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WOL에서 마주한 유리 공예가 박선민 개인전, <시간의 연결성>
매끈하게 굴곡 지거나 길게 뻗어나간 반무광 유리 표면은 마치 꿈속에서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몽환적이면서도 풋풋한 감정을 안긴다. 전시 <시간의 연결성>에서 만난 유리공예가 박선민의 이야기.
유리공예가 박선민의 청아하고 우미한 유리 공예 작품들이 화폭 위로 수채화 물감이 스미듯, 키아프&프리즈 기간 동안 삼청동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재생 유리를 사용한 공예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게 굴곡 지거나 길게 뻗어나간 반무광 유리 표면은 마치 꿈속에서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몽환적이면서도 풋풋한 감정을 안긴다. 월WOL 삼청에서 진행 중인 이번 전시 <시간의 연결성>에서는 고대 한반도에서 사용되었던 유리 유물로부터 영감받아 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 채 오랜 시간 땅속에서 풍화작용을 거친 고대 유리 유물을 재현했다.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유물의 연속성을 현대의 유리공예를 통해 이어가며 자원순환과 지속가능성의 중요성을 새로운 예술적 가치로 표현하고자 한 박선민 작가. 그가 전하는 유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Interview with
박선민 작가
작가 박선민은 금속, 나무, 유리 등 여러 재료에 대한 전문성과 디자인 감각으로 다른 공예 재료와의 접목을 거침없이 시도하며 유리의 가능성을 경계 없이 확장하는 중이다. 2014년 시작된 리보틀(Re:Bottle) 프로젝트로 버려진 유리병에 공예적 터치를 더해 새로운 미감과 역할을 부여하여 일상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도록 하는 작업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다. 이 시대 공예가로서의 역할을 늘 고민하며, 메시지가 담긴 에디션을 꾸준히 선보이는 중이다.
현재 월WOL 삼청에서 진행되는 <시간의 연결성> 전시는 고대 유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요.
몇 해에 거쳐유리 유물을 연구하고 해당 유물을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반도 내 출토된 유리 유물들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유물의 과거부터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였던 만큼 제가 기존에 진행하던 리보틀(RE :Bottle) 프로젝트와 의미가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본격적으로 고대 유리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고대 한반도 유리 유물을 연구하는 연구원들은 과거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로만 글라스*를 미루어 보았을 때 선조들이 유리 문화를 향유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고, 유리 구슬 같은 기물을 분말로 만들어 다시금 새로운 물건으로 가공했을 것이라는가설을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 ‘아, 지금 내가 하는 일처럼 고대에도 유리 공예에 재가공이라는 영역이 있었겠구나’ 싶었고 이를 조명하는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죠.
오늘날 유리 공예가들이 미국, 스웨덴, 체코 등지에서 유리 공예 재료를 공수해 재가공하거나 혹은 제가 리보틀 프로젝트 통해 버려진 유리병을 다시 재가공하는 일이 고대 시대의 작업들과 닮아있다고 생각하니 전시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오더라고요. 이번 작업을 통해 고대에서부터 유산으로 내려오는 유물들을 마치 우리 일상 곁에 가져다 놓은 듯한 감정을 느끼실 수 있게끔 하고 싶었고, 실제 유물의 패턴과 디자인을 닮은 디자인으로 완성하고자 했어요. 마치 방금 막 흙 속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죠.(웃음)
*로만글라스 : 로마제국에서 제작되어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유입된 유리제품
그렇게 완성해 선보인 작품의 종류는요?
고대 유리구슬부터 사리병, 매병, 굽잔, 가야 토기 등을 저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해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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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 중 하나를 선정하자면 단연 유리 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유리 제품은 단연 유리구슬과 유리용기입니다.
유리구슬은 형형색색의 둥근 구슬과 기다란 대롱 구슬, 한반도 특유의 곱은 구슬,
금박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금박 유리구슬 등 수많은 종류로 구성됩니다.
신라 마립간들의 무덤에서는 후기 로만 글라스로 분류되는 봉수형병, 귀갑문배, 반점문완 등이 발견됩니다.
더불어 불교문화가 고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장 가까이서 보호하는 녹색 유리병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는 유리를 사용하는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 고대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리의 역사적 의미, 박준영(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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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표면에 특유의 패턴이 눈에 띄어요. 고대 유물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기법 중 하나였다고요.
유물이 아주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 있는 동안 풍화작용을 겪게 되잖아요.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불고 자연의 시간을 거쳐 부식이 되는 동안 바랜 유리 겉면의 질감과 패턴을 일반적인 공예의 재료인 프릿(Frit)과 파우더를 사용해 표현한 거죠. 또 이번 전시 작품 대부분이 초록색과 파란색인데 이는 고대 유물을 오마주한 컬러에요. 그 당시 유리 제품을 보면 안료가 한정되다 보니 색이 거의 다 비슷했거든요.
작업 초창기에는 금속과 나무를 소재로 공예 작업을 이어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유리 소재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요?
산업디자인과 3학년 때부터 유리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유리조형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리 공예에 관한 다양한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2014년 제주에서 바다 쓰레기를 주제로 진행된 기획전이 열렸는데 그때 처음 아티스트 업사이클링 프로젝트 ‘Re:bottle’를 시작하게 된 거죠. 리보틀은 쓰임을 다한 폐유리병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성격의 내용물을 담을 수 있도록 형태와 역할을 완전히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지금까지도 제가 메인으로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고요. 버려진 유리병을 직접 커팅하고 다시 새로운 형태로 탄생시키는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오더라고요.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소재에 대한 이해도도 있어야 하지만, 기법에 대한 이해 역시 기반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 부분은 작가만이 줄 수 있는 새로운 삶이라 생각했고, 또 공예라 하면 새로운 쓰임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했던 것 같아요.
유리가 가진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유리의 이중적 물성과 다채로운 컬러가 주는 오묘한 아름다움에 처음 반했던 기억이 나요.
폐유리병은 어떤 과정을 거쳐 업사이클링 되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먼저, 수거한 폐유리병을 세척한 다음 라벨을 제거하고 분류해요. 저 나름대로 유리병의 크기와 형태, 색상, 무게에 따라 재사용하는 기준이 있어 그 기준에 맞게 분류를 하죠. 가볍고 두께가 얇은 수입 맥주병이나 음료수 병, 각종 소스나 가공식품이 들어있던 유리 용기는 주로 기능적인 부분을 새롭게 할 때 쓰이고, 무겁고 두께가 두꺼운 주류 병은 오브제를 제작할 때 쓰이죠.
형태, 색상, 쓰임에 따라 분류한 다음 원하는 높이에 맞춰 절단하고 거친 면을 부드럽게 갈아내기 시작하는데요.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연마(Cold Working)에 공이 많이 들어가는 편이에요. 약 8단계의 연마를 거친 후에는 블로잉(Blowing) 기법으로 형태를 변형하거나 표면의 스크래치나 사용된 흔적은 샌드블라스팅(Sandblasting) 기법을 통해 질감 처리를 마무리하고요. 마지막으로 변형된 조각들은 라미네이팅(Laminating) 기법과 표면에 조각하는 인그레이빙(Engraving) 기법을 활용해 형태를 완성하죠.
평소 작업적 영감은 어디서 얻곤 하나요?
평소에도 전통적인 소재에서 영감을 많이 받아요. 이전에는 폐유리병을 재가공해 매병 쉐잎의 유리 공예품을 만들거나 가야 토기의 굽잔 등 꾸준히 유물의 형태에서 착안해 선보여왔어요. 저를 포함 한국 작가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것에 본성이 끌리는 것 같아요. 외국으로 나가면 그러한 마음은 더욱더 발현되고요. 과거 호주에서 유리 작업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당시 한국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는 본성에 이끌려 ‘현대 여성의 나르시시즘’을 주제로 유리 꽃신을 만들기도 했었어요. 그 이후로도 고대 작품을 만들거나 한국적인 정서를 담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작가님은 투명한 유리 보다 불투명한 유리에 더 매력을 느끼는 듯해요. 불투명한 유리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짝거리고 투명한 유리에 매력을 느끼곤 하잖아요. 저는 불투명하고 약간 반무광의 형태와 질감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속에 있는 것이 감춰진 듯, 드러나 보이는 듯 이중적인 면이 좋더라고요. 이러한 양면성은 제가 업사이클링 과정을 거쳐 버려진 재료를 새로운 재료로 탈바꿈시키는 과정과 닮아있기도 하고요. 스튜디오 이름도 불투명한 유리가 가진 양면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두 레이어(Deux Layer)’로 이름을 지었어요. ‘둘’을 뜻하는 불어 Deux와 층을 뜻하는 영어 Layer가 만나 ‘서로 투영하는 유리의 양면’ ‘하나 된 두 겹’을 의미해요.
이번 전시 기간 동안 키아프&프리즈 기간이 겹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 삼청동을 찾았습니다. 전시를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전시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흔히들 유리공예라 하면 이탈리아나 미국이 전문적이고 대표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국 역시 고대에 유리를 제작하던 공방이 있었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소재였어요.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함을 열어 보면 겉에 여러 겹의 보관함을 두고 진짜 사리가 들어있는 사리병은 유리로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죠. 한반도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유리라는 소재가 귀하게 여겨졌다는 점과 오늘날 한국에서도 유리 공예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만큼 무한하게 변형이 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소재라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