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박시영의 A to Z: 영화 포스터부터 인공지능 프로덕션까지

박시영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스튜디오 빛나는 대표

박시영 디자이너는 감당할 건 감당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업계를 향한 쓴소리를 내뱉는 것에도 거침이 없다. 그런 걸 보면 오랜 시간 스튜디오 '빛나는'이 최고의 선택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디자이너, 대표, 그리고 선배 박시영이 있기까지, 생각의 조각을 만나보자.

[Creator+] 박시영의 A to Z: 영화 포스터부터 인공지능 프로덕션까지

박시영 디자이너는 경험 예찬론자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죠. 이는 2006년 스튜디오 빛나는을 설립해 지금까지 창작자로 활동해 오고 있는 그가 강조하는 창작자의 태도이기도 한데요. 구미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고흥으로 두 여정 속에서 그를 이룬 크고 작은 파편을 모았습니다. A부터 Z까지 키워드로 만나보시죠.

프로젝트 A to Z

Artificial Intelligence
A

박시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모습 (사진 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인공지능은 박시영 디자이너가 최근 가장 관심 있는 주제다. 그런 점에서 지난 7월 4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 제28회 부천국제판스틱영화제는 그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 8회 행사 이후 무려 20년 만에 행사 공식 포스터 디자인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특히 국내에서 개최하는 국제영화제 중 최초로 ‘AI 영화 국제 경쟁 부문’을 도입한 행사였다는 사실은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터. 이는 박시영 디자이너가 선보인 공식 포스터 디자인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전과 현대의 시간을 넘나드는 기물을 뒤섞어 생성형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이터를 표현했다.

이외에도 그는 개인 작업에도 열심이다. 단순히 디자인 뿐만 아니라 회화와 시나리오 등 포스터를 위한 그래픽 디자인 매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특히 최근에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새로운 프로덕션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Bitnaneun
B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은 2006년 박시영 디자이너가 설립한 영화 제작물 중심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다. 이름은 그가 참여한 독립 영화 빛나는 거짓(2004)에서 가져왔다. 그는 그보다 앞선 2년 전 그는 영화 짝패로 상업 영화에 데뷔했고, 동시에 제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파격적인 포스터로 신에서 주목받았다. 혼자서도 잘하는 디자이너가 스튜디오를 차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스튜디오 빛나는은 내년이면 20주년을 맞이한다.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서울과 고흥 그리고 그 외 지역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지금처럼 들어오는 프로젝트 하나씩 때우듯이 일을 하면 먹고 살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건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스튜디오를 설립한 건 진지하게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가져가겠다는 하나의 결심이자 다짐이었죠.” 

한편, 박시영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개인으로 설득할 수 있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스튜디오 대표로 프로젝트에 임할 때 발언권의 무게가 새삼 달라져요. 저 혼자 들어가는 회의랑 대표로서 직원들과 함께 들어가는 회의는 분위기와 밀도가 다르죠.” 

스튜디오 설립 초기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영업이 가능한 기획자만 다섯 명을 뽑았다. 지연도, 학연도 없던 그가 상업 영화부터 독립 영화계까지 가리지 않고 클라이언트 잡을 끌어올 수 있던 비결이다. 

Captain
C

박시영 디자이너의 꿈은 선장이다. 전남 고흥에서 지내는 그는 일주일에 세 번 보조 선장으로 선장님에게 뱃일을 배운다. 수영도 못하고, 낚시도 그다 좋아하지 않았지만, 선장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바다 쓰레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심각성을 체감했다고.

“해안가로 밀려오는 쓰레기를 보니까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어요. 떠밀려오기전에 바다에서 이걸 어떻게 처리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일단 배를 배워야겠다 싶었죠. 시작은 그렇게 된 건데 쓰레기뿐만 아니라 선장이 되면 좋은 점이 꽤 많더라고요. 무인도까지 배를 몰고 갈 수 있으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크게 음악도 듣고, 태닝도 하고, 심지어 이제는 낚시하는 것도 좋아해요.”

Designer
D

“디자인은 이제 사람들의 눈길을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됐죠” 그는 과거와 달리 영화 관계자들이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세대가 바뀌었다고. 시각 문화를 향유해 온 세대가 실무자로 올라오면서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당연히 디자이너로서는 이야기가 나누기가 훨씬 편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또 다른 어려움도 생겼다고 토로한다.

인터뷰 중인 박시영 디자이너

“전에는 디자인을 아예 모르는 사람을 설득했다면, 지금은 잘못된 정보인지도 모르고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상대해야죠. 예컨대 ‘포스터 디자인은 이래야 해요’라고 미리 말하고 그걸 벗어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상황이라 디자이너 입장에서 난감할 때가 꽤 있어요.”

E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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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는 박시영 디자이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산업 단지가 조성되던 구미로 이사해 서울에 오기 전까지 지냈다. SNS에 그는 구미에서 서울로의 여정을 ‘탈출’이라고 표현했다.

“집안 환경이 안 좋았어요. 매일 보는 풍경이 유흥 업소 오가는 손님들, 감옥을 밥 먹듯이 수시로 드나드는 동네 형들… 쉽게 말해 10대 아이가 자라면 안 되는 곳이었어요. 그때는 내 앞에 놓인 인생의 궤도가 너무 뻔히 보이더라고요. 서울로 가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어요. 구미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죠.”

박시영 디자이너는 구미에서 서울로의 여정을 ‘탈출’, 서울에서 고흥으로의 여정을 ‘이탈’이라고 SNS에 남겼다. 자기 삶의 무대를 스스로 개척하는 모습은 업계 후배들에게 인생 선배로 존중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18살이 되던 해 박시영 디자이너는 구미를 떠났다. 당시 그는 가장 먼저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어서 무일푼으로 서울에 온 탓에 공포감도 들었다고. 처음 몇 달은 서울역과 버스 터미널을 오가며 지냈고, 가스 배달일을 하면서 돈이 생기면 월세 15만 원 서울역 쪽방촌에 한 달씩 살 수 있었다. 박시영 디자이너는 당시를 생각하면 그래도 희망적이었다고 말한다.

“서울에서도 밑바닥에서 생활했죠. 어차피 밑바닥일 거면 구미가 아닌 서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저에게 이곳은 희망과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Playlist
P

박시영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로부터 프로젝트를 의뢰받으면 가장 먼저 애플 뮤직(Apple Music)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스스로가 음악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장르와 무드를 고려해 선별한다. 시나리오 일부를 보고 작업을 시작하는 업의 특성상 비슷한 장르의 작품이나 미묘하게 다른 어조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죄도시베테랑 2는 액션 장르이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디자이너로 작품마다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톤과 매너를 갖추는 방법인 셈. <베테랑 2> 포스터 디자인을 작업할 때 그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장기하와 신중현의 한국적이면서도 사이키델릭한 록 사운드의 음악을 들었다.

Ryu Seung-wan
R

영화 베테랑 2(2024)는 짝패(2004),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 이후 류승완 감독과 박시영 디자이너가 세 번째 만나는 작품이다. 그는 류승완 감독과 나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삼촌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맨땅에 헤딩하며 버텨온 자기를 알아봐 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긴말 안 해도,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설명하지 못할 애정이 있는 관계인 만큼 이번 작업에 대한 감회도 남달랐다고 말한다.

“이렇게까지 잘 될 줄 몰랐는데… (웃음) 영화를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만들어 온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사실은 조금 짠한 마음이었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여러 고생을 해서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분명 쉽지는 않았겠다 싶더라고요.” 

Seoul Art Cinema
S

서울아트시네마의 전신 ‘문화학교서울’은 박시영 디자이너가 디자인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된 곳이다. 한 번은 문화학교서울로 배달을 갔는데 그때 봤던 형과 누나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고 한다. 그가 이전까지 봐 온 사람의 유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상냥한 서울 말투와 예쁜 단어들, 그리고 패션. “형, 누나들이 옷을 정말 잘 입었어요. 당연히 따라 입었죠.” 

그 분위기가 좋아 문화학교서울을 자주 갔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는 풍경은 살면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라며 그는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당시의 만남은 오늘날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군대에서 배운 한글97 프로그램으로 포스터를 처음 제작했는데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니까 당연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디자인으로 처음 인정받았던 그 순간은 꼭 나도 모르게 숨겨 둔 유산을 발견한 느낌이었어요.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네? 라고 생각하니 돈을 버는 수단 그 이상으로 저라는 사람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이 디자인이었죠.”

Vacation
V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에는 오랜 전통이 있다. 바로 약 한 달의 장기 휴가가 바로 그것. 이는 자신을 포함해 함께 하는 디자이너들의 번 아웃을 방지하기 위한 것. 디자인 스튜디오는 개개인의 퍼포먼스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긴 휴식은 필수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디자이너마다 한 프로젝트를 잡고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긴 휴가를 가더라도 다른 이에게 업무가 전가되는 일은 없다고 한다.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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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저에게 콤플렉스에요”. 박시영 디자이너가 말하는 글과 글쓰기는 창작의 기본이다. 디자이너가 시각 자료를 이용하는 것과 달리 글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그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 경외감을 느낀다고 한다. 평소에도 시를 좋아하고, 시 읽기를 즐긴다는 박시영 디자이너의 시집을 언젠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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