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경고택에서 만나는 현대 미술가 이완의 개인전

한옥과 현대미술의 조우

사직동 운경고택에서 현대 미술가 이완의 개인전이 열린다. 작가는 운경고택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기억과 기록을 보관하는 컴퓨터 저장 장치 '램(RAM)'으로 치환했다. 고택 마당부터 사랑채까지, 공간 곳곳에 자리한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운경고택에서 만나는 현대 미술가 이완의 개인전

이완 작가의 개인전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이 오는 9월 3일부터 10월 27일까지 운경고택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2022년부터 기술과 예술, 인간의 관계를 주목하며 소개해 온 시리즈 전시 <랜덤 액세스 메모리(Random Access Memory)>의 세 번째 장이자 마지막 장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개인적으로 수집해 온 아카이브와 전시 장소인 운경고택의 역사적 기록물을 기반한 신작 19점을 포함한 26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완 작가는 왜 램(RAM)을 주목했나?

이완 작가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전시 제목이다. ‘랜덤 엑세스 메모리(Random Access Memory)’는 소위 말하는 컴퓨터 장치 ‘램(RAM)’으로 컴퓨터 메모리 저장소를 뜻한다. 정보를 보존하고 전달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기술이자 장치이기도 하다. 앞서 작가는 두 차례 동명의 전시를 소개한 바 있다. 2022년 갤러리 X에서 소개한 <랜던 액세스 메모리 1: Displacement 0(Zero)>는 시리즈 중 첫 번째 전시다. 인터넷으로 인해 개인과 국가 간 경계가 해체되고, 기존의 가치와 지식이 지속적인 ‘덮어쓰기’를 통해 갱신되는 현시대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듬해 작가는 화성ICT생활문화센터에서는 시리즈 중 두 번째 전시를 소개했다. <랜덤 엑스시 메모리 2: 계승자>(2023)는 기술 혁신이 정보 전달 방식과 인간 인식 체계에 미친 영향을 주목했는데 이를 종이, 잉크, 데이터로 시각화한 작품을 선보였다.

세 번째 전시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에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억과 기록을 주목한다. 이는 이완 작가의 작품 세계와 세 개의 시리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오래전부터 인류는 기록과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해 왔다. 근원적인 행위로서 기록과 기억은 개인과 역사, 근대화와 전통, 사회와 구조를 이룬다. 작가는 회화, 조각, 설치, 로보틱스, 사운드스케이프, 미디어 테크놀로지 등 장르와 매체를 아우르는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운경고택, 랜덤 엑세스 메모리가 되다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2016) 작품 모습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기록과 기억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전시 장소도 눈여겨볼 점이다. 전시 장소인 사직동 운경고택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李載灐) 선생의 거주지였던 곳이다. 이완 작가는 전시장인 운경고택을 하나의 정보와 기억의 저장 장치인 ‘RAM’으로 인식했다.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현대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2016) 작품 모습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고택 마당에서부터 출발하는 전시는 안채, 뒷마당, 내정, 사랑채로 이어지는 동선을 갖췄다. 전시 도입부인 고택 마당에는 크기가 다른 나무 상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언뜻 보면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다. 이는 설치 조각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2024)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상자를 둔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애초에 상자를 매달아 놓고 싶었지만 조건 상 불가능해 놓아두었다고 말한다. 크기는 달라도 무게는 같다고 알려준 작가는 관객이 두 상자를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작품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식과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일종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장치라고 설명했다.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2016) 작품 모습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두 상자를 지나면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도 선보인 작품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2016)를 정면에서 마주친다. 이는 7,80년대 국가 개발 시기 정부에서 시민을 통제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이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식으로 유추되는 세 명의 인물은 얼굴이 없다. 작가는 얼굴을 없애 불확실한 미래를 표현하며,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연출했다.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 전시 전경, 2024,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운경고택 안채에 자리하는 신작 ‘기록과 기억의 책장'(2024)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안채에 이르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신작 ‘기록과 기억의 책장'(2024)와 ‘아카이브 -운경 이재형'(2024)’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안채 내 별도의 방에 설치한 ‘기록과 기억의 책장'(2024)은 빨강과 파랑 조명으로 연출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안에는 한지를 붙인 책장이 놓여 있는데 2011년부터 작가가 개인적으로 수집해 온 자료를 재배치해 선보인다. 신원 미상의 인물이 남긴 기록물부터 일제강점기 시대의 훈장, 갑신정변 시기의 기록물, 개인 사진과 단체 사진 등 수많은 기억과 기록의 집합체인 셈.

운경 이재형의 일대기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엮어낸 작품 ‘아카이브-운경 이재형'(2024)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방을 나오면 마루에는 운경 선생의 기록물들을 나열한 작품 ‘아카이브-운경 이재형'(2024)을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운경 선생 개인의 일대기만을 조명하기 보다 그 주변에 자리한 근현대사의 흐름을 함께 엮어냈다. 개인의 기록과 기억이 역사와 사회라는 큰 맥락에 어떻게 자리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로보틱스 기술을 접목한 ‘깨어난 사물-켈로그 콘프레이크'(2022)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안채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작품은 ‘깨어난 사물-켈로그 콘프레이크'(2022)다. 이는 작가의 오랜 관심사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에 로보틱스 기술을 접목했다. 켈로그 콘프레이크 상자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눈을 붙였다. 실시간으로 좌우로 눈을 움직이는데 꼭 사람이 눈을 굴리는 모습이다. 사물이 인간이 된 듯, 인간이 사물이 된 듯한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시스템이라는 틀 안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모습 같기도 해 섬뜩함도 느껴진다. 이외에도 작가는 로보틱스 기술을 접목한 조각 ‘이야기하는 바위'(2024)와 ‘이야기하는 장독'(2024)도 제작했다. 바위와 옹기독 형상을 지닌 로보틱스 조각은 앞으로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했을 때 미래에 달라질 일상 속 모습의 단편을 보여준다.

한편 뒷마당과 내정 사이에 자리한 커다란 광고판 작업 ‘빌보드'(2024)도 눈길을 끈다. 작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손을 그렸다. 손에는 ‘Remeber!! ACT!! BRING CHANCE!!’, ‘ON STRIKE’ 등의 팻말이 들려 있는데 이완 작가는 캐릭터를 의인화해 사람들로부터 잊히지 않기 위해 시위에 나선 노동자의 모습으로 치환해 소개한다. 상업주의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장르이기도 한 광고와 빌보드 형태를 빌려 노동을 이야기하며 반전을 준 셈이다.

까치와 사랑채 그리고 인공지능

운경고택 곳곳에서는 새가 등장한다. 안채 안방, 뒷마당, 사랑채에는 이완 작가가 조각한 새가 놓여 있다. 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기록과 기억을 다루는 이번 전시에서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상징한다. 새는 한국의 대표적인 텃새인 까치이다. 작가는 주변 작품의 성격을 고려해 안채 안방에는 동양화 수묵 기법으로 채색한 집 까치, 사랑채에는 서양화의 유화 기법을 적용한 산까치, 그리고 뒷마당에는 네온 까치를 선보인다.

운경고택의 사랑채 ‘궁구당’과 그 앞에 자리한 이완 작가의 작품 ‘ 더욱 밝은 내일을 위하여'(2016)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 공간은 산까치가 놓인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운경 선생 생전에 수많은 정객이 드나들어 ‘궁구당(肯構堂)’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서경의 구절 ‘조상의 유업을 이어 계승 발전시킨다’라는 뜻을 지녔다. 입구 앞에는 시리즈 <메이드 인>의 한국 편 ‘메이드 인 코리아-짚신'(2015) 영상 설치 작품이 놓여 있다.

사랑채 입구에 놓인 이완 작가의 작품 ‘메이드 인 코리아-짚신'(2015)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소반 위에 놓인 작은 TV와 그 아래 놓인 짚신, 그리고 영상 속에는 용인 민속촌에서 30년 동안 짚신을 만들어 온 인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제품이 탄생하기까지 투입된 노동과 과정을 추적해 온 작가의 작품이다. <메이드 인> 시리즈 내 한국 편에서는 짚신과 가발을 조명했다. 태국은 실크, 캄보디아는 쌀, 중국은 나무젓가락, 미얀마는 금, 베트남은 고무와 커피, 인도네시아는 테이블과 테이블보, 라오스는 접시, 말레이시아는 팜유 등이 연작의 주제가 됐다.

전통 한옥 공간에 이케아 가구를 들여온 이완 작가의 작품 ‘Fantasy Dream'(2024)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사랑채 내 전시 전경 (촬영 이종근, 사진 제공 운경재단)

사랑채 안은 좌식과 사랑채 안은 좌식과 입식이 공존하는데 작가는 이를 참조해 전통과 현대의 충돌이 일어나는 장을 만들었다. 작품 ‘Fantasy Dream'(2024)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전통 한옥 공간에 획일화된 대량 생산 가구인 ‘이케아’를 놓아둠으로 서구 모더니티에 대한 환상을 고찰한다. 한편 이케아 쇼룸처럼 꾸며진 작품 안에는 한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시사토크 좋은 질문'(2024)이다. ChatGPT와의 반복적인 대화를 통해 작가는 인간과 기술이 공존할 앞으로의 미래상을 탐구한다.

최근 작가는 인공지능 ‘ChatGPT’를 작품 제작 과정에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다. 앞서 지나온 안채 입구에 놓인 작품 ‘안내 영상’이 대표적이다. 인공지능 도슨트 작품으로 AI 시대 속 새로운 채용 방식과 전시 설명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다. 실제 인물의 초상 사진에 인공지능 기술을 결합했다. 실제 인물처럼 전시와 작품을 소개하는 AI 도슨트가 등장하는 영상 작품이다. 이처럼 작가는 기술과 인간, 그리고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꾸준한 시도를 선보인다. 운경고택 곳곳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 시대 탁월한 질문자인 그가 던지는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질문들이 궁금하다면 운경고택으로 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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