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를 매혹시킨 생분해성 해조류 소재, 디자이너 최수양
"생분해성 소재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심미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해조류에서 추출한 생분해성 소재 '알가텍스(Algatex)'를 사용해 조명과 화병 디자인을 선보인 한국인 디자이너 최수양. 지속 가능 소재의 미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속 가능하면서 동시에 심미적인 산업 제품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지난 4월 성황리에 막을 내린 디자인 축제의 장 ‘2024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지속가능성’ ‘패션 브랜드의 홈·리빙 컬렉션 확장’ ‘작가들의 정체성 표현의 다양성’. 알다시피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가구 박람회를 뜻하는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와 밀라노 전역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 ‘푸오리 살로네(Fuorisalone)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도 35세 이하 신인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불리는 살로네 델 모빌레 속 또 하나의 코너 ‘살로네사텔리테(SaloneSatellite)’가 있다. 살로네사텔리테는 격년으로 개최되는 행사로 디자이너, 학교, 기업, 회사를 참여 대상으로 하는데 올해는 한국을 대표해 서울대학교(SNU) 디자인 전공의 학부생, 대학원생 총 9명이 참가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해조류에서 추출한 생분해성 소재 ‘알가텍스(Algatex)*‘를 사용해 조명과 화병 디자인을 선보인 한국인 디자이너 최수양의 작품 ‘Slow’다. 그는 이번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통해 지속 가능 소재의 미적 한계를 뛰어넘어 지속 가능하면서 동시에 심미적인 산업 제품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 Algatex: 해조류(Algae)와 텍스처(Texture)을 결합한 이름.
Interview with
최수양 디자이너 서울대학교 대학원 산업디자인과 연구원
산업 디자이너가 개발한 지속 가능 소재
영국 런던 예술 대학교(UAL)에서 공간 디자인 학사와 석사를 졸업한 후,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깊이 연구하기 위해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 박사 과정을 이수 중이라고요.
런던 예술 대학교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그곳에서 배운 공간 디자인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영역과 범위가 달랐어요. 공간만 디자인하는 게 아닌, 파인 아트에 가까운 영역이었죠. 공간은 물론이고 오브제를 만들기도 하고 건축 디자인을 배우기도 하고요. 그러다 아쿠아포닉스 물필터를 디자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해조류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자료 조사를 많이 했었던 시기를 보냈어요. 그러면서 해조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자연스레 지금의 작업물과 연결된 것 같아요.
이번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지속 가능한 소재 ‘알가텍스’를 활용해 디자이너님만의 생분해성 소재와 디자인 기법을 선보였습니다. 이러한 작업에 들어가기 앞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속 가능한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시기를 돌이켜 보면 자연재해를 직접 겪은 후였어요. 고향이 부산인데 매년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해가 거듭될수록 피해가 늘어나는 걸 직접 보고 느끼며 살아왔거든요. 그렇다 보니 산업 디자이너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깊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산업 디자이너라면 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계속 소비되는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언젠가 버려지게 될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첫 프로젝트 ‘Slow’를 진행하게 됐고요. 사람들의 소비 행태를 바꾸지 않더라도, 제품을 쉽게 사고 버려도 환경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품의 소재에서 찾고자 했어요.
바다 해조류를 사용해 생분해성 소재 ‘알가텍스’를 자체 개발했습니다. 해조류가 작품의 소재가 되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요.
현재 제가 개발한 소재를 특허 등록 중에 있어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움이 있는데요. 가능한 선에서 소개를 드리면 맨 처음엔 다양한 해조류를 사용해 수많은 테스트를 진행했었어요. 해조류를 갈고, 빻고, 즙을 내보는 등 여러 기법을 시도했고요. 그 과정에서 우뭇가사리(한천)를 가루로 만들어 사용하는 게 작품 활동에 가장 적합하다는 걸 발견했고요. 처음에는 가루를 액체와 혼합해 딱딱하게 구웠더니 플라스틱 강도와 비슷한 정도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이 소재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제가 원하는 다양한 디자인을 조형적으로 구현하기에는 유연한 소재가 더욱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조형으로 발전시키기 좋은 유연한 소재로 완성되었습니다. 소재를 제작함에 있어서 플라스틱, 합성고무 등에 쓰이는 천연가스로 만들어진 재료는 일절 배제했고요.
다양한 재료 중에서도 해조류를 활용한 특별한 이유는 있었을까요?
부산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영국에서 석사 과정 중 해조류를 이용한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을 디자인한 경험이 지금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끼쳤어요. 당시 해조류를 조사하면서, 소재로서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거든요.
‘알가텍스’의 소재적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은 반투명을 가지며 질기다는 거예요. 투명성의 정도는 색상을 활용해 컨트롤이 가능해 제품의 목적에 맞게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또한 고무처럼 질기고 탄성을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의 복원력도 갖추고 있고요. 제품의 목적에 맞게 활용된다면 충분히 장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죠. 반면에 단점은 물기에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실생활에서는 무리 없이 사용 가능하지만, 화장실과 같은 습기가 많은 공간에서는 사용을 지양합니다. 직접적으로 물에 닿았을 때 내구성이 현저히 약해지는데요. 최근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소재 실험을 진행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활방수가 가능한 수준으로 보완하는 데에 성공했고요.
해조류를 생분해성 소재로 개발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개발 과정에서 마주한 어려움과 이를 극복한 방법이 있다면요?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소재 건조 과정에 변수가 많이 존재했어요. 온도, 습도, 소재의 두께 등 같은 다양한 변수들에 따라 건조 과정을 달리해야 하는데요. 각 변수에 맞게 반복적으로 실험하고 결과치를 기록하는 과정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어요.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진행하는 게 중요했죠. 그래서 제가 쓴 방법은 소재 실험 과정 중 아주 사소한 발견이라도 반드시 기록하고 이를 성과로 여겨 스스로에게 칭찬하고자 했어요.(웃음) 기나긴 과정에서 결과물이 없는 것 같아도 이러한 작은 발견이 모여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것이 소재 개발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저만의 방법입니다.
한국 전통 매듭 기법으로 밀라노를 사로잡다
‘SLOW’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조명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SLOW 시리즈의 첫 작품은 해조류를 이용하여 생분해성 소재로 제작된 조명 기구였는데요. 이 소재는 반투명해 빛을 투과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제품을 고안한 것이 바로 ‘조명’이었고요. 저처럼 생분해성 소재를 활용하는 디자이너들의 작업적 강점은 소재와 조형을 동시에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는 소재의 장단점을 깊이 이해하고, 따라서 장점을 최대한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조형을 완성해 나갈 수 있었어요. 제품을 만든 후에는 실제 사용 경험을 통해 소재의 개선점을 찾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다시 소재 실험을 반복하며 제품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어요.
디자이너님은 ‘경천사 10층 석탑’ ‘한국 전통 매듭 기법’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고 있죠. 이처럼 한국적인 것들에서 영감을 받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일부러 한국적인 것들에서 영감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 날 한국 역사 공부를 하던 중 ‘경천사지 10층 석탑’ 구조물을 보고 반복적인 패턴의 형태가 2D의 시트지 형태를 3D로 구현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영감을 받았어요.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한국 매듭과 종이접기를 공부하였고, 여러 조형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실험한 결과 지금의 조형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공간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평소 건축물들의 파사드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을 즐겨 했었거든요.
디자인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2D를 3D로 구현하는 것이었어요. 소재의 평면형 그대로 제품에 적용하는 것보다 이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는 형태가 소재의 내구성을 보완해 준다고 생각했고요. 물론 소재 자체가 질기긴 하지만, 산업 소재처럼 수백수천 번 사람 손이 닿았을 때도 버틸 수 있을 내구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조형적으로 보완한 것이었죠.
소재를 개발하고, 작품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님만의 독창성 혹은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점에 특히 집중하고자 했나요.
생분해성 소재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심미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바라는 이상적인 구조는 소비자들이 ‘환경친화적인 제품이니까 소비해야 해!’가 아닌, 일반 산업 제품을 소비하려고 보니 친환경적인 제품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었어요. 소비자들에게 경각심이나 강요로 생분해성 소재를 소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조형에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죠.
실제로 밀라노 전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설명 없이 시각적으로만 제품을 접했을 때 생분해성 소재를 활용한 디자인으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더라고요. 오직 제품 자체의 조형적 디자인만을 보고 부스에 들어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까이서 보니 소재가 독특하다며 PVC를 사용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웃음) 생분해성 소재를 활용했다고 설명하니 대부분 놀라더라고요. 생분해성 소재로 제품을 만드는 경우 알게 모르게 생분해성 소재의 시각적인 느낌이 나는 데 반해, ‘Slow’ 시리즈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저의 의도가 소비자에게 전달된 것 같아 뿌듯했던 기억이 나요.
앞으로를 내다보는 소재의 잠재성
신인 디자이너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살로네사텔리테에 참여해 디자이너님의 고유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소감은요?
제 생에 디자이너로서 첫 전시가 살로네사텔리테 였던 터라 저에게는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이전의 저는 클라이언트 베이스의 문제 해결을 하는 디자이너였다면, 현재는 작가주의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디자인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여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첫 장이었습니다. 세계 디자인 축제의 장에서 관람객들이 저의 작품에 흥미를 가지고, 그들과 직접 소통하며 디자이너로서 많은 희열을 느낄 수 있었어요. 또한 저를 제외한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보면서 더욱 꿈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전시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현재 선형(Line)의 조형 시리즈 ‘Slow’를 발전시켜 면형(Side)의 조형성을 가진 작품도 제작 중에 있어요. 또 기존의 영역에서 확장해 가구나 인테리어 오브제로 확장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요. 올해 안으로 가구 제작을 시도해 보려 해요. 또 소재로의 확장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현재 제가 구현한 소재가 극심한 온도·습도 변화에도 견디는 것이 실험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 이후에 확장해 나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