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과학을 접목한 아니카 이, 리움미술관 개인전

생물과 기계로 창조한 예술 작품,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Anika Yi)가 리움미술관을 실험실로 탈바꿈했다. 기술 연구와 생물 실험을 바탕으로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을 소개해 온 아니카 이의 개인전을 소개한다.

예술에 과학을 접목한 아니카 이, 리움미술관 개인전

기술과 생물, 감각을 연결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여 온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아니카 이(Anika Yi). 지난 10년간의 작품 세계를 망라한 전시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실 M2에서 지난 9월 5일부터 오는 12월 29일까지 진행되는 전시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은 작가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신작 11점을 포함해 총 33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신작과 구작이 한데 어우러진 만큼 전시는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점이 특징이다.

아니카 이(Anicka Yi), 사진 이재안

전시의 제목도 흥미롭다. 불교 선종의 수행법 중 하나인 간화선(看話禪)에서 사용되는 화두의 특성을 차용했다. 화두는 스승이 제자에게 던지는 짧은 문구나 질문을 말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것으로 자아를 초월한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데 인간중심주의에 도전해 온 작가의 작품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아니카 이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냄새나 박테리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과 존재에 관심을 보여왔다. 최근에는 균류, 해조류 등 비인간 생물과 기계를 다루는 작품을 선보이는데 과학자부터 엔지니어, 건축가, 조향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협업도 눈길을 끈다.

한편 작가는 이번 전시의 이론적 기반을 한 가설에 둔다. 선사 인류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가설과 조류(藻類) 및 균류의 이동이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이 바로 그것. 이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작가 개인의 여정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역사, 생물, 환경 등이 정체성과 이주, 상호 연결성 등 보편적 담론과 공명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플랑크톤과 해조류를 닮은 기계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아니카 이는 시각이라는 감각을 넘어 후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으로 전시장을 꾸린다. 리움미술관도 예외는 아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낯선 습도와 향기를 감각할 수 있다. 가려진 커튼을 열어젖히면 생경한 풍경이 펼쳐진다. 최초로 생명체가 지구에 살기 시작했다는 고생대가 떠오른다. 촉각과 후각에 이어 작가는 다시금 낯선 형태의 작품으로 시선을 붙잡는다. 해파리처럼도 보이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세포를 닮기도 했다. 바로 <방산충> 연작이다. 작가는 약 5억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처음 등장한 단세포 동물성 플랑크톤인 방산충류에서 영감을 얻었다.

방산충류는 그 종만 15,0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시장 곳곳에 펼쳐진 작품이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닌 이유다. 가까이 다가가 작품을 보면 단순한 조각이 아니다. 촉수처럼 보이는 기계 장치가 마치 숨을 쉬듯이 말렸다가 다시 펼쳐지기를 반복한다. 섬세하게 짜인 광섬유 표면을 따라 빛이 깜빡일 때마다 내부의 기계 장치가 드러나는데 관객이 인공물과 유기체의 경계를 모호하게 인식하도록 한 작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연작 <방산충>(2023) 뒤로 놓인 <켈프 조각> 연작도 생경한 전시 풍경을 연출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바닷속 숲을 형성하는 해조류 일종인 켈프를 이용한 작업이다. 특히 <켈프 조각> 연작에는 고대 인류가 환태평양 해안과 베링 해협에 형성된 해조류 숲을 따라서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는 ‘켈프 하이웨이’ 학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인류는 고대 바다를 횡단할 때 해조류로부터 일종의 보호를 받은 셈인데 작가가 켈프 안에 기계 곤충을 들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켈프 조각이 곤충의 고치, 벌집, 인간의 장기 등 자연의 형태를 떠올리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이는 작가가 수년간 탐구해 온 ‘기계의 생물화’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연작 <방산충>(2023)과 마찬가지로 유기체, 인공물, 인간, 비인간, 과학, 공상 등 상반된 개념의 경계를 흩트리며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아니카 이의 공동 창작자는 누구?

절단, 2024, 폼, 석고, 페인트, 덴푸라 꽃 튀김, 유리, 튜브. 245 x 120 x 140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아니카 이의 작품에서 부패는 또 다른 창작자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한 신작 <생물오손 조각> 연작과 <덴푸라 꽃 튀김 패널>연작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2010년 무렵부터 꽃과 식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꽃에 밀가루 반죽을 입히고 기름에 튀겨냈는데, 그 과정에서 변모하는 꽃의 모습과 온습도와 박테리아 영향으로 부패해가는 꽃 튀김을 통해 아름다움의 영속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부패라는 현상을 일으키는 외부 요인들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공동 저자로 끌어들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꽃 튀김 작품의 연장선상에 자리한 <생물오손 조각>도 마찬가지. 먼저 낯선 작품명부터 살펴보자. 생물오손은 물에 잠긴 고체의 표면에 미생물이 붙어 자라면서 형성된 생물막이 기계 장치에 오작동을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튀겨진 꽃으로 뒤덮인 표면은 기름진 외형과 부패하며 나는 시큼한 냄새로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표면 사이로 자리한 유리 용기와 수족과 튜브는 인체의 내장을 연상시키며 이질적인 느낌을 전한다. 인체와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균열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자연 현상의 힘을 엿볼 수 있다.

또 다른 너, 2024, 아크릴, LED, MDF, 거울, 양방향 거울, 박테리아, 아가 배지. 200 x 200 x 35 cm,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2층에 놓인 신작 <또 다른 너>(2024)도 미생물이 공동 저자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미생물학 연구실과 협력한 작품으로 원형 미러 안에는 해파리와 산호 등 해양 생물에서 유래한 형광 단백질을 발현할 수 있도록 유전자가 조작된 대장균이 자라고 있다. 연한 녹색을 띠는 대장균은 합성 생물학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미생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전적으로 해양 생물의 유전자를 지녔으니 해양생물의 친족이기도 하다.

바다를 기반으로 한 고대 친족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친족과 혈통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관객이 작품을 바라보는 동안 비인간과 생명체, 지구 환경, 생명 공학 등을 고찰해 보기를 제안한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듯한 인피니티 미러 형태를 작품에 적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않을까?

디지털 협업자 그리고 조향사와의 협업

아니카 이, 《또 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2024. © 아니카 이.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사진: 안드레아 로세티

신작 영상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2024)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작품으로 꼽힌다. ‘작가의 사후에도 작업이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작업으로 죽음 이후를 탐구하는 아니카 이의 대규모 프로젝트 <공(公)>에 속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지난 10여 년간 아니카 이 스튜디오가 생산한 작업물을 데이터로 삼는 소프트웨어 ‘공(公)’은 스튜디오의 디지털 쌍둥이로 기능한다. 시뮬레이션과 머신 러닝을 통해 작가가 선보여 온 작품을 살아있는 가상 생물로 재해석했다.

소프트웨어 이름인 ‘공’은 불교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았다. 작가는 3차원적 경험을 넘어서 인식을 높여 5차원에 해당하는 의식으로 이끌어주는 협업자로 ‘공’을 소개한다. 공동 연구와 협업을 바탕으로 한 아니카 이의 작품적 특성부터 그간의 작업을 기록하는 아키비스트,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는 스토리텔러로 관객을 맞이한다.

산호 가지는 달빛을 길어 올린다, 2024, 단채널 비디오, 16:04. 영상 스틸, 작가, 리움미술관 및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공 © 아니카 이 사진제공: 작가

한편 이번 전시의 여정 내내 함께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 바로 향이다. 아니카 이는 조향사 바나베 피용(Barnabe Fillion)과 함께 협업했다. 생물화된 기계, 고대의 수생 생물, 원시 환경에 대한 상상을 담아 전혀 다른 세계를 연상시키고자 했다고.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맡을 수 있던 향은 바다, 애니말릭, 플로럴, 감칠맛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시트러스와 강렬한 해조류가 조화를 이루고, 가솔린과 비 온 뒤 나는 흙냄새가 흩뿌려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심해와 외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등 복잡한 향이다.

향기 분자는 이러한 향을 인지하기 전에 이미 관객의 몸 안에 들어와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을 인지하기 전에 작품이 인식에 먼저 닿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리움미술관과 중국 UCCA 현대미술센터와 공동기획한 전시는 내년 3월 베이징 UCCA에서도 이어질 예정이다. 감각의 실험실이 된 리움미술관에서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묘미를 경험해 보길 권한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