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헌 개인전 〈고립여행〉

회화, 사진, 드로잉, 설치, 글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현재 삶의 위치를 물어온 배종헌 작가의 개인전 〈고립여행〉이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렸다. 2021년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에 거주하며 제작한 작품을 중심으로 근작을 소개한다.

배종헌 개인전 〈고립여행〉
작가의 골목 산책길을 형상화한 ‘고립만리’와 그 끝에 배치한 대형 회화 작품 ‘완벽산방누연폭도’.

이 시대 자연과 일상의 은밀한 여행지

“모두가 힘들고 여전히 어려운 팬데믹이란 상황에 찰나 같았던 여행이 만들어준 자기 성찰의 시간이 이곳에 있다. 이동과 만남의 부자유는 불편하고 슬픈 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발아래 깨져 있는 시멘트 바닥, 그 틈에 뿌리 내린 아스라한 풀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배종헌 작가가 일상이 된 거리두기와 강제 격리 상황 아래 비현실 같은 현실, 격리된 일상과 유목적 삶의 괴리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 2020년 〈격리구곡〉전 이후 약 2년 반 만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연을 넘어선 자연을 비롯해 창작을 향한 의지, 삶의 가치를 고민한 작품을 선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정세에 무력감을 느끼는 대신 자기 성찰에 집중하자고 말하는 것. 그래서 작가는 너무나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풍경을 알아차릴 때 오는 생경함을 그러모으듯 늘 그곳에 있던 당연함을 화면 위 특별함으로 옮겨냈다. 평면 작업의 경우 주로 목판에 유채로 표현하는데 울트라마린 블루 물감을 칠한 목판을 긁어내 아래에 있는 구릿빛을 드러내는 기법이 특징이다.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의 경험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층 넓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2021년 7월부터 9월까지 스코틀랜드의 고즈넉한 시골 마을인 더프타운에 거주하며 그곳의 풍경과 위스키 증류소란 이국적인 공간을 경험하고 다른 문화권의 여러 작가와 교류했다. 특히 근거지인 대구와 여행지인 더프타운의 풍경과 문화·환경적 차이가 만든 예민한 감각은 일상을 더욱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힘을 만들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조명한 ‘사슴계곡은 어디인가요?_#AB554DH Glenfiddich Distillery_돌과 미장이의 흙손질로 된 팀파눔’, 돌담의 돌에서 발견한 산수의 형상을 담아낸 ‘사슴에게 길을 물어 向鹿問路_R90_ #AB554GH Castle Villa_건물 외벽의 어떤 돌’, 대구로 돌아와 매일 걸은 골목길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 작업 ‘고립만리Isolation Travelogue’를 보면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여리고 대수롭지 않은 일상에 오래 머물렀는지를 느낄 수 있다. 이 시대 자연과 일상이란 무엇인지를 묻기에 알맞은 은밀한 여행지다. 전시는 1월 6일부터 2월 12일까지 열린다.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는 위스키 브랜드 글렌피딕이 예술가를 응원하고 예술 발전을 후원하기 위해 진행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글렌피딕 증류소 인근 스튜디오에서 작품 활동을 할 기회를 제공한다.

Interview with 배종헌 작가

작가 배종헌



“우리가 상실한 순수한 미적 태도와 삶의 가치를 예술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글렌피딕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에서의 시간이 어떤 감각을 만들었나?
초자연을 만난 것 같다. 자연이 아닌 초자연인 이유는 나에게 자연이란 이미 파괴되어 인공화된 모습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에서 보낸 시간은 잊고 있던 초자연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작가 활동 중 첫 레지던스였다고.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나?
나는 위스키 증류소 입구가 잘 보이는 스튜디오에 머물렀는데 매일 이른 새벽이면 거대한 트럭이 와서 보리를 옮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윽고 증류소의 열린 문으로 새어 나온 맥아 발효 향이 온 길목에 찾아들 때면 그 향기에 취해 한참을 누워 있다가 뒤뜰로 나가 아름다운 꽃과 새가 반기는 아침을 맞이했다. 증류소 주변에는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건물들이 있었고 그 사이를 걷는 게 좋았다. 이러한 환경은 나의 오랜 관심사인 장소성에 대한 생각을 깊게 만들어줬다. 콘크리트, 시멘트 아래의 자연 형상을 유추하는 내 작업에 중요한 상상력과 감각을 깨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스튜디오를 벗어나 스코틀랜드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나는 늘 스튜디오를 지키며 ‘고립 여행’을 즐겼다.

‘고립만리’(2021~2022) 일부.
(왼쪽부터) ‘천상의 고원_#AB554GH Castle Road Dufftown_고인 스코틀랜드 빗물과 반사로 비친 하늘’(2021~2022), ‘벤린니스산의 회상_ 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2022), ‘아무것도 하지 않은_콘크리트 정원’(2022).

대구로 돌아간 다음 새로운 발견을 얻었나?
주상 복합 아파트 건설 현장, 도시를 울리는 공사 소음 속에서도 스코틀랜드에서 경험한 초자연의 모습을 읽어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잿빛 시멘트 바닥을 걸으며 이곳의 자연이란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완벽산방누연폭도’는 내 눈에 비친 동네 어느 골목의 자연물을 기록한 것이다. 삐져나온 철근, 이끼, 매연 검댕이 묻어 얼룩덜룩한 시멘트 담장에서 초자연을 본 이야기다.

당신의 작업에서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가 상실한 순수한 미적 태도와 삶의 가치를 예술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누구의 보살핌 없이 시멘트 틈에 뿌리 내린 잡초가 잘 가꾼 정원의 화초보다 거룩하게 보이는 건 그 세계를 읽어내는 시도가 헛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술은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영혼의 위안이 되어야 한다.

2023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136년 전통의 프리미엄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피딕이 2002년부터 진행해온 사회 공헌 프로그램. 지금까지 160여 명의 아티스트를 발굴했다.

모집 기간 1월 25일~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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