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기 신문사를 거쳐간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만나다
<아담한 필촉: 기자가 그려낸 신문삽화 미장센>
신문박물관 PRESSEUM에서 9명의 미술 기자 출신의 예술가들의 행적을 조명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7월 12일부터 오는 9월 8일까지 진행하는 전시의 제목은 <아담한 필촉: 기자가 그려낸 신문삽화 미장센>.이는 1930년대 이마동의 삽화가 신문소설을 압축해 잘 그렸다는 의미로 '아담한 필촉'이라고 평했던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번 전시는 각기 다른 배경으로 한때 신문사에서 재직했던 고희동, 김규택, 노수현, 안석주, 이마동, 이상범, 이승만, 정현웅, 최영수 등 근대기 시각 문화와 삽화 미술을 논할 때 언급되는 이들의 소위 직장인 시절 활동을 살펴본다. 전시는 ‘삽화의 태동’, ‘신문미술의 개창과 미술기자 전성시대’, ‘학예부를 떠나서’까지 총 세 가지 소주제로 구분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삽화가가 탄생하고 신문 지면에 등장한 배경부터 1920년대 기자들의 본격적인 활동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신문사를 떠나 영화감독, 편집 디자이너, 삽화가, 평론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종사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한편 전시는 첫인상만을 놓고 보자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신문박물관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인물과 작품을 조명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흥미롭다. 아래 이번 전시를 기획한 장해림 신문박물관 연구원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를 찬찬히 읽고 나면 이번 전시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터. 지금 신문박물관의 기획전 이야기를 만나보자.
Mini Interview with 장해림 신문박물관 연구원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시작은 ‘이 대단한 미술가들의 기자 시절이 궁금해서’였다. 박물관 화장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면 북악산이 그대로 보인다. 산수화가 이상범(1897-1972)이 동아일보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가 고개를 들어 밖을 보면서 저 산의 능선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이상범의 작품을 조명하는 것은 여타 기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신문사 시절을 조명하는 것은 신문박물관에서만 할 수 있는 전시라고 생각했다. 또 한정된 시간과 예산 속에서 소장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선보일 수 있는 주제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기자 9인을 선정한 기준은?
신문박물관 소장품 중에 ‘동아일보 퇴사원록’이라는 게 있다. 동아일보를 거쳐간 사원들의 인명 정보를 기록한 일종의 인사카드인데 광복 이전의 기록을 보니 첫 시작이 박영효(1861-1939)일 정도로 근현대사를 주름잡은 인물들의 향연이었다. 고희동(1886-1965), 이상범, 정현웅(1910-1976)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입사, 퇴사를 비롯해 각종 인사 정보가 세세하게 적혀 있다. 이를 보고 있자면 ‘결국 이들도 직장인이었구나’ 싶더라. 자세히 보면 월급도 나오는데, 미술기자 고희동의 경우 다른 기자들이 1920년 기준 6-70원의 월급을 받을 때 80원을 받았다. 아마 이미 최초의 서양화가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해당 퇴사원록을 유사하게 만든 ‘사원록’으로 미술기자 9인의 프로필을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고희동, 이상범, 노수현, 정현웅 등으로 시작해 탐구하다 보니 활동이 가장 두드러지고, 또 기록이 명확한 9명을 추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삽화계의 3대 천왕이라든가, 이 신문사에는 누구, 저 신문사에서는 누구가 유명하다는 식으로 미술기자들이 대중 사이에서 유명세가 있었기 때문에 선정하기 편리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활동 결과물은 ‘근대기 삽화미술과 인쇄 디자인’이라는 영역 안에 묶인다. 이 시기 작품들의 특징이 있다면?
근대기 인쇄 미술은 모더니티의 상징이다. 굉장히 많은 이미지가 재생산, 유통되었다. 삽화가 사진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신문 소설, 기사 외에도 광고, 교과서, 엽서 등지에서 적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삽화미술, 인쇄미술을 통해 세상을 보았다. 근대기 ‘신문’ 삽화미술의 특징이라면 우리가 잘 아는 화가들이 직장에서 ‘오더 받은 대로’ 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도영, 이상범, 노수현은 동양화가로 분류된다. 이들은 실제로 전통 화숙에서 도화서 화원을 사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신문사에서 요구받은 대로 마감기한에 맞춰 그림을 그리다 보니 화풍과 시대를 막론하고 만화나 아주 동시대적인 장면, 예를 들어 호텔 레스토랑에서 매혹적으로 앉아있는 여성과 같이 동양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을 흥미롭게 그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산수화가들이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싶은 과거를 볼 수 있다. 반대로 서양미술을 전공한 화가들이 고려 시대, 조선시대 배경의 역사화를 그리기도 한다.
한편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최영수, 김규택, 안석주 등의 인물은 전시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최영수는 납북 이후 아드님이 자료를 많이 연구하셨는데, 너무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어서 소설이나 옛날 자료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때마다 기뻐한다는 내용이 잊히지 않더라. 그래서 세 번째 전시 섹션인 <학예부를 떠나서>에서 납북 내용을 언급했다.
또 전시에는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는데 일종의 학맥이 보인다. 고희동이 미술교사로 있던 휘문고보, 그리고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川端畵學校) 졸업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당시 미술교사가 있던 학교는 더 많았고, 미술학교도 동경미술학교라든지 태평양미술학교 등 여럿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추천채용이 많던 당시에 동문들끼리 일종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도 물론 취업난이 있었지만 취업 과정 얘기를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다. 매일신보의 이승만은 우연히 길에서 매일신보 기자 ‘이서구’를 만나서 얘기하다 사무실에 이끌려 들어가 취업을 제안받는다. 그런가 하면 정현웅은 사교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이유로 타 신문사 면접에 낙방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미술전공자들이 사원으로 종종 입사하던 광고부는 클라이언트를 많이 상대해야 해서 사교성이 중요했다고.
전시장이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작은 공간이라 보여주기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을 듯싶다. 전시 구획 설정부터 공간 디자인까지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6층 미디어 라운지는 상설전 때 가구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이번 전시는 삽화 위주로 납작한 자료들이 많았다. 따라서 입체감을 주기 위해 영상물, 미디어 콘텐츠, 병풍과 같이 입체적인 자료를 활용했다. 이 모든 자료들이 가구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을 염두에 두고 디스플레이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미디어 라운지 공간디자인 자체가 모던해서 근대문화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한다. 팀원들, 전시 그래픽 디자인 담당(김새롬)과 함께 논의해 디자인을 잡았다. 연대기적인 흐름에 따라 구성했고, 지금의 만화가, 디자이너, 신문 그래픽-일러스트레이터, 작품과 작가에 대한 기사를 쓰는 미술기자들까지 이 모든 산업의 시작부터 줄기를 잡아보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포인트가 있다면?
이상범 삽화 병풍첩, 천경자 삽화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정말 잘 그렸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시대별로 어떤 신문사에 어떤 기자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제작한 벽면의 연표도 공을 많이 들였다. 자료들마다 연대가 엇갈려 최대한 1차 자료에 의존했다. 미술기자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한 각 신문사들의 노력이 보인다.
미디어 콘텐츠 또한 놓칠 수 없다. 황원행이라는 신문 연재소설을 당시 미술 담당 5명과 소설 담당 5명이 짝을 지어서 릴레이로 연재했었는데, 이를 코딩 작업을 통해 콘텐츠로 구현했다. 터치스크린을 통해 130여 점의 소설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신문박물관에서 제공하는 가장 재미있는 체험 중 하나를 꼽자면 즉석사진기가 있는 신문 제작 체험이다. 사진을 찍어 나만의 신문을 만들어볼 수 있는데 이번 기획 전시 테마에 맞춰 이마동의 광화문 풍경화를 배경을 마련해두었으니 꼭 한 장 뽑아가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