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주어진 일에 그치지 않는 디자이너의 태도를 말하다
권준호·김경철·김어진 일상의실천 공동 대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은 디자인플러스의 디자인 파트너다. 지난 2024년 3월 론칭부터 최근 공개한 신규 서비스 업데이트까지 디자인과 개발을 주도했다. 이들은 디자인 파트너라면 없는 문제도 발견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어진 일에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디자인 스튜디오, 그 실천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Creator+]는 Design+의 스페셜 시리즈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프로젝트에 크리에이터의 일과 삶의 경로, 태도와 방식을 더해 소개합니다. 인물을 조명하는 1편과 프로젝트를 A to Z로 풀어내는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주로 발행됩니다. [Creator+]는 동시대 주목할만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한 ‘오!크리에이터’를 잇는 두 번째 크리에이터 기획입니다.
editor’s note
권준호, 김경철, 김어진 세 명의 디자이너가 이끄는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디자인플러스(Design+)의 디자인 파트너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지난 4월 론칭한 디자인플러스 웹사이트 개발과 디자인을 맡았죠. 최근에는 업데이트된 두 가지 서비스 ‘D.find‘와 ‘Young‘도 디자인했어요. 보통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는 프로젝트를 매개로 갑과 을로 묶이곤 했는데요. 이들은 “디자인 파트너라면 의뢰한 일에서 그치지 않고, 없던 문제도 발견해서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해요. 그만큼 디자이너의 주체성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이는 디자이너 또한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디자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일상의실천이 말하는 디자이너의 실천과 이를 위해 마주한 여러 갈래의 고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PLUS 1. 일상의실천, 디자인 파트너가 되다
2024년 4월호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일상의실천을 디자인플러스의 ‘디자인 파트너’라고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끌더군요. 디자인 파트너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과 달리 실제 사례는 많이 못 봤거든요.
권준호. 전근대적 인식에서 디자이너는 갑을 관계에 속해 있었어요. 갑이 요청하면 을은 수행하고, 갑이 피드백을 주면, 을은 다시 반영하는 등 일방향적인 관계였죠. 하지만 저희가 생각하는 파트너십은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에요. 오히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에 무언가를 해보자고 제안할 수 있는 관계인 거죠. 과거의 시선으로 본다면 디자이너의 월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디자인 파트너라면 갑을 관계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건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의뢰한 프로젝트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문제도 발견해서 제안하고 해결하는 주체가 되는 거죠.
김어진. 그래서인지 디자인플러스처럼 디자인 파트너가 되는 사례가 많지는 않아요. 가깝게 찾아보자면 일상의실천 이전부터 함께 일해 온 녹색연합과의 관계가 비슷할 수 있겠네요. 지금도 그렇지만 13년 전만 해도 비영리단체가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대게는 재능 기부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되곤 했죠. 처음에는 서로의 입장이 너무 달라서 충돌하는 지점이 많았어요. 서로가 원하는 걸 타협하고 절충안을 찾는 게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파트너십 관계일수록 서로를 알아가고 신뢰를 쌓는 과정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디자인플러스도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나아가고 있다고 보이죠.
디자인 파트너의 역량이 잘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현재 디자인플러스에 적용된 폰트 디자인이 아닐까 싶어요.
김경철. 맞아요. 디자인플러스는 산돌에서 지난 9월 30일에 출시한 ‘SD민부리’를 적용했는데요. 산돌에서 폰트를 출시하기 전에 저희에게 베타 테스트를 요청했어요. 마침, 디자인플러스가 오픈되어 있었고, 폰트를 적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테스트 베드(test bed)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자인플러스에는 디자인프레스와 월간 <디자인>이 제작해 온 콘텐츠를 모은 만큼 텍스트양이 정말 많았거든요. 더욱이 SD민부리는 UI·UX 디자이너들이 마주하는 문제와 고민을 보완하기 위해 출시된 웹 전용 폰트인데요. 디자인플러스 개발 범주에서 발생하는 디자인 오류를 잡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권준호. 디자인플러스 측에 의견을 물으니 흔쾌히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베타 테스트를 라이브 채널에서 시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거든요. 디자인 파트너였기에 이런 시도도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 파트너는 기존에 없던 문제도 먼저 발견하고, 제안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해요. 클라이언트에 의존하지 않고 디자이너로서의 주체성을 발휘해야 하죠.”
최근 디자인플러스가 두 가지 신규 서비스 ‘D.find’ 디자인 전문 회사를 찾는 검색 서비스 와 ‘Young’주목할 영 디자이너와 국내 디자인 학과의 졸업 전시 소개 서비스을 론칭했어요. 아티클 중심의 콘텐츠와 플랫폼의 외형을 공개한 지난 3월의 론칭 이후 업데이트가 된 셈인데요. 개발과 디자인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들도 궁금합니다.
김경철. 처음 기획 단계에서부터 서비스를 순차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계획이었어요. 이전까지 일상의실천이 디자인한 웹사이트는 딱 떨어지는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라 사실 그래픽 디자인의 작업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반면 디자인플러스는 세 번에 걸친 업데이트가 필요해서 무엇보다 ‘디자인 시스템’을 잘 구축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일종의 가이드인 셈인데요. 향후에 저희가 아닌 다른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작업을 하더라도 디자인플러스의 디자인 요소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디자인 시스템의 핵심이에요.
최근 업데이트를 보더라도 론칭 때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메뉴 구조와 기능이 추가됐잖아요. 특히 D.find 서비스에 있는 Specialist와 Focus 9 는 각각 분리된 페이지이지만 서로가 연결되어야 했고, 기존 아티클 콘텐츠와도 이어져야 했어요. 만일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았다면 일관된 디자인 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권준호. 디자인 영역에서는 웹사이트가 담고 있는 콘텐츠를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 주안점이었어요. 사실 저희가 해 온 작업의 면면을 보면 일상의실천이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표현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디자인플러스는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지향하는 플랫폼이잖아요. 단발적인 전시나 행사 웹사이트와는 결이 다르죠. 다수의 사용자가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을 우선순위에 두고 작업했습니다. 기능적인 면에서는 템플릿화 된 전형적인 한국 포털 디자인을 벗어나고자 했어요. 중요한 정보나 공지가 있다면 팝업 창을 띄우지 않고 메인 페이지에서 텍스트가 흘러가게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죠.
김경철. 콘텐츠의 가독성을 위한 기능 요소 개발에도 신경 썼어요. 단순히 글자의 가독성뿐만 아니라 내용과 맥락이 잘 읽힐 수 있도록 말이죠. 스크롤을 내리면서 글을 읽다 보면 상단 바에 다섯 가지 색상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택되어 인디케이터가 차오르는데요. 사용자에게 현재 콘텐츠 안에서 어떤 지점에 있다는 걸 보여주죠. 콘텐츠 페이지 내 오른쪽에 자리한 목차를 개별 클릭하면 해당 내용으로 넘어가도록 한 기능도 마찬가지예요.
한편으로는 일상의실천의 디자인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요.
권준호. 작업만 놓고 보면 기존의 프로젝트와 우선순위가 달랐으니까요. 다만, 사용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뒤에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디자이너가 있다는 걸 조금 더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더욱이 일상의실천이 웹사이트 개발과 디자인을 한다는 것을 여전히 낯설어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저희는 아이덴티티를 비롯한 그래픽 디자인과 웹사이트를 통합적으로 설계할 때 더 큰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디자인플러스는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시이고요.
PLUS 2. 회사와 공동체, 그 사이에서
일상의실천이 성장을 거듭한 만큼 책임져야 할 구성원도 늘었잖아요. 최근에는 어떤 고민을 하고 계세요?
권준호. ‘좋은 회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이 항상 있죠. 처음에 세 명이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서로의 개성은 달라도 지향점은 같았거든요. 당장의 수익보다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 또는 디자인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췄죠. 지금은 저희를 포함해 총 11명의 구성원이 각자의 몫을 해나가고 있잖아요. 저희 셋의 가치관을 이유로 ‘수익보다는 디자인’과 같은 스튜디오의 지향점을 주입할 순 없어요. 이는 구성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거든요. 따라서 커머셜 프로젝트와 비영리 프로젝트의 적절한 균형을 맞추며 운영하는 것에 고민이 많아요.
김어진. 애초에 저희 셋이 원하는 디자인 방향이 달랐던 만큼 다양성이야말로 일상의실천만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를 고려하면 구성원이 늘어나면서 서로의 디자인이 호환되고, 또 상호 간에 수용할 수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데요. 플레이어이자 디렉터로서 디자이너 각각이 지닌 개성과 잠재력을 어떻게 극대화할 수 있을지에 관해 고민이 많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디자이너로서 성장해 가는 근사한 그림이 좋을 것 같거든요.
김경철. 그간 일상의실천에는 개발도 할 줄 아는 디자이너인 친구들과 웹사이트를 만들어왔는데요. 최근에는 개발 직군을 채용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개발자라는 직책이 흔하지 않잖아요.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모인 공간이 어색하지 않도록 어떻게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상의실천은 ‘디자인’과 ‘개발’이라는 두 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디자인과 개발이 통합된 프로젝트 비중이 높아질수록 조직 구조의 장점이 드러난다면서요.
권준호.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서울드럼페스티벌>,<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처럼 그래픽 디자인과 웹사이트 개발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에서 빛을 발하죠. 대게는 디자인을 저희가 하더라도 개발은 외부 회사가 맡아서 할 텐데, 이때는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고, 진행 과정도 복잡해요. 지금처럼 내부에서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긴밀하고 속도감 있게 작업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죠.
한편, 구성원들의 프로젝트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해요.
권준호. 저희는 프로젝트 의뢰를 홈페이지에서 양식화해서 받고 있는데요. 이를 가지고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회의를 해요. 일차적으로는 디자이너 본인이 프로젝트 참여에 희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요. 디자인 공동체로서 일상의실천이 꼭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면 디렉터의 판단 아래 구성원 각자에게 배당되기도 하죠.
“디자인 스튜디오는 회사와 공동체 사이에 위치하는 조직의 형태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커머셜 프로젝트와 비영리 작업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건 자영업과도 다르지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프로젝트 수익은 디자이너의 지속가능성과도 맞닿아 있을 텐데요. 책임질 구성원이 생긴 만큼 적자를 보지 않기 위한 정량적 수치나 기준도 있나요?
김어진. 지난 몇 년간 규모에 대해 고민했던 것도 말씀하신 내용과 무관하지 않은데요. 사실 저는 처음에 조직 규모를 확장하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였어요. 우리의 디자인 경험을 축적하면서 다양한 시각 언어를 유지하고 싶었거든요. 감사하게도 10년을 넘게 일한 만큼 일상의실천을 찾아주시는 분들도 늘었는데요. 모든 수요를 맞추려면 사실 구성원 규모를 더 늘려야 해요. 하지만 규모를 키우고, 매출을 늘려서, 일상의실천이 성장하는 건 저희의 궁극적인 목적과는 부합하지 않아요.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가용 예산 규모가 달라요. 하지만 최근에는 디자인 비용의 간극이 많이 줄었거든요. 게다가 전시, 페스티벌 등의 프로젝트는 수의 계약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예산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죠. 즉, 정량적인 기준치를 저희가 어느 정도는 그릴 수 있게 된 거죠. 그런 점에서 저희 셋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어요. 일상의실천 구성원 모두가 지치지 않고,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일의 균형을 잡아야 하니까요.
한편, 일상의실천이 구성원으로 함께 하고 싶은 디자이너 상도 있을까요?
김어진. 기본적으로 본인 작업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 좋아요. 불필요한 보고 절차, 비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최소화하면서 저희가 확보하고자 하는 건 결국 작업을 위한 시간이거든요. 작업의 완성도가 부족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벨을 먼저 이야기하는 건 아쉬운 태도죠.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을 한 번이라도 더 붙잡고 매달려 볼 수 있는 자세, 그리고 업에 임하는 책임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김경철. 최근에는 수많은 툴이 개발되어 나오잖아요. 그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진다고 생각하는데요. 현실적으로 그 모든 걸 디자이너나 개발자가 익힐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새로운 걸 알아가고,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향의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결과물이 좋은 피드백을 받는 경우도 많고요.
PLUS 3.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무너뜨리다
일상의실천은 디자이너로서의 행보가 처음부터 남달랐어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병행했잖아요. 장르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을 텐데 어땠나요?
권준호. 지금과 달리 예술과 디자인이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었죠. 심지어 학부 시절에는 디자이너는 무조건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며 작품 활동은 예술가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럼에도 저희는 같이 학교에 다닐 때부터 디자이너 개인의 목소리를 담은 작업을 꾸준히 시도했는데요. 졸업 후 사회로 나오니까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게 아쉬웠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상의실천이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거죠.
저희가 민감한 사회 이슈를 향한 목소리를 담아내다 보니 이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는 우려가 있었는데 다행히 긍정적으로 바라봐주시는 분이 많았어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작품을 선보이면서 일상의실천이라는 디자인 스튜디오의 존재도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외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면서 무언가를 만든다는 일이 실천이라는 단어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여겼어요.
세 명의 디자이너가 함께한 첫 작업도 기억하세요?
권준호. 그럼요. <나랑 상관없잖아>라는 제목의 작업인데요. 2013년에 저희 셋이 활동하기로 하고서 했던 첫 작업이에요. 한국 타이포그라피학회 회원전에 참여하면서 출품한 작품인데요. 우리를 둘러싼 주변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일어나는 소통의 단절을 주제로 다루고 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작업 규모와 기술적인 부분에서 아주 원초적이죠. (웃음) 그럼에도 저희가 동등한 역할로 함께 목소리를 낸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작업입니다. 당시 생각했던 ‘나랑 상관없잖아’라는 문장을 두고 ‘과연 이 시대를 반영하고 관통할 수 있는 문장인가?’에 관해 고민을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렇게 결정한 문장이 알게 모르게 그 이후의 일상의실천이 선보인 작업 기조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봅니다. 지난해 일상의실천 10주년 기념 전시에서는 동일 작품을 2023년 버전으로 새롭게 선보이기도 했는데요. 같은 문장이지만 표현 방식을 달리 적용했습니다.
첫 작업 이후로 선보인 작품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김경철. 고생한 걸로 따지자면 <박근혜 게이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시사주간지 <시사IN>과 협업해 만든 프로젝트 웹사이트인데요. 당시 월간 <디자인>의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Korea Design Award)>에 디지털 미디어 분야에 프로젝트를 제출했는데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었어요. 당시 후보군에 올라간 다른 프로젝트가 삼성, 질레트 등 기업의 커머셜 프로젝트였는데 함께 후보로 선정됐다는 게 재밌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김어진. 저는 2016년에 진행했던 <서울살이: Life in Seoul>이 기억에 남는데요. 국제그래픽연맹(AGI)이 서울 DDP에서 행사를 열면서 스페셜 프로젝트인 포스터 전시에 초대받아 선보인 작업이에요. ‘I love Seoul’이 주제였는데요. 저희는 단순히 서울을 사랑해야 하는 도시가 아니라 애증의 도시로 정의하고, 1970년대부터 2016년까지 서울의 다양한 군상을 포스터에 담았습니다. 700여 장의 사진을 취합하고, 시대별로 인물을 분리하고 연대순으로 포스터 상단에서부터 나열했는데요. 작업의 밀도가 이전과 달랐어요. 그만큼 도전적인 작업이었죠. 메시지 전달을 위한 방법론에 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별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면서까지 ‘실천’하고자 하는 그 원동력도 궁금합니다.
김경철. 자체적으로 작품 활동이라고 부르는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저희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 자체로도 실천을 위한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특히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는 할 수 없는 표현 방식이나 기술 구현을 제약 없이 실험해 볼 수 있으니까요. 이때의 경험이 다음 프로젝트 혹은 또 다른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에도 영향을 끼치거든요.
김어진. 사회적 이슈 그 자체가 동력이 될 때도 있죠. 단순히 글로만 봐 온 사회 문제들을 관찰자 또는 창작자로서 섬세하게 볼 수 있는 기회나 경험이 많지 않거든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슈를 조사하고,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저희도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PLUS 4. 디자이너는 툴러가 아닙니다
앞서 워라벨을 언급한 김에 이야기 해보죠. 일상의실천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업무 시간을 지키는 곳으로도 유명하더군요.
권준호. 업무 시간을 명함에 표기했어요. 명함은 주로 클라이언트와 주고받잖아요. 결국 클라이언트에게 당부하는 말인 거죠. ‘10시부터 7시까지 일하니까 이외에는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말이죠. 내가 고용했으니 원할 때 언제든지 연락해도 상관없는 존재로 디자이너를 여기는 클라이언트분들이 있거든요.
그래도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달라지긴 했잖아요. 여전히 고쳐야 하는 잘못된 관습이나 관행이 있다고 보세요?
권준호. 금요일 밤에 과업을 급하게 부탁하고 월요일까지 달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게 대표적인데요. 이는 주말에 디자이너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둔 부탁이잖아요. 물론 모두가 그러는 건 아니지만 그 바탕에 디자이너가 디자인 작업을 위해 필요한 시간, 수반되는 시행착오, 그리고 노력을 가볍게 바라보는 시선이 자리한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죠.
그런 부당한 부탁을 받으면 어떻게 대응하세요?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권준호. 주말이 있기 때문에 작업 할 수 없다고 말하죠.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금요일 하루 그리고 월요일 오전 정도가 전부기 때문에 사실상 시간 안에 작업은 불가능합니다.”라고 설명하면 당황하시곤 하는데요. 저는 디자이너로서 줄 수 있는 상식적인 피드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절을 고민하는 일상의실천 구성원에게도 부당한 요청 그리고 업무 시간 외의 부탁이나 연락은 받지 말라고 해요. 바꿔서 생각해 보면 저희도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디자이너가 발산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중요할 텐데요. 일상의실천이 생각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권준호. 물론 디자이너가 특정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어떤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디자인이라는 언어로 실천하는 것이 디자이너가 가진 사회적 역할이지 않을까 싶어요. 디자이너가 만드는 풍경은 단순히 하나의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고요. 작은 결과물이 하나둘씩 모이고, 차곡차곡 쌓였을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LUS LIST
일상의실천이 프로젝트에 활용하는 폰트 3
- 프리텐다드(Pretendard)
- 노이어 하스 그로테스크(Neue Haas Grotesk)
- 산돌고딕네오1
일상의실천을 공동 창립한 세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는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는 폰트도 제각각이다. 개발을 담당하는 김경철 대표는 웹 특성상 사용할 수 있는 폰트가 제한적이지만 실용성이 높은 폰트인 ‘프리텐다드(Pretendard)’를 자주 사용한다. 김어진 대표는 폰트패밀리가 다양한 라이노타입의 ‘노이어 하스 그로테스크(Neue Haas Grotesk)’를 꼽았다. 프로젝트마다 미세하게 세팅 값을 조정해 사용하는 게 디자이너로서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아울러 하나의 서체를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권준호 대표는 프로젝트마다 그에 어울리는 폰트를 찾아서 활용한다. 폰트를 하나의 이미지로 생각하는데 프로젝트가 가진 의미를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폰트를 찾는 것부터가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산돌고딕네오1’은 그가 고딕 본문 조판을 할 때 떠올리는 폰트다. 다양한 웨이트를 지원하고, 어떤 영문 산세리프 서체와 함께 사용해도 무난하게 조합할 수 있다. 그는 산돌고딕네오1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무난한 평범함이라고 말한다.
TIPPING POINT
성격도 취향도 각기 다른 세 명의 디자이너가 일상의실천이라는 디자인 스튜디오를 10년 넘게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와 같은 물음에 이들은 ‘신뢰’라고 답한다. 세월과 함께 쌓은 관계의 힘이 돋보이는 건 이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다. 일상의실천은 각자가 리드하는 프로젝트에 디렉터로서 전권을 부여한다. 한 명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두고 옆에서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강요해서는 안된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언성을 높여서도 안된다. 이는 서로가 정해둔 암묵적인 룰이다. 대학 시절부터 서로를 지켜봐 온 이들이 쌓은 신뢰는 ‘일상의실천’이라는 공동의 목소리로 디자이너의 철학과 책임감의 가치를 말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