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미술감독 이영주: 예능 프로그램의 서바이벌과 어드벤처를 디자인하다
이영주 아츠 대표·미술감독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완벽한 조리 시설로 백종원을 감탄시킨 사람, 정종연 PD와 함께 어드벤처 추리 예능을 만들어 가는 사람. 연극과 뮤지컬, 콘서트,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과 미술이 결합한 독창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미술감독 이영주다.
[Creator+]는 Design+의 스페셜 시리즈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프로젝트에 크리에이터의 일과 삶의 경로, 태도와 방식을 더해 소개합니다. 인물을 조명하는 1편과 프로젝트를 A to Z로 풀어내는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주로 발행됩니다. [Creator+]는 동시대 주목할만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한 ‘오!크리에이터’를 잇는 두 번째 크리에이터 기획입니다.
editor’s note
이영주는 프로덕션 디자인 회사 아츠(ATTS)의 대표이자 미술감독입니다. 지난 몇 달간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군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의 미술감독으로, 모두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 물과 불의 문제를 해결한 주역이죠. 그보다 3개월 앞서 공개된 〈미스터리 수사단〉은 독특한 장르와 게임이 결합된 어드벤처 추리 예능으로 사랑받았습니다. 치밀한 스토리를 탄탄하게 받쳐주던 공간 또한 이영주 미술감독의 손에서 완성됐어요. 〈소사이어티 게임〉, 〈데블스 플랜〉, 〈피지컬:100 – 언더그라운드〉 등 ‘역대급 규모’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 속 미술감독의 자리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있었고요.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어느 하나 평범하지 않은 세계관을 그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공간으로 구현해내는 사람이요. 공연과 방송을 넘나들며 영역을 확장해온 24년 차 미술감독. 누구보다 유연하게 분야를 바꾸고 경계를 허물며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영주 미술감독을 만나 지난 여정과 작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PLUS 1. 〈흑백요리사〉의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
요즘에는 어떤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사실 작업실에서 뵙고 싶었는데, 연락 드렸을 때 준비하는 프로그램의 자료들 때문에 사진 촬영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어요.
얼마 전 〈데블스 플랜 시즌 2〉 촬영이 끝났고, 지금은 〈피지컬 100 시즌 3〉 작업을 하고 있어요. 컨셉 방향은 정해졌고 미션 별 세트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구체화하는 단계예요.
올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이잖아요. 〈흑백요리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요?
작년 8월경 〈피지컬 100 – 언더그라운드〉 촬영 중일 때 처음 연락을 받았어요. 김학민 PD님과 김은지 PD님, 두 메인 PD님과는 첫 작업이에요. 9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회의하면서 자료 조사와 컨셉 작업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촬영은 1월 말부터 두 달 동안 진행됐어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미술감독이 하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작품의 기획 의도에 따라서 비주얼 컨셉을 잡고 그에 따라 공간과 소품의 디자인 설계를 하는데, 예능에서는 무대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요소가 많이 활용돼요. 트러스 구조물이나 리프트 같은 특수효과 장치들도 반영하면서 디자인 설계를 하고, 각 담당자와 협의하며 예산도 조율하고 구현 가능성을 타진하며 구체화하죠. 세트 전반에 대한 것들이 최종적으로 결정되면 업체에 발주하고, 제작 과정과 세팅 과정을 감리하고요. 그다음 테크니컬 리허설과 시뮬레이션, 조명과 카메라 리허설 후 본 촬영에 들어갑니다. 예전에는 고정된 세트에서 촬영하는 예능이 일반적이었다면 요즘은 미션이 주어지는 서바이벌도 많고 세트마다 신경 써야 하는 디테일이 있어 촬영 기간에는 주로 현장에 있는 것 같아요.
〈흑백요리사〉의 비주얼 컨셉은 어떻게 잡았나요?
서바이벌이다 보니 미션마다 세트의 구성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것들을 한 공간에 품어야 했어요. 모든 세트를 받쳐줄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시드뱅크(Seed Bank)에서 착안해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한 ‘푸드뱅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공간을 설정했습니다. 그렇게 구조와 콘크리트 질감의 벽체 디자인이 결정되었어요. 회색 시멘트를 마감재로 선택한 이유는 우선 흑백의 셰프복과 겹치지 않으면서 다채로운 요리를 잘 보여주는 컬러여야 했기 때문이에요.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3〉를 담당했을 때도 그랬지만, 요리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요리니까요. 또 화기를 다루는 세트장에서는 안전사고에 대한 대책이 굉장히 중요해요. 세트 제작은 대부분 목재를 활용하는데 방염 합판을 쓰기도 하고 설치 후 방염 처리를 한 번 더 하기도 하지만 숯에서 튄 불꽃이 세트에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해 합판 위에 시멘트로 미장을 한 거죠. 화재에 조금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맡은 프로그램들을 보면 출연자들의 첫 반응이 항상 재밌는데, 이번에는 “놀이터 좋다!”며 외치는 셰프님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설비 부분에 대한 우려도 많이 들으셨다고요.
40명이 경연할 때의 조리대 배치가 제일 중요하고 또 초반에 결정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어요. 조리대의 사이즈와 구도가 나와야 메인 키친의 에어리어가 확정되니까요. 요리 프로그램은 대체로 정면을 바라보고 서는 구도인데, 40명을 그렇게 세울 수는 없죠. 그 구도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연출진과도 회의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구도의 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야 하잖아요. 여러 테스트를 해본 결과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교차하는 형태가 되었어요. 그런데 구도가 복잡할수록 설비가 어려워지거든요. (웃음) 지면에서 바닥을 띄워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상하수도와 가스 배관이 되는 건데, 조리대 40개가 지그재그로 놓이면 배관도 다르게 놓여야 하잖아요. 다음 라운드에는 조리대 배치가 11자로 바뀌고, 그다음 라운드는 또 다른 형태가 되고요. 큰 줄기에서 시작해 배관이 뻗어 나가는 것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설비 구조를 고려하며 미션마다 조리대 배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실제 푸드 전용 스튜디오로 만들어진 시설에서도 요리 프로그램을 해봤고 가설 설치한 스튜디오에서도 해봤잖아요. 결국 숫자의 문제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히 공들인 세트가 있을까요?
다 신경을 써서 어떤 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웃음) 미션만 봤을 때는 ‘재료의 방’의 수조인 것 같아요. 원래는 그것보다 훨씬 큰 아쿠아리움 규모의 수조를 계획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라운드와 라운드 사이의 열흘 동안 이전 세트를 해체하고 새로운 세트를 설치해야 하잖아요. 예산, 시간, 안전 등 여러 이유로 규모가 작아졌죠. 그럼에도 방수 처리를 하며 물의 하중을 버티게 하기 위해 하부 구조를 보강하는 것, 수압을 견디는 수조를 조립형으로 제작하는 것 등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아까 좋아하는 책으로 〈설국열차〉를 꼽아 주셨는데, 〈흑백요리사〉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고 계급에 따라 공간이 나뉘어져 있고요.
사실 굉장한 의도를 갖고 공간을 나눈 건 아니었어요.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 3〉 때도 그랬는데, 2층에 갤러리가 있었어요. 합격자들이 어디선가 현장을 봐야 하는데 레벨 차이가 없으면 요리는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계급 간의 수직 구도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PLUS 2. 공연장에서 방송국까지
대학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하고 미술감독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요. 미술감독을 꿈꾸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중학교 때부터 연극이나 뮤지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공연을 열심히 보러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연기자나 제작자로 공연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했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고 무대 미술이 하고 싶어졌죠. 그때 활동하는 무대미술가분들을 보니 대부분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나중에 무대 미술을 공부해 일을 하시더군요. 당시 우리나라 대학에 무대미술과가 없기도 했고요. 미술을 전공한 다음 무대 미술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술을 시작했어요. 회화과나 조소과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디자인 계열 중에서 설치 미술 작업이 많은 섬유미술을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대학에 다닐 때는 전공 공부도 하고 ‘홍익극연구회’라는 연극 동아리에서 연기도 하고, 기획과 무대 미술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해에 목표했던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에 무대미술과가 없어졌거든요. 졸업 후에는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무대예술아카데미에서 2년 동안 공연 분야의 무대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그때 만나 뵈었던 교수님들 밑에서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고, 무대감독 공부도 필요할 것 같아서 극장에서 무대감독 인턴십을 하며 연극, 뮤지컬, 오페라, 무용, 콘서트까지, 공연계에서만 2~3년간 일했던 것 같아요.
방송 미술에도 관심이 있으셨나요?
20대 무대 미술을 하는 친구들에겐 뮤직비디오나 CF의 기회가 많이 와요. 그렇게 여러 작업을 병행하며 프리랜서 미술감독과 세트 디자이너, 무대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MBC 출신 미술감독님들이 차린 비주얼 스토리 공장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 민언옥 미술감독님의 드라마 〈궁〉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는데, 〈궁〉이 당시 드라마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작품이잖아요. 그렇게 방송 미술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이후로 MBC 미술센터에 들어가서 계속 드라마나 예능, 쇼 같은 방송 작업을 하게 됐죠.
MBC 미술센터에 속해 계셨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100분 토론〉부터 〈쇼! 음악중심〉과 〈무한도전〉, 〈이산〉과 〈선덕여왕〉 등 시사교양국과 예능국, 드라마국을 모두 아우르며 작업하셨더라고요.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방송국마다 예능이나 쇼만 하는 팀, 드라마만 하는 팀으로 미술팀이 나뉜 곳도 있는데 MBC는 모든 디자이너나 미술감독이 장르 상관없이 작업하는 곳이었어요. 성향 차이인 것 같은데, 그게 좋았어요. 대학에 다닐 때도 무대 미술이 하고 싶어서 섬유미술과에 들어갔지만 설치 미술도 재밌고 인테리어도 재밌고 패션도 재밌어서 졸업할 때 고민을 좀 했거든요. 어느 진로를 선택해서 첫 직업을 가질까, 하고요. 그것처럼 방송국에 들어가 회사원으로서 주어지는 일들을 하다 보니까 다 좋은 거예요. 저는 장르에 따라 재미가 있고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냥 그 작품이 좋으면 재밌었던 것 같아요. (웃음)
여러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한 정종연 PD님과는 어떤 인연인가요?
정종연 PD님도 CJ ENM 소속이었고 저도 소속 디자이너였잖아요. PD님들이 기획을 하고 제작에 들어간다고 하면 스태프 구성을 하는데, 대부분 각 부서에서 배정을 받아요. 정종연 PD님은 저를 배정받으신 거죠. (웃음) 그런데 MBC에서도 그렇고, 새로운 기획으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에 배정을 많이 받는 편이었어요.
현장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베테랑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유학은 대학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원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가고 싶었는데, 아카데미에 가고 일을 하게 되면서 계속 미룬 거였죠. CJ ENM에서 다양한 기술을 직접 적용해 보며 앞으로의 길을 생각했을 때 배움이 더 필요할 것 같았어요. 일에서 살짝 떨어져 저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돌아볼 시간도 필요했고요. 학교에서는 컨셉을 잡기까지 이것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하나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찾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그건 텍스트가 될 수도 있고,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도,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요. 어느 단계가 되면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그 대답을 내가 나에게 하지 못하면 안 되는 순간이 와요. 꼭 필요한 공부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츠를 설립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계속 회사에 다니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웃음) 유학을 다녀와서 회사에 들어가 1년 정도 지났을 때 정종연 PD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당시 정종연 PD님은 TEO로 이적한 때였고, 시기가 잘 맞아 함께 〈데블스 플랜〉을 하기로 했죠. 그런데 회사에 소속된 상태에서 그 작품을 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서 급하게 회사를 만들게 된 거예요.
‘아츠(ATTS)’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Art, Technology, Time, Space’의 약자예요. 대체로 미술팀의 이름은 A&T나 T&A, 이렇게 아트와 테크가 붙어요. 그런데 아트와 테크가 들어가는 분야는 너무 많잖아요. 그것이 저희가 하는 일을 딱 설명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당연히 공간이 들어가야 하죠. 그리고 시간이 부여돼요. 지금 내가 만든 이 공간이 어느 시점의 공간일까, 시간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서 저는 예능에서도 시점을 정하는 것 같아요. 〈데블스 플랜〉에서 세트팀에 설명할 때도 여기는 100년 넘은 발전소를 개조한 공간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웃음)
PLUS 3. 집요함이 빚어내는 세계, 어드벤처 예능의 리얼리티
영화와 드라마, 예능, 쇼와 시상식의 미술은 무엇이 다른가요?
이 작품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지가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라이브 같은 경우에는 관객이 현장에서 직접 보는 거잖아요. 그때 필요한 기능적인 요소들을 반영해서 디자인해야 하는 거고요. 방송 같은 경우에는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을 편집해서 송출하는 거죠. 그러면 카메라가 어떻게 찍는지 고려해야 하고요. 전자가 연극, 오페라, 뮤지컬 같은 공연이라고 하면 후자는 드라마나 영화가 되겠죠. 그 중간에 있는 게 예능이나 ‘마마 어워즈(MAMA Awards)’ 같은 시상식이 될 것 같아요. 촬영도 하는데 라이브로 체험하는 출연진이나 관객도 있는 거예요.
예능 프로그램 중에는 오컬트, SF, 크리처 등 장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은 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게임과 미션도 소품의 일부가 되고요.
우선은 다양한 장르를 좋아하고, 특정한 어떤 장르도 싫어하지 않아서 가능한 것 같아요. 〈미스터리 수사단〉의 ‘심해 속으로’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 저도 잠수함을 만들어본 적은 없으니까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잠수함에 대해 리서치하며 공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잠수함이 이중 선체 구조로 되어있고 물이 반쯤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어떠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무관심하거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서 즐겁게 공부하며 하고 있어요.
게임 자체의 난도는 〈데블스 플랜〉이 높았죠. 그래서 어떤 게임이고 어떻게 조작하는지, 예를 들어 물이 묻거나 힘이 가해지는지, 전환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PD님한테 많이 물어보는 편이에요. 〈피지컬 100 – 언더그라운드〉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몇 명이 들어야 하는가, 얼마큼 이동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설계 과정에서 이를 안전하게 구현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테스트도 굉장히 많이 하고요. NG는 무조건 나면 안 되니까요. 〈미스터리 수사단〉도 그랬어요.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카메라 수백 대로 6시간 정도를 끊지 않고 촬영하는 프로그램이어서 소품도 만반의 준비를 하죠.
다양한 세계관을 현실감 있게 구현하는 것이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의 리얼리즘이 사실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이거 예능 세트 같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 공간이나 사실처럼 만든 드라마 혹은 영화 세트장에서 촬영하면 다를까요? 크게 다르지 않아요. (웃음) 영화나 드라마는 캐릭터가 텍스트상에 존재하고 분석할 수 있어요. 캐릭터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공간을 만들면 되는데, 예능 세트의 경우에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출연진은 텍스트상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잖아요. 실제 인물이 세트장에 들어오면, 세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어려워요.
그럴 때 감독님은 어떻게 하나요?
우선 제가 자주 여쭤보는 건, 출연진이 어떤 의상을 입고 올 것인가예요. 대부분 그날그날 스타일링이 달라지는데요. 그것만 알아도 대략 예측이 돼요. 텍스트상의 캐릭터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실제 인물과 세트의 관계를 살피는 거예요. 그런 연구를 많이 하고, 타이틀이나 로고 등 예능에서만 쓸 수 있는 요소를 과하지 않게 표현하면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해요. 〈미스터리 수사단〉의 잠수함 같은 경우는 실제 잠수함과는 형태가 조금 달라요. 연출 구성에 필요한 구조와 크기를 선택한 건데, 우리가 잠수함 안이라고 얘기하고 있을 때 시청자도 ‘그래, 잠수함이라고 생각해 줄게’는 되어야 하잖아요. (웃음) 그렇게 만드는 지점을 찾는 게 미술감독이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요.
PLUS 4. 기능과 미감이 더해진 세트 디자인
다양한 분야의 미술을 맡아온 만큼 프로젝트를 선택하는 기준도 있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대답은, 제가 계속 방송국에 있었잖아요. 배정받은 프로그램에 대해 이거 안 하고 저거 할래요,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항상 그런 일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새로운 거, 안 해 봤던 거,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을 수밖에 없는 거요. 지금도 프로젝트를 하고 안 하는 데는 스케줄의 영향이 가장 커요. 촬영이 겹치게 되면 제가 두 군데에 다 관여할 수 없으니까요.
분야나 장르도 상관없을까요?
작품이 좋으면 상관없어요. 이쪽 일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굉장히 힘들어해요. 물리적인 시간도 많이 써야 하고, 밤을 새우거나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고요. 다녀야 하는 현장도 많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죠. 그러다보니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도 꽤 많아요. 그럼에도 저는 이 일이 제일 좋고 이 일을 계속할 건데, 그랬을 때 제가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그 노력과 시간의 가치를 느껴야 하니까. 그러려면 작품이 좋아야 하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웃음) 대중에게, 저와 가족, 친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거나 영감이나 어떠한 계기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이면 좋겠어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좋은 무대 미술, 방송 미술은 어떤 건가요?
작품이 갖는 컨셉을 비주얼로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과 구성상 필요한 기능적인 요소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 그리고 안전, 이 세 가지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능적이라는 것은 미션을 해결하거나 어떤 활동을 할 때 필요한 장치들, 출연자들의 동선뿐만 아니라 출연자 외에 이용할 수 있는 동선들, 촬영을 잘할 수 있게 만드는 환경과 전반에 대한 것들을 말하는 거예요. 어쨌든 이 일은 한계를 열어 놓고 작업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예산과 시간, 지금 이 시대에 구현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 등 모든 제약을 적용하면 그 안에서 다듬어지고 정교해지는 것 같아요.
새롭게 도전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저는 공연을 할 때는 공연만 하고, 방송을 할 때는 방송만 하던 시대를 지나 현재에 왔잖아요.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도 그렇고, 다른 공연이나 쇼도 그렇고, 많은 것들이 융복합되는 것 같아요. 전에는 각각이 종합 미술이었다면 지금은 그것들이 믹스되어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아서 그런 프로젝트들을 해보고 싶어요.
PLUS LIST
이영주 미술감독이 좋아하는 무대미술가와 쇼 3
- 박동우
- 에즈 데블린
- 〈슬립 노 모어〉
“우선 두 분의 무대미술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먼저 박동우 교수님입니다.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의 무대 미술을 담당하셨어요. 컨셉을 도출하는 것과 비주얼로 보여주는 것, 기술로 구현하는 것 모두 월등하게 잘하시고, 저에게는 좋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다른 한 명은 영국의 무대미술가인 에즈 데블린(Es Devlin)입니다. 최근 작업으로 라스베이거스 스피어의 U2 공연이 있어요. 에즈 데블린은 못 보던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마지막은 〈슬립 노 모어〉라는 작품이에요. 관객 체험형 연극이랄까요. 2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천재적인 것 같아요. 저도 여러 번 봤고요. (웃음) 〈맥베스〉를 재해석해서 4가지 스토리라인으로 만들고 호텔로 설정한 빌딩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어디에서 시작해 어떤 배우를 따라가는지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TIPPING POINT
이영주 미술감독과 대화를 마치고 그동안 공연장, 브라운관과 모니터 너머로 보았던 수많은 작품 뒤에 그가 있음을 알았다. 어떤 작품이든 자신의 색깔이 강하게 묻어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카멜레온처럼 작품의 색깔에 맞춰 변하는 사람도 있다. 이영주 미술감독은 후자에 가깝다. 시대물은 시대물답고 쇼는 쇼다운 것이 그가 생각하는 무대 미술, 방송 미술의 미덕이다. “항상 촬영 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 보는 편이었어요. 이렇게 했더니 촬영 감독님은 이게 불편하네, 교과서에서 볼 수 없지만 디자인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죠.” 그리고 다양한 현장에서 축적된 성실한 경험,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는 더욱더 근사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의 손길이 닿은 무대와 방송은 언제나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