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없이 가구를 만드는 디자이너, 발렌틴 로엘만
직관적 창작과 독창적 가치를 구현하다
컬렉터블 디자인 갤러리 디에디트(THE EDIT)에서 스위스 출신의 퍼니처 아티스트 발렌틴 로엘만(Valentin Loellmann)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스케치와 드로잉 없이 가구를 디자인해 온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하다면 놓치지 말자.
컬렉터블 디자인 갤러리 디에디트(THE EDIT)에서 스위스 바젤 출신의 퍼니처 아티스트 발렌틴 로엘만(Valentin Loellmann)의 개인전이 오는 10월 1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키친 작품을 선보인다. 목재, 황동, 스틸, 레진, 마블 등 이질적인 소재를 융합시켜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어 온 그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만끽할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갤러리 공간 내 키친 및 벤치 작품을 직접 설치했는데, 실제로 만져보고 앉아 볼 수 있다는 점도 전시의 특징이다.
스케치를 하지 않는 독창적인 창작 방식을 고수하는 발렌틴 로엘만. 그는 매 작품에 순간의 영감을 표현하는데, 이는 또 다른 작품에 영향을 주는 매개체가 된다. 하나의 계획 아래에 작품군이 존재하기 보다 연속적인 아이디어의 연결 고리로 존재하는 것. 개별적이지만 한곳에 각기 다른 작품을 두었을 때 마치 하나의 시리즈처럼 조화롭고 편안해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시가 시작된 9월 초, 서울을 찾은 작가를 만나 이번 전시의 준비 과정과 작품 세계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발렌틴 로엘만
스위스 바젤 출생.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미술 학교를 졸업했다. 2015년 스튜디오 발렌틴 로엘만을 설립해 독창적인 가구와 오브제를 선보여왔다. 특히 나무, 황동, 브라스, 스틸 등 서로 성격이 상이한 재료를 한 작품 안에서 융합하는 점이 특징이다. 2013년 PAD 파리에서 ‘최고의 모던 디자인 조각상’을, 2017년에는 PAD 런던 ‘최고의 컨템퍼러리 디자인 오브젝트’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디에디트에서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주방(Kitchen)’을 위한 작품들을 대거 선보이는데요. 작품에 앞서 이 공간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하더군요.
저에게 주방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집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상황의 중심, 사회의 중심 등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중심점이 될 수 있는 곳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공간이죠.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흥미로운 연구 주제이기도 한데요. 저는 작품을 가구라고 부르기 보다 ‘상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한 가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환경이 되기 때문이죠. 이처럼 이번 전시에서는 주방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이를 새로운 형태의 가구로 만들어 이 공간을 둘러싼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이번에 소개한 작품들 역시 스케치나 드로잉을 하지 않고 만든 것이겠죠? 직관적인 디자인을 중요시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스케치는 하지 않아요. 필요 없으니까요. 직관과 감정을 바탕으로 작업하죠. 이는 제 손을 통해 도구나 기계 그리고 재료로 이어지는데요. 제가 스케치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경우는 다른 이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할 때뿐입니다. 가끔씩 건축 프로젝트나 특정 장소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스케치를 필요로 하기도 해요. 외부 환경 요소를 다뤄야 하고, 치수를 재야하기 때문이죠. 반면 개인 작업 안에서는 여전히 스케치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직관적인 것을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기도 하고, 제가 추구하는 방식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예술가라고 들었어요. 직관적인 감각을 기를 수 있었던 건 환경적인 영향도 없진 않아 보여요.
지금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은 어린 시절로부터 받은 영향일 수 있어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랐거든요.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 모두 예술가 셨어요. 두 분 모두 사고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저에게 어떠한 틀을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 하는 식의 것들 말이에요. 사회를 처음 접한 건 학교를 가면서부터 였는데요. 이전까지는 저만의 세계에 살면서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거죠.
학교에 진학해서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어요. 제가 속하지 않는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죠. 그래도 학교에서 배운 게 있다면 제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 방법인데요. 영감, 교육, 동기 부여로 가득한 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법을 학교가 가르쳐 줬다고 생각해요. 그때 ‘나는 나만의 길을 찾으면 된다’라는 걸 깨달았죠.
한편 스케치나 드로잉을 하는 건 아이디어를 저장하는 행위이기도 하잖아요. 순간적인 영감을 얻을 때면 이는 어떻게 기억해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기억력이 나쁘지 않네요.(웃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시작해요.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아요. 동시에 무언가 시작하면 그것을 끝내고 싶어 하죠. 여기서 말하는 ‘끝내다’라는 건 단순히 끝맺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일을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그 일을 돌이켜 봤을 때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거죠.
퍼니처 아트에서는 기능성과 심미성, 두 가지 요소의 비중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달라지곤 하잖아요. 무엇에 무게를 두고 작업하는 편이세요?
모든 것은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기능적일 수 있다고 봐요. 요리에 편안함을 느낀다면 무엇이든 주방 가구가 될 수 있죠. 하지만 기술적으로 기능적인 주방을 만드는 건 제 일이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일도 아니고요. 오히려 주방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거나 동기 부여를 하고 싶죠.
작품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죠. 나무와 함께 황동, 스틸, 레진, 마블 등 상반되는 성격의 소재를 결합하는 점이 인상적인데요. 최근 눈여겨보는 소재도 있을까요?
글쎄요. 저는 재료 자체에 크게 흥미를 느끼진 않아요. 대신 호기심을 갖긴 하죠. 물론 재료 자체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고요. 이 재료로 어떤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요. 재료의 촉감뿐만 아니라 어떻게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지 고민도 되고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맞는 재료를 찾는 셈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재료는 ‘진짜’ 재료만 사용해요. 나무 무늬 필름이나 합성된 재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소재를 한 작품 안에 결합할 때 주의하는 점이 있다면요?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이죠. 저는 결합되지 않을 것 같은 두 재료를 한 작품에 함께 구성하는데요. 조화롭게 보일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해요. 제 작품에서 균형의 중요성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죠.
컬렉터블 디자인 피스의 특성상 소수로만 작품을 제작하잖아요. 대량생산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도 궁금했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 철학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법 하잖아요.
지금 다루는 작품의 방식이 흥미롭지만 동시에 문제처럼 다가올 때도 있어요. 한 작품, 한 사람을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로 하는 반면, 대량 생산 디자인 작품은 수백, 수천만 명을 위한 디자인 제품이 기계에서 자동으로 나오잖아요. 컬렉터블 피스와 대량 생산, 두 가지 제작 방식에서 고민이 될 때도 있지만 지금과 달리 작업할 순 없어요. 제 작품은 현재의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대신 대량 생산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작품 제작 방식도 불가능했지 싶어요. 모든 것은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거든요.
예를 들어, 누군가 제 테이블 디자인을 가져다가 대량 생산 방식으로 찍어낸다고 해도, 그런 일로 제가 공격받는다는 느낌은 못 받을 것 같아요. 대량 생산이 할 수 있는 건 껍데기를 흉내 내는 것뿐이니까요. 겉모습은 같을 수 있어도 영혼은 없지 않을까요? 원작은 단 하나 분이고, 그 한 작품은 제가 앞서 이야기 한 모든 과정에서의 노력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고 봐요.
직접 경험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물리적인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경험은 제 작품이 지향하는 바와 맞닿아 있어요. 단순해 보이는 테이블을 만들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층이 숨어 있거든요. 표면적으로 ‘이 테이블이 아름다워 보인다’에서 그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경험의 영역이 숨어 있죠. 가구, 인테리어, 건축물 모두 아름답고 화려할 수 있지만 경험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는 겉모습은 멋져도 평면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죠. 물론, 경험의 깊이가 축적된 작품이 모두의 취향은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경험을 원하지 않고 감흥 없는 것을 필요로 하기도 하거든요.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인 거죠. 하지만 제 작업은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과 상호작용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디자인도 있는지 궁금하네요.
어렵게 들릴 수 있겠지만 ‘무(無)’를 창조하는 것이 제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해요. 어떤 에너지만이 존재하고, 이를 둘러싼 껍데기를 벗겨내는 거죠. 무언가를 만들되,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담지 않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