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윤승림의 A to Z: ‘해야’부터 ‘아마겟돈’까지 뮤직비디오 제작 방식과 세계관
윤승림 영상 프로덕션 리전드필름 대표·헤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이브의 ‘해야’ 뮤직비디오 티저는 왜 가로로 길며, XG의 ‘TGIF’ 뮤직비디오 속 등장하는 핑크색 괴물은 무엇일까? 윤승림 감독이 디렉팅한 뮤직비디오의 화려한 영상미 너머의 이야기를 모았다.
직업의 재정의와 일의 형태가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에 햇수로 9년째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오고 있는 윤승림 감독은 어떤 생각과 태도로 프로젝트를 대하고 있을까요? 리전드필름의 헤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윤승림의 세계를 프로세스, 컬래버레이션, 케이팝 아이돌 뮤직비디오, 기술 등의 키워드로 안내합니다.
프로젝트 A to Z
Annually Rima Yoon |
A |
‘연간 윤승림’은 윤승림 감독이 지난해 구상해 올해부터 시작한 비상업적 개인 프로젝트이다. 리전드필름의 공동 대표인 장동주 감독의 ‘윤허’ 하에 오로지 윤승림 감독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것. 첫 번째 연간 윤승림은 댄스 크루 위댐보이즈(WE DEM BOYZ)와 함께했다. 퍼포먼스를 잘 찍는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가 본격 퍼포먼스 비디오를 찍은 적은 없다. 잘한다고 하는 것을 재밌게 잘 해보고자 코레오그래피(안무) 만으로 연출한 작업에 도전했다. 다음에 하고 싶은 것은 밴드 음악이다. “저도 제가 디렉팅하는 밴드 음악이 그려지지 않거든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 두 번째 연간 윤승림은 그에게 낯선 장르의 무언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연간 윤승림 #1: 위댐보이즈 댄스 앨범 ‘비행(飛行) 청소년’
위댐보이즈와 윤승림 감독은 종종 촬영 현장에서 안무가와 연출자로 마주쳤다. ‘비행 청소년’은 NCT U의 ‘Misfit’에 맞춰 두 팀의 기획과 연출, 안무로 완성한 프로젝트로, 지난 4월 1일 위댐보이즈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됐다. 음악에 맞춰 처음 위댐보이즈가 ‘학교’라는 소재를 제시했고, 윤승림 감독이 ‘중2병’이라는 콘셉트를 꺼냈다. 위댐보이즈 멤버들의 학창 시절 일화가 적힌 텍스트에서 시작해 브레인스토밍을 주고받으며 하나하나 함께 구성을 쌓아 올렸다. 주어진 안무를 연구하고 분석한 다음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하는 것이 아닌, 안무가와 연출자가 함께 만들어 나갔다.
“‘맨 처음 교무실에서 시작해 작은 공간인 화장실에 갔다가 교실을 보여주고 다시 복도로 나와요. 그다음 임팩트 샷이 하나 있어야 하니까 분필 지우개 씬을 가고, 마지막에 옥상으로 나와서 해소되는 걸 보여줄 거예요.’ 이런 식으로 먼저 구조를 짰어요. 필요한 캐릭터를 말하면 그에 맞는 멤버들을 매치해 주셨죠.” 로케이션 헌팅에 아티스트 전체가 온 것 또한 그에게는 처음 있던 일. 윤승림 감독은 그 덕분에 “아티스트로 직접 가이드 촬영을 하는 진귀한 경험”과 계단 위 같은 의외의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케이팝 안무가와 케이팝 뮤직비디오 감독에게 케이팝 음악은 오히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퍼포먼스 비디오를 만든다면 위댐보이즈와 제가 이 장르에서 달려온 시간을 보여주는 방증이 되지 않을까 했어요.” 현재까지 약 78만 명이 이 영상을 재생했다(7월 11일 기준). 댓글에는 안무와 연출, 카메라 구도 등의 요소 하나하나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드르륵거리는 나무 책상과 마룻바닥, 학교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대단한 특수효과 없이 윤승림 감독의 연출을 온전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업. 무엇보다 그에겐 여전히 생각만 해도 다시 즐거워지는 프로젝트이다.
Build-Up |
B |
영상이 사진 편집 디자인과 다른 점은 타임라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윤승림 감독의 작업에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부분이 등장한다. 프레임이 쌓여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가 모여 하나의 콘셉트를 구현하기에 전체적인 호흡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Collaboration |
C |
뮤직비디오는 수많은 전문가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에스파의 ‘아마겟돈’은 CG에서만 15팀이 함께했다. 각자의 전문성이 조화롭게 결합하는 과정에서 시너지가 발생한다. 짧은 기간 안에 진행되는 만큼 어느 정도의 단호함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윤승림 감독은 방향성과 피드백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며, 자신이 믿고 맡긴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영역과 보여주려는 것들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열정과 창의성은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서 나온다.
Director’s Treatment |
D |
윤승림 감독이 수백 페이지의 기획 자료 안에서 가장 상단에 두는 것은 바로 클라이언트의 니즈이다. 그는 기획안 안에 연출 의도를 쓰지 않고 ‘Director’s treatment’라고 적는다. 연출은 감독이 주는 해결 방안인 것이다. 그래서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단편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한 발 더 들어가 그 안에 담긴 인사이트를 보고 예민하게 파악해 해결한 다음,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 그리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 제안을 제시하는 것이 그가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Elements Lab |
E |
일명 엘렙(LLAP)으로 불리는 영상 제작 교육 아카데미. 리전드필름의 두 대표와 ATOD 촬영 크루 스튜디오의 윤인모 감독,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 2020년에 시작했다. 영상 제작에 대한 허들이 낮아짐과 동시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노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진 지금, 체계적인 영상 제작 프로세스를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뮤직비디오 감독을 꿈꾸는 이들의 배움터에 대한 고민 해소에 도움이 되고자 한 것. 누구보다 현업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 사람이 제작과 촬영, 연출 – 브레인스토밍부터 키워드와 아이디어 도출 – 등을 실무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15주 과정으로 교육한다. 현재 8기까지 진행되었으며, 클라이언트와 협업사 등 졸업생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업계에 퍼져 있다.
GET |
G |
인터뷰 중 윤승림 감독의 입을 통해 빈번하게 나온 단어 중 가장 예상치 못한 단어이다. 목표를 두고 달려가는 경주마답게 그에게는 항상 얻고자 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겟’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조금 촌스럽더라도 팝하고 컬러풀한 것을 겟하고 싶습니다.”
IVE ‘HEYA’ TEASER |
I |
‘해야’는 윤승림 감독이 데뷔 트레일러 이후 오랜만에 진행한 아이브의 프로젝트이다. ‘해야’와 관련해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가로로 긴 뮤직비디오 티저. 이는 “케이팝에서 보지 않았던 티저”라는 요청에 대한 그의 처방전인 셈이다. “계속 고민하다가 그냥 심플하게 생각했어요. 딱 봤을 때 받아들여지는 느낌 자체가 이색적이어야 새로운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한 것이죠. 그래서 족자의 비율과 디자인을 떠올렸습니다.”
K-Pop Idol Music Video |
K |
윤승림 감독은 모든 아이돌의 뮤직비디오가 대중을 향한 플러팅(flirting)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 방법이 진보하는 것일 뿐이라고. 기존의 플러팅이 그림자 하나 없는 뷰티 샷이었다면, 에스파가 ‘아마겟돈’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진보적이며 유니크한 매력을 지닌 아티스트인지 보여주며 대중의 환호를 끌어낸 것처럼 말이다.
MV Unboxing: XG ‘TGIF’ |
M |
XG의 ‘TGIF’ 뮤직비디오는 2023년 8월 4일 공개됐다. 이 뮤직비디오는 곡이 지닌 에너지와 비트에 집중한 작업이다. 소속사에서 원한 것은 여자 아이돌이 하지 않을 것 같은 긱(geek)한 이미지. 윤승림 감독은 과감함과 에너지를 ‘근본 없음’의 비주얼로 구현했다. 아이디어에 대한 접근은 틱톡 등의 쇼츠와 다양한 필터로부터 시작했다. “그러한 이미지가 한창 소비되던 시기에 했던 작업이 ‘TGIF’예요. 자료를 찾을 땐 포트폴리오 사이트가 아닌 SNS를 보라고 이야기했죠. 직접 필터를 켜보라고 하고요.”
‘TGIF’는 작업자로서 그가 스스로의 경계를 무너뜨린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소통이 편한 한국 작업자와 해야지, CG는 한두 팀만 해야지’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해외 작업자들과 협업해 다양한 장면을 완성했다. “초반에 멤버 주린이 바닥에 하이힐을 찍으면 자동차가 올라오는데요. 그 무빙감도 살짝 근본이 없어요. (웃음) 뒷부분에는 픽셀이 깨져 있기도 하죠. 대신 이런 B급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나머지 부분의 퀄리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한편, 이 뮤직비디오의 키워드는 ‘진화’이다. ‘TGIF’가 포함된 앨범이 뮤턴트(mutant)인 XG의 DNA에 관한 콘셉트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진화론을 연상케 하는, 유인원이 사람과 외계인으로 바뀌는 그림이 등장한 이유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핑크색 외눈박이 괴물은 바로 DNA, 그 자체. 맥락 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설계한 ‘진화’를 보여준다.
Process |
P |
뮤직비디오는 단기간에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기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해 진행한다. 대중과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구현하기 위한 아이디어는 어느 날 번쩍하고 나타나는 영감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에 근거한 창의성이다. 리전드필름은 기획 단계에서 6주 이상의 시간이 확보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편이다. 킥 오프 미팅에서 콘셉트, 키워드 등을 전달 받고 이와 관련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찾아 정리한다. 프리(prepare) 단계의 연출 기획 자료들은 최소 500페이지 이상. 정리된 자료들을 보며 윤승림 감독이 방향성을 디렉팅해 나간다. 1~2주에 걸쳐 기획 초안을 공유하고, 방향성이 확정되면 촬영, 조명, 아트, CG 등 세세하게 기획을 잡아 나간다. 선택의 기준이 되어줄 ‘서사 노트’도 기획 단계에서 작성한다. 콘티까지 포함된 최종 기획안이 나오면 촬영에 들어가고, 촬영 후 편집과 CG, 색 보정 등을 거쳐 유튜브에 릴리즈된다. 대체로 한 프로젝트에 15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며, 3~4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돌아간다.
Rigend Film |
R |
리전드필름은 윤승림, 장동주 두 사람이 이끄는 영상 제작사이다.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필름’과 해외 광고의 코디네이션과 촬영 등을 담당하는 ‘프로덕션’으로 업무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 윤승림 감독은 헤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뮤직비디오 전반 – 클라이언트가 제시하는 콘셉트와 키워드의 핵심을 파악한 기획부터 ‘레디 액션’을 외치는 현장, 후반 작업까지 3분여 동안 보여지는 모든 요소들을 지휘하는 역할 – 을 담당하며, 장동주 감독은 EP(Exclusive Producer, 총제작자)로 견적과 스태프 구성, 클라이언트와의 일정 조율 등을 담당함과 동시에 프로덕션의 광고 연출도 주력으로 진행한다. 두 헤드 디렉터 외에도 윤승림 감독 밑에서 4년의 조감독 생활을 거치고 각각 P1Harmony의 ‘때깔’, 디노(세븐틴)의 ‘Wait’ 뮤직비디오를 디렉팅한 신유지, 김주애 두 신예 감독과 3명의 조감독, 한 명의 어시스트 PD가 리전드필름의 구성원이다.
“김주애 감독은 저와 연출 스타일이 달라요. 그래서 리전드에 있는 거래요. 근데 그 친구가 연출을 꿈꾸게 한 작품 중 하나가 디어 X 재현(NCT)의 ‘Try Again’이에요. 그 뮤직비디오가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는데, 제가 그랬죠. ‘그거 내가 만든 건데?’ (웃음) 서정적이고 미장센으로 끌고 가는 뮤직비디오인데요. 제 작업인 줄 몰랐던 거예요. 어디에도 공개한 적 없으니까요.”
Technolog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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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를 직접 다루기도 하는 윤승림 감독은 새로운 기술에 열려 있다. 뭐든 쉽게 질리는 그의 성향이 신기술을 찾아보고 적용하는 데에도 발휘된 덕분이다. ‘런웨이’의 베타 버전이 암암리에 돌던 시기에 더 보이즈의 ‘ROAR’에 AI를 (소심하게) 사용했으며,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에스파의 ‘아마겟돈’에서 제대로 AI를 해본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더 이상 제약과 경계가 없겠다, 오리지널리티가 더욱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승림 감독은 9월에 열릴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관한 컨퍼런스 ‘퓨추라캔버스(FuturaCanvas)’에 연사로 참석할 예정이다. 그곳에 갔을 때 자신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아는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다.
USP(Unique Selling Point) |
U |
USP는 광고 용어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를 이야기할 때 사용된다. 이는 윤승림 감독이 자신의 팀원들은 물론 아카데미 수강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뮤직비디오나 아트 필름 등의 작업물이 브랜딩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아티스트 마다 구축해 놓은 브랜드가 있고, 음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에 그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파민 분비를 추구하는 숏폼과 콘텐츠의 홍수에 아티스트와 아트웍(artwork)이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프리셋(preset) 같은 작업을 경계하며, 감독이라면 무엇보다 다른 지점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디테일은 차별화의 핵심 요소입니다. 카 체이싱 액션 같은 경우에는 속도감이 중요하죠. I.M(아이엠)의 ‘OVERDRIVE’에서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신 장면이 있어요. 기어를 올리고 속도를 높이는 부분인데요. 사실 처음에 그 데이터가 유실됐어요. 360도 카메라를 하단에 붙인 거였거든요. 그걸 알고 대성통곡했어요. 꼭 들어가야 한다고요. (웃음) 다행히 찾았는데, 조감독들은 이해를 못 했죠. 그게 없어도 완성도 있게 나오는 장면인데, 감독님이 왜 저렇게 매달리나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장면 하나가 터트렸죠. 그렇게 통상적인 화법 속에서 극대화된 장치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Creator+]는 Design+의 스페셜 시리즈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프로젝트에 크리에이터의 일과 삶의 경로, 태도와 방식을 더해 소개합니다. 인물을 조명하는 1편과 프로젝트를 A to Z로 풀어내는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주로 발행됩니다. [Creator+]는 동시대 주목할만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한 ‘오!크리에이터’를 잇는 두 번째 크리에이터 기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