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유머, 협업을 위한 디자인 행사, 살로네 디 아샤우
유머가 없으면 디자인도 없다. 행사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행사가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
요즘 디자인 페어에 가면 눈이 쉴 틈이 없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행사는 더욱 그렇다. 멋진 것 옆에 멋진 것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장소를 옮겨가며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앞서 본 멋진 것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말 그 많은 디자인을 흡수할 수 있을까? 시간과 자원을 막대하게 쏟아붓는 디자인 페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올해 첫선을 보인 살로네 디 아샤우Salone di Aschau는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 새로운 형식의 디자인 행사다. 시류를 좇지 않고 뚝심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가구 기업 ‘닐스 홀거 무어만’과 독일의 디자인 실험 그룹 ‘하우스 오토’가 함께 기획했다. 방향성은 뚜렷하다. 소수의 사람과 천천히, 무엇보다 가볍고 유쾌하게. 독일 남부 지방의 작은 마을 아샤우에 위치한 닐스 홀거 무어만 본사와 게스트하우스 베르그에서 그 결과물을 보고 왔다.
해발 고도 615m의 디자인 발신지
시작은 밀라노 디자인 위크였다. 이런 식의 행사는 이제 지루하고 피로하지 않냐며 디자인 관계자들이 열을 띠며 얘기하는 자리였다. 닐스 홀거 무어만을 이끌고 있는 디렉터 크리스티안 크노르스트Christian Knorst도 꽤나 완강했다. “더 많은 제품을 만들고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야.” 독일에서 괴짜 가구 회사로 통하는 닐스 홀거 무어만은 실제로 15년째 살로네 델 모빌레에 참여하지 않았다. 토론은 길어졌고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좋아, 그래서? 당신들의 남다른 접근법이 뭐지?” 닐스 홀거 무어만 본사가 있는 아샤우에서 그 답을 찾았다. 알프스 산자락이 360도로 펼쳐져 마치 그림 속을 걷는 듯한 이곳은 인구 5000명을 겨우 웃도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꽤 고립되어 있지만 닐스 홀거 무어만은 영감을 얻기 위해 다른 도시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 사람들을 이곳으로 초대한다. 기념일마다 파티를 열고 다 함께 요리를 한다. 본사 옆으로는 동네에서 가장 큰 랜드마크인 호헤나샤우 성Hohenaschau Castle이 보이는데 닐스 홀거 무어만은 이 성주의 마구간을 매입했다. 당시 80년 동안 건물이 방치된 상태였지만 건물을 수선하지 않았다.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수리만 했다. 군데군데 흠이 있고 고장 난 건물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무어만식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크노르스트는 살로네 디 아샤우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방문하는 것보다 빠른 방법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닐스 홀거 무어만의 모든 제품은 아샤우에서 직접 만든다. 작은 마을이지만 나무, 금속, 종이,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다루는 전문가가 많고, 생산 과정 또한 투명하고 공정하다. 살로네 디 아샤우는 마치 대량생산품 같은 박람회에서 벗어나 각자에게 어울리는 전시 형식을 만들어가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행사다. 큰 시나리오는 없었다. 전시에 필요한 몇 가지 가구는 건초 더미로 만들었다. 닐스 홀거 무어만에서 직접 키우는 말이 있으니 지출도 낭비도 거의 없는 셈이다. 마케팅과 디자인 책임자 로버트 크리스토프Robert Christof는 “물론 스릴도 없고 럭셔리도 없다. 사람들은 이곳에 오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운전을 하거나 열차를 갈아타야 하고, 야외 캠핑장에서 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살로네 디 아샤우와 닐스 홀거 무어만의 팬이 될 것이다”라고 자부했다. 1969년 우드스탁이 얼마나 작은 농장 마을에서 시작했는지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행사를 즐기러 온 사람들은 행사가 즐거우면 그걸로 충분하다.
유머가 없으면 디자인도 없다
전시를 둘러보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이토록 단순하고 기발하고 터무니없고 결함이 있는 아이디어를 포용하는 디자인 행사가 또 있을까? 닐스 홀거 무어만 앞마당에는 건초 더미가 한가득이었다. 곳곳에 삽쇠나 갈퀴가 꽂혀 있기도 했다. 건초와 짚은 엉덩이 받침대, 삽쇠는 등받이인 스튜디오 OE의 가구였다. 금속공예를 공부한 디자이너 한나 쿨만은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오브제로 ‘건초 더미 속에서 못 찾기 이벤트’를 선보여 관람객에게 기대감과 좌절감을 함께 안겨주었다. 페어라는 현대적 콘셉트를 표방할 뿐 일종의 해프닝이자 퍼포먼스 같은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게스트하우스 베르그 정원에 놓인 BNAG의 허밍 오브제는 사람들이 기꺼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구멍에 머리를 넣고 소리를 내면 물체가 공명하며 음조에 따라 각기 다른 진동을 일으켰다. 행사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인 하우스 오토는 트랙터 창고 지붕에 의자를 걸어 호기심을 자아냈는데 알고 보니 셰이커 가구에서 영감을 받은, 간편한 바닥 청소를 염두에 둔 의자였다. 먹고 마시는 시간도 빠질 수 없었다. 마음껏 결합하고 확장해 여럿이 나눠 먹을 수 있는 하우스 오토의 모듈형 빵은 이름이 ‘엔드리스 브레드’임에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또 6대째 가업을 이어온 테이블웨어 전문 기업 모노는 달콤한 디저트를 제공해 오픈런 대란을 일으켰다. 아이스크림과 함께 제공한 숟가락은 휴대성과 실용성을 인정받아 ‘모노 피크닉 커틀러리’라는 별칭까지 붙은 ‘모노 클립’의 한정판 스푼으로 이번 행사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렇듯 여유롭고 유머러스한 태도는 닐스 홀거 무어만이 추구하는 지향점과 같다.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동형 의자 ‘북키니스트Bookinist’도 우연한 계기로 탄생했다. 20여 년 전, 지금의 닐스 홀거 무어만을 만든 전 CEO 닐스 홀거 무어만은 밀라노 가구 박람회 직전에 허리를 다쳐 서 있기가 힘들었다. 책과 맥주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에게 딱 맞는 수납공간과 조명과 바퀴까지 갖춘 의자를 디자인했고 박람회 기간 내내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이 의자에만 관심을 보였다. 앉고 싶어 했고, 판매를 요청했다. 닐스 홀거 무어만은 유머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프레스트 체어Pressed Chair 출시 10주년 때는 의자로 전망대, 옷걸이, 테이블을 만들고 그네와 썰매처럼 변용해서 타기도 했다. “의자는 단순히 농담처럼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머가 좋다. 살로네 디 아샤우도 그렇다. 일반적인 가구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고유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닐스 홀거 무어만의 의자는 머지않아 비행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라는 크리스티안 크노르스트의 농담 섞인 말을 들으며 전시장을 바라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디자인 컬렉티브, 아이디어 퍼블리셔스
닐스 홀거 무어만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성장했다. 늘 작은 발명품과 이를 함께 만들 사람을 찾아왔다. 전 CEO가 퇴임한 뒤에는 사내에서 디자인을 맡지도 않는다. 외부 협력이 기본 원칙인데 그 과정이 조금 독특하다. 무어만 웹사이트에는 ‘아이디어 제출하기’ 카테고리가 있다. 디자이너들이 스케치나 설명 글, 프로토타입을 보내며 1년에 평균 300개 정도의 아이디어가 접수된다. 여기서 경력과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디어와 가구 생산에 필요한 몇 가지 기준만 본다. 예를 들면 ‘지역 장인과 협업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조건. 운이 좋으면 1년에 가구 1개 정도 출시된다. 이런 방식을 두고 닐스 홀거 무어만은 가구 회사가 아니라 ‘가구 출판사’, ‘아이디어 퍼블리셔스’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살로네 디 아샤우 역시 이 맥락의 연장선에 있었다. 디자이너들은 장난스럽고 느슨한 방식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오픈 디자인 클래스는 나만의 지팡이 만들기 워크숍을 열었고 전시 다음 날 몇몇 디자이너들은 각자 만든 지팡이를 짚고 하이킹을 했다. 자연 속을 함께 걷는 시간은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라는 취지였다. 루카스 마르슈탈러Lukas Marstaller는 농장에서 채집한 사운드로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모노의 다도가 함께 어우러져 운치를 더했다.
살로네 디 아샤우는 화려한 신제품을 소개하는 가구 박람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고장 난 의자, 시중에 공개한 적 없는 독특한 모델, 일회성 작품과 퍼포먼스, 프로토타입과 한정판 가구를 선보였다. 닐스 홀거 무어만과 하우스 오토의 기획 의도는 크게 두 가지, 대안 모색과 협업이었다. “지난 40년간 디자인 신에서 의미 있는 생태계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자.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 만드는 협업 시스템만큼 근사하고 흥미로운 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