이런 사람들이 이런 가게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알았죠.

전문적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운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실무를 배워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집이 창덕궁 앞이었는데, 내가 19살 되던 해에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공간 사옥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며 얼핏 보니 지하를 파서 구조를 올리는데 이상하게 설레었어요. 공간 사옥이 조금씩 모양을 갖춰갈수록 내 안에 경쟁심이 생겼습니다. 할머니한테 우리 집 뒤채를 달라고 떼써서 동네 인부 아저씨를 모아 지하를 파서 4층짜리 건물을 지었습니다. 건축 행위라는 것이 직접 손에 닿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줄 알았거든요. 설계만으로 가치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거죠.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작한 초반에 숙대 앞에 카페를 만들 때는 직접 땅을 파고, 시멘트를 붓고, 방수 마감 하고, 나무로 소파 만들고, 스펀지로 의자 만들고, 간판에 글자 올려 붙이는 등 A부터 Z까지 전부 내 손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직접 손을 더럽히며 작업한 경험이 재료의 최종 표면을 상상하는 데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한국에 인테리어란 개념이 없던 1970년대부터 인테리어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대표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작업은 무엇이었나요?

1984년 이태원에 ‘도시선언’이란 나이트클럽을 디자인했습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를 테마로 해서 검은 벽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천장에 모니터를 30대 정도 달아놨죠. 당시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지인을 잔뜩 끌고 와 “이거 일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가게다”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앞서간 디자인이었습니다. ‘도시선언’이 준 파장이 워낙 컸어요. 내 별명인 ‘개’, 당시 같이 화실을 다니던 친구들의 별명 ‘오리’, ‘망둥이’를 조합해 ‘개오망’이란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개오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의지가 있는 젊은이 셋이 모여 개오망이란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건 1984년 압구정의 카페 ‘네오’부터입니다. 내 나이 28살 때 일입니다. 공간과 마케팅을 결합한 디자인을 보여줬던 개오망은 손대는 프로젝트마다 성공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대기업 오너들과 연결돼 초반부터 자리를 잘 잡았어요. 소위 일류 클라이언트들이 개오망으로 몰렸습니다. 우리가 잘했다기보다 좋은 클라이언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개오망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 ‘미안하지만 클라이언트에게 돈을 못 받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더니 협력 업체들이 오히려 우리를 도와줘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개오망은 클라이언트, 협력 업체, 하다못해 바닥에 시멘트 바르는 인부까지 우리 아저씨, 우리 형이 되면서 관계가 아주 끈끈했습니다. 하나의 커뮤니티 같았어요.

1994년 개오망에서 독립해 전디자인을 설립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개오망이 연 매출 70억 원 규모로 커지면서 내부적으로 감당이 안 됐습니다. 외국의 디자인 전문 회사는 경영과 디자인을 확실히 구분해 각자의 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니 지속적인 성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나 스스로 경영이냐 디자인이냐 하는 갈등 속에서 여러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잘 다져놓은 회사를 대체 왜 나오느냐며 주변에서 극구 말렸지만 독립해서 나의 디자인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전디자인은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로는 드물게 70여 명의 직원을 거느렸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와 대형 인테리어 사무소 그 중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행기를 통째로 빌려 전디자인 직원 세미나를 사이판으로 갔을 정도로 잘나가는 회사였죠. 당시 루이비통 압구정 본점을 제외한 모든 국내 루이비통 매장을 전디자인이 맡아 시공까지 했습니다. 개오망에서 독립해 전디자인을 처음 시작할 때 8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차렸는데, 반 년 후 그 층 전체를 다 사용할 정도로 초고속으로 성장했습니다. 디자이너 2명이 8평을 사용하다 다음 주에 4명, 그다음 주에 6명, 이런 식으로 인원이 계속 불어나니 옆방, 옆방을 하나씩 더 임대한 거죠. 첫해 매출이 100억 원가량이었습니다. 대형 프로젝트가 몰려들어 자연스레 회사 규모가 커졌어요.

현재 업계에 전디자인 출신의 젊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굉장히 많은 걸로 압니다.

대형 인테리어 설계 사무소에서 독립한 젊은 디자이너 중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면을 그리거나 시공을 담당하는 회사를 차리는 일밖에 못 하니까요. 내 밑에 있던 직원들은 직접 클라이언트를 만나 일을 따오는 영업까지 합니다. 돈 받은 다음에 디자인 AS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디자인은 수주부터 수금까지 해내지 못하면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육을 워낙 강하게 시켜서 그런지 전디자인 출신 디자이너는 독립하자마자 모두 잘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전디자인도 IMF 때 어려움을 겪었지요?

1997년에 전디자인이 부산의 미화당 백화점이라는 아주 오래된 백화점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백화점을 하나 디자인하려면 중간에 여러 회사가 끼어드는데, 전디자인은 단일 디자인 전문 회사가 백화점 전체 디자인뿐만 아니라 유통과 브랜드 관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픈 바로 전날 IMF가 터졌고 클라이언트가 부도났습니다. 받은 건 어음뿐인데 말이죠. 몇 달 버티다가 부모님, 형, 동생 등 가족이 모두 힘들어졌습니다. 버틴다는 게 어떤 의미냐 하면 이달 5억 원 어음을 막기 위해 “어머니 집 좀 팔아요”, 그다음 날 3억 원 어음을 막으려고 “친구야 3억 좀 빌려주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결국 사채까지 끌어다 썼지요. 그냥 바로 끝냈으면 됐는데…. 그게 전디자인의 마지막이었습니다. IMF 당시 일을 크게 벌인 회사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회사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부도가 났다고 보나요?

나는 디자인 전문 회사의 부도는 건설 문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규모가 작더라도 일을 의뢰한 사람이 디자인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부도가 납니다. 인테리어를 맡긴 고객이 이것저것 알아본 뒤 중간에 마음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요. 공사가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인데도 마음에 안 든다며 돈을 못 주겠다는 클라이언트도 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본인이 맡긴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고,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문화가 생겨야 합니다.

IMF 이후에 재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워낙 큰 액수가 부도났으니 당연히 힘들었죠. 받은 어음은 종잇장이 되고, 일한 사람들한테 돈은 주어야 하고,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으로 갔어요.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도미했다가 곧 돌아왔습니다. 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당시 직원들 업무의 95%가 “대표님 지금 안 계십니다”라고 응대하는 거였습니다. 1998년부터 전어소시에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개오망, 전디자인 시절을 거치며 디자이너로서 일을 참 잘해왔다고 자부하는데 이후 전어소시에이트 시기에는 내로라하는 프로젝트를 별로 못 한 것 같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재기하기 위해 온갖 작업을 다 해왔지만 객관적으로 나를 평가할 때 훨씬 더 가치 있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총력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재기를 위해 지난 10여 년을 달려왔어요.

전어소시에이트는 전디자인과 달리 회사 규모가 많이 줄었습니다.

IMF 터지기 몇 달 전 전디자인을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40여 곳을 방문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등을 만나 “나는 이탈리아에 있는 너희가 부럽다. 전디자인도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인상적인 대답을 해준 사람이 바로 안드레아 브란치(Andrea Branzi)였습니다. “내 친구 중에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가 있다. 나는 일흔이 넘어서야 이소자키가 이야기한 ‘동양’에 대해 알았지만, 너는 이미 동양에서 태어난 동양 사람이지 않느냐”라고 하더군요. 그때 느낀 게 많았습니다. 전 세계 유명 디자인 회사들이 모두 어소시에이트 앞에 본인 이름을 붙여 회사가 아닌 스튜디오 개념으로 일을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마인, 시스템을 비롯한 한섬의 모든 패션 매장, 노승은 패션 숍 등 패션 매장을 유독 많이 작업했습니다. 트렌드의 최첨단인 패션 관련 일을 하려면 패션 못지않게 트렌드에 민감해야 할 것 같은데요, 트렌드를 읽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나요?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는 중에 에어컨을 꺼놓고 문을 닫아놓으니 습도가 높아지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짜증 나기 시작했어요. 이럴 때 내가 일어나 문을 확 열면 모두 좋아할 겁니다.(그는 웃으며 실제로 문을 열고 왔다.) 나는 이게 트렌드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건 너무 뻔합니다. 지난겨울 마인 매장 리뉴얼을 진행했는데 갑자기 웬 복고냐, 너무 야하다, 너무 클래식하다 등등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봄 모든 외국 패션 브랜드 매장 디자인이 마인 매장과 유사합니다. 내가 패션 관련 일을 한지 벌써 25년이 넘었는데, 이 속에 쭉 있으면 자연스레 트렌드가 보여요.

상업 공간을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상업 공간에서는 예측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번에 무엇을 할까가 중요하지 이걸 얼마큼 잘 만들까는 두 번째입니다. 강남역 근처에 커피숍을 열 계획이라면 카페베네가 아니라 공장 같은 공간에 커피 원두 한 알 한 알을 귀하게 여겨 판매하는 커피 매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접근 방식이 중요합니다.

트렌드에 민감하지만 그래도 변치 않는 전시형표 디자인 스타일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전시형표 디자인은 장식이 없고, 소재가 단순합니다. 내가 만든 공간에 가면 무언가 굉장히 많은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남산에 있는 바 ‘나오스노바’는 한쪽은 유리고, 한쪽은 하얀 벽이고, 바닥에는 조명등이 들어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힘이 강한 공간이죠. 단순하니까. 디테일이 없어 가끔 욕도 먹어요. 나는 이 테이블이 어떻게 생겼든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일본의 한 디자이너를 만나 인테리어가 독특한 매장을 둘러보며 혹시 바닥이 갈라지지 않았나 벽이 들뜨지 않았나 고개 숙여 이것저것 살펴봤더니 ‘디자이너는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고 말하더군요. 자존심에 대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디테일이 아니라 콘셉트를 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공간이 잘 디자인됐는지 전체를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장식 없이 단순한 소재로 디자인하는 건 미니멀한 공간이나 한국적인 공간에도 자주 드러나는 특징입니다. 전시형 스타일은 이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내가 보여주는 디자인은 미니멀리즘이 아닙니다. 노승은 파리 매장은 페인트칠조차 안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안을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기둥들로 꽉 채웠습니다. 남성 성기가 여성 패션 매장을 감싸는 설치 미술 같은 작업이었죠. 누군가 이런 이슈를 생각해주고 질문해야 할 텐데 대다수가 ‘기둥 멋있다’에서 끝나고 맙니다. 언젠가는 구두 브랜드 무크 매장을 디자인하는데 하얀 타일로 전체를 마감한 적이 있어요. 무크에서 생산하는 구두는 모두 검은색이라 광택이 도는 하얀 타일 위에 놓아야만 구두 형태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디자이너라면 단순히 ‘멋있다’고만 할 게 아니라 그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내가 디자인한 공간에는 개념, 즉 콘셉트가 있어요. 유명한 시를 읽으며 ‘글꼴이 멋지다’는 감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시에서 시인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중요하죠. 적어도 나는 그 메시지를 표현하려 합니다.

인테리어 공간은 몇 년을 주기로 개·보수 공사를 하기 때문에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지역적 한계 때문에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이런 것에서 오는 인테리어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내가 디자인한 공간은 꽤 오래가는 편입니다. 그래도 가슴 아플 때가 있죠. 어느 날 청담동을 지나가다 ‘궁’ 철거 현장을 보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게 굴러다니더군요. 박재형 작가와 협업해 ‘궁’에 설치한 대형 기둥을 톱으로 다 잘라버렸습니다. 기둥 하나에 1억 원을 붙여도 팔릴 작품이었는데. 슬펐어요. 이전 공간에 대한 예우가 없을 때 아쉽죠.

반대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자부심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전디자인 시절, 한 직원이 세어보니 1997년에만 10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더군요. 예를 들어 체인점 패션 매장을 하나 디자인하면 전국 매장 50개가 동시에 생기니까요. 위대한 예술가의 작업을 보기 위해 미술관에 가는 관객보다 더 많은 사람이 물건을 사기 위해 매장으로 발걸음합니다. 물론 옷을 충동구매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대중에게 트렌드를 보여주고, 사고 싶은 옷을 즐기면서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기간이 짧더라도요.

인테리어는 휴대전화처럼 유행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는 상품이 아닙니다. 고비용을 지불하고 가게를 차리는 고객들에게 책임감도 많이 느낄 것 같습니다.

내가 디자인한 가게는 모두 잘돼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가게 하나 내려고 하시는 분들 대다수가 퇴직금을 갖고 옵니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의무감이 클 수밖에 없지요. ‘좋은 디자인을 보여주는 것보다 고객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제품 디자이너는 컵을 하나 디자인해도 상품 프로모션 외에 폐기 후 재활용 방법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인테리어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게 네이밍부터 유니폼까지, 음식 메뉴부터 접시까지 건드렸습니다. 무사히 완공만 하는 게 아니라 영업 방식을 제안하고 AS까지 해주는 게 디자이너의 업무라고 여겼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커머셜 디자인이란 클라이언트에게 돈을 받는 용역 행위입니다. 클라이언트의 비용으로 내가 대신 한을 푸는 일이 아니에요.

공간 네이밍부터 마케팅까지 관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디자인이 1990년대에 패션 브랜드 매장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규모 1위부터 40위까지의 패션 매장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했으니까요. 근데 매장을 디자인하고 나면 항상 문제가 생겼습니다. 디자인 영역의 전문성을 인식하던 시기라 BI와 SI를 구분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는 브랜드와 매장, 두 가지 아이덴티티를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패션 브랜드 카탈로그나 CF 광고 제작을 한 적이 많습니다. 내가 네이밍을 등록하는 게 취미이기도 하고요. 내가 등록한 이름 중에 ‘리츠’, ‘눈’, ‘숨’, ‘비닐’, ‘플라스틱’ 등이 있습니다. 지금도 1년에 30개씩 등록합니다.

인테리어에서 마케팅을 강조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나요?

고객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 내부를 감추자는 발상에서 출발해 입구 디자인이 나오면 괜찮지만, 눈에 띄게 하려고 입구를 빨간색으로 칠하자고 하면 안 됩니다. 상업 마케팅에서 출발한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옷의 라인보다 옷을 입은 사람이 관능적으로 보이게 할 것이냐, 이지적으로 보이게 할 것이냐를 먼저 따져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점을 계속 강조하다 보니 마케팅이 가장 순수한 예술처럼 느껴져요. 은행에서 돈을 가장 잘 보호하는, 목적에 충실한 금고가 바로 순수예술인 것 같아요.

디자이너와 대중 사이의 감각의 차이가 유럽이나 일본 같은디자인 선진국보다 한국이 더 크다고 생각하나요?

전체적으로 참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늦은 여름 할머니가 빨간 고추를 볕 좋은 곳에 쫙 펼쳐놓고 잘 말려 고추장을 담그면 그다음 해에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흉내 내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빨간 색소를 넣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외국어를 제대로 쓰기 위해 최소 3세대를 거쳐야 하는 것처럼 디자인도, 상업도 그런 겁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직원에게 고객을 대하는 방법까지 교육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클라이언트를 끌어들이는 대표님만의 노하우가 있나요?

나는 클라이언트를 오래된 친구처럼 대해요. 미국의 어느 건축가가 “나는 6개월 이상 친구로 지내지 않은 사람의 집은 설계하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알아야 설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TV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의 집을 단 며칠 만에 확 바꿔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호흡을 맞춰야죠.

대표님의 인상이 도시적입니다. 인상 덕분에 디자이너로서 득 본 경우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IMF 때 고생한 이야기 했잖아요? 인터뷰에서는 굉장히 짧게 압축해 말했지만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내가 여태껏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 같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고생이 없었으면 합니다.(웃음)

대표님이 활동하던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순수예술을 접을 때 교수님께 ‘더 이상 그림을 못 그리겠다’고 말했더니 내게 이탈리아로 가서 동 다루는 법을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분 이야기는 왜 모두 조각가가 되려 하느냐, 로댕이 있다면 로댕의 조각을 만들기 위해 거푸집을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디자인업계의 저변이 많이 확대되면 좋겠습니다. 또한 디자이너가 단순히 클라이언트의 의뢰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설득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뒤 계속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우선 안식월이라도 갖고 싶습니다. 한 달만이라도 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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