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지용킴 김지용: 빛바랜 옷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다

김지용 지용킴 디렉터·디자이너

효율과 생산성이 중심이 된 패션 산업 속에서, 지용킴(JiyongKim)은 구태여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택한다. 햇빛에 천을 바래게 해 완성된 옷은 예측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모두 다른 개체로 태어난다. 그 시간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가치를 발견해온 지용킴은 최근, 브랜드의 태도를 담은 공간을 열었다. 서울 한남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첫 플래그십 스토어다.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브랜드 언어를 다듬어온 김지용 디렉터를 만났다.

[Creator+] 지용킴 김지용: 빛바랜 옷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다

editor’s note

서울 용산구 한남동 조용한 주택가 골목 끝, 최근 이곳에 패션 브랜드 지용킴(JiyongKim)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열었습니다. 오래된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이 공간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브랜드의 태도와 감각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장소인데요. 건축사무소 원애프터(one-aftr)와 협업해 공간을 완성해 더욱 눈길을 끕니다.

지용킴은 디자이너 김지용이 2021년에 설립해 전개해 오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그는 일본 문화복장학원(Bunka Fashion College)과 세계적인 패션 명문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에서 남성복을 전공하며 르메르, 루이 비통 등 글로벌 하우스에서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실무 경험도 쌓아왔죠. 이후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미학이 담긴 옷을 선보여 오고 있는데요. 특히 햇빛에 천을 그을리는 ‘선블리치(Sun-Bleach)’ 기법이 대표적입니다. 개체마다 고유한 시간성과 질감을 가진 점이 특징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용킴은 독특하게 런웨이 방식이 아닌 전시를 통한 프레젠테이션으로도 주목받곤 합니다. 이번에 오픈한 플래그십 스토어는 그동안 외부 공간에서 전시를 이어오며 느꼈던 아쉬움을 반영해, 앞으로는 브랜드만의 공간에서 전시와 프레젠테이션을 자유롭게 이어가기 위한 미래 기반이기도 합니다. 햇살이 잘 드는 오전, 한남동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김지용 디렉터를 만났습니다. 김지용에서 시작해 지용킴이라는 브랜드로 성장하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에 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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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지용킴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만난 김지용 디렉터

PLUS 1. 가치를 경험하는 공간, 지용킴 플래그십 스토어

지난 4월, 지용킴 브랜드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했어요. 처음으로 오프라인 공간을 소개한 만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다고 들었는데요. 공간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용킴의 플래그십 스토어에 대한 고민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저희 옷은 실물로 직접 봐야 이해되는 디테일이 많거든요. 이미지나 룩북으로는 그 느낌을 다 전달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늘 느껴왔고요. 그동안은 전시나 팝업을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보여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방식에도 늘 아쉬움이 남았어요. 브랜드를 찾는 바이어나 매체, 팬 분들이 한국에 오실 때마다 “직접 옷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무실 외엔 따로 안내해 드릴 곳이 없다는 점도 늘 마음에 걸렸고요. 그래서 저희가 온전히 주도할 수 있는, 브랜드 고유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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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지용킴의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매일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스토어의 위치인데요. 한남동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202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공간을 찾기 시작했어요. 서울 내 여러 지역을 직접 둘러봤죠. 상업적으로 활발한 곳도 물론 좋지만, 지용킴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밀도와 리듬에 어울리는 장소인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선택한 곳이 바로 지금 있는 한남동이죠. 골목의 조용한 분위기, 자연광이 드는 방향, 주택부터 오피스까지 공간이 품은 흔적까지 공간과 브랜드의 결이 잘 맞았어요. 무엇보다도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와야 하는 위치라는 점이 지용킴의 옷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한 번 발견하면 오래 기억되는 옷과 공간. 그런 ‘발견의 기쁨’이 지용킴이 추구하는 ‘희소성’이라는 가치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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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그십 스토어 1층 파사드는 전면 유리 구조를 활용해 지용킴의 옷을 선보이는 무대로 활용 중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단순한 매장이라기보다 꼭 전시장 같은 인상을 받는데요. 찾아보니 공간 설계와 디자인을 건축사무소 원애프터(one-aftr)가 맡았더군요.

맞아요. 공간 설계와 디자인을 원애프터의 마준혁, 안미륵 소장님과 함께했어요. 지난 2024년 1월호 월간 <디자인> 특집에서 ‘2024 월간 <디자인>이 주목하는 디자이너’에 함께 선정되어 소개된 적이 있었죠. 그때 인연이 됐어요. 감사하게도 이후 지용킴이 선보이는 전시장에도 몇 번씩 찾아와주셨어요. 언제가 기회가 되면 함께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공간을 준비하면서 두 소장님들밖에는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건축적인 완성도뿐만 아니라,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브랜드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구조’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이해해 주셨어요. 덕분에 협업의 결과물이 단순히 ‘잘 지어진 공간’이 아니라, 지용킴이라는 브랜드가 공간 안에서 어떤 태도와 감각으로 말하고 싶은지를 조용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형태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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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공간 디테일도 남다르다고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자면요?

기본적으로 이 공간은 옷을 진열하는 매장이 아니라, 브랜드의 메시지와 시즌 주제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전시 구조를 기반으로 설계했어요. 천장에 설치한 슬라이딩 레일 시스템이 대표적이죠. 단순히 무언가를 거는 용도 이상으로 공간의 유연함을 상징하는 장치예요. 필요에 따라 이미지나 캔버스를 걸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구조 자체를 바꾸는 데 활용되기도 해요. 또 하나 주목할 건 병풍 형태의 구조물인데요. 과거에는 원래는 베란다 구조였던 곳이에요. 시간대마다 다르게 드는 햇빛을 통해 매번 새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죠. 그리고 모듈형 가구 시스템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열대, 스툴, 테이블 등 대부분의 요소가 분해되고, 방향을 바꾸거나 뒤집으면 전혀 다른 기능을 하게 돼요. 예를 들어 하나의 구조물이 모자 거치대가 되기도 하고, 뒤집으면 테이블로도 활용돼요. 높이도 조절할 수 있어서 시즌마다 전체 구성을 바꾸기에도 적합하죠. 가구는 원에프터 소장님들이 제작하셨어요.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이, 지용킴 브랜드의 전시나 행사에 가면 팀원이나 디렉터가 직접 브랜드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되더라고요. 지난 플래그십 스토어 오프닝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설명을 직접 전하는 이유와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설명을 직접 드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브랜드 자체가 설명할 지점이 많은 구조이기도 하고요. 특히 선블리치처럼 개체마다 다르게 만들어지는 옷이라든지, 특정한 소재나 표현 방식에 대해서는 말로 보충하지 않으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단순히 제품만 보여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고, 저희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해 드릴 때 고객들이 브랜드에 대해서 더 깊게 이해하실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또, 그런 태도가 지용킴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성격과도 잘 맞는 것 같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쉽게 어떤 브랜드나 제품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요, 그래서 더더욱 ‘저 같은 사람도 설득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게 결국 ‘설명’이더라고요. 설명을 통해서 맥락과 의미, 방식에 대해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습니다.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이번 공간은 저희가 전시처럼 운영하고 싶었던 장소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설명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와도 “이 옷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 구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고 싶고, 그게 저희가 브랜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가치이자 태도이지 않을까 싶어요.

PLUS 2. 지용킴 이전의 김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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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킴을 이끌어 온 김지용 디렉터는 일본 도쿄의 문화복장학원을 거쳐 영국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남성복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다.

지용킴 브랜드 이야기에 앞서, 김지용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요. 특히 패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하더군요.

패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어머니 영향이 컸어요. 어머니가 옷 가게를 하셨거든요. 바잉(buying)을 가실 때면 저도 곧장 따라나서곤 했는데, 그게 저한테 마치 보물찾기처럼 느껴졌어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 자체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시간이 나면 빈티지 샵이나 편집숍을 찾아 나섰고, 이베이나 일본 옥션에서도 옷을 구매하길 좋아했죠.

도쿄의 ‘문화복장학원(Bunka Fashion College)’으로 진학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겠네요.

당시 제가 옷을 가장 많이 사고, 패션에 반응했던 곳이 일본이었거든요. 자연스럽게 ‘옷을 만드는 걸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낯선 환경인 만큼 적응하는 게 쉽진 않았을 듯싶은데요.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도 있을까요? 

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정말 매일 옷 이야기만 했던 것 같아요. 수업에서도,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말이죠. 낯설기보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할 수 있다 보니 친구들도 금방 사귈 수 있었고, 처음에는 어렵던 언어도 금방 늘더라고요. 친구들 고향도 각자 달라서 주말이면 함께 놀러 가기도 했죠. 그럴 때면 각자가 알고 있는 빈티지 숍이나 편집숍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직접 가서 옷을 보고 구매하면서 패션에 대한 생각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세계 패션 3대 스쿨 중 한 곳으로 알려진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에 진학해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이 생각하는 방향과 제가 꿈꾸는 모습이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됐는데요. 사실 그때도 이미 저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단순히 옷을 기술적으로 잘 만들고, 유명 브랜드에 합류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주도해서 어떤 옷을 만들지, 또 이를 어떻게 보여줄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가치를 이야기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싶었어요. 반면, 대부분의 친구는 졸업 후 취직을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몇몇은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조금 더 치열한 환경에서 패션을 배우고, 또 고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점에 가장 창의적이고, 경쟁이 치열한 패션 학교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진학하게 된 거죠.

직접 경험해 보니 센트럴 세인트 마틴과 일본문화복장학원은 무엇이 다르던가요?

문화복장학원에서는 기술적인 걸 아주 철저하게 배웠어요. 패턴, 봉제, 재단 같은 옷의 기본 구조에 대한 훈련이 중심이었죠. 좋은 옷이란 잘 만들어진 옷이라는 전제가 아주 강했어요. 그래서 실습 위주 수업도 많았고, 반복적으로 정교한 기술을 익히는 데 집중했어요. 반면,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됐어요. 옷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이미지로 표현하고 구성할지를 더 고민하게 만들더라고요. 단순히 옷을 ‘잘 만들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이 옷을 만들었는가.’, ‘어떤 맥락에서 보여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구조였어요. 그래서인지 이미지, 무드, 프레젠테이션 방식에 대한 감각도 더 민감해졌던 것 같아요. 옷을 만드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옷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태도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창작 행위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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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세인트 마틴 남성복 석사 과정과 함께 브랜드를 동시에 운영해 온 김지용 디렉터. 그는 당시를 낮과 밤 구별 없이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전해 듣기로는 패션 전공으로 석사에 진학하는 일이 흔치 않다더군요. 더욱이 팬데믹 기간과 맞물려 있었다고요.

맞아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는 학사도 경쟁이 치열하지만, 석사 진학은 그보다 더 어려운 편이에요. 저희 남성복 학과 기준으로는 학사생 중 단 2명만 석사로 올라갈 수 있었거든요. 많은 학생이 지원해도, 정원이 제한적이라서 진학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요. 그런데 말씀처럼 제가 학사 졸업을 앞두던 시기가 딱 코로나 팬데믹 때였어요. 졸업 쇼 자체가 전면 취소되면서 처음으로 선보이려던 ‘선블리치 프로젝트’도 제대로 공개할 수 없게 됐죠. 그때 느꼈던 상실감이 꽤 컸어요. 아쉬움 때문인지 몰라도 석사 진학을 결심하게 됐죠. 운 좋게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지원도 받을 수 있었는데요. 다만, 팬데믹으로 인해 수업 대부분이 온라인으로 전환됐고, 저는 그 기간 한국에 머물며 시차를 맞춰 새벽에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수업을 온라인으로 들어야 했던 것 이외에도 석사 과정은 무엇이 달랐을지도 궁금해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맥락’과 ‘이유’였어요. 예를 들어, 한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 이미지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아방가르드’라는 단어를 쓰면, 왜 이 단어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이 단어가 현재 패션 신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비평과 토론이 끊임없었죠. 단어 하나를 쓰더라도, 그 언어가 가진 힘과 배경을 끝까지 파고드는 방식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생각해요.

한편, 석사 과정 속에서 지용킴 브랜드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힘을 준 인물도 있다면서요.

맞아요. 패션 코스 리더인 파비오 피라스(Fabio Piras)로부터 정말 큰 영향을 받았는데요. 그는 옷을 보는 훈련은 물론이고, 옷이 존재하는 방식, 그걸 설명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거든요. 그와 수업하면서 제가 알게 된 건, 단지 ‘취향은 다르다’가 아니라, 경험과 공부를 통해 쌓이는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덕분에 내가 옳다고 느낀 감각이 단지 내 취향에 그치지 않고,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 도달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기회를 낚아채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이를 위한 본인만의 마인드셋이 있다면요?

글쎄요. 마인드셋이라기보다, 기회가 왔을 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고, 그게 또 다른 기회로 연결되었던 것 아닐까요?

“저는 뭔가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다해보려고 해요.”

PLUS 3. 햇빛을 입은 옷, 지용킴의 선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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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킴(JiyongKim)의 김지용 디렉터는 개인적으로 은은하게 선블리치 된 개체를 즐겨 입는다.

브랜드 지용킴만의 시그니처 기법인 ‘선블리치(Sun-Bleach)’는 언제 처음 선보이셨어요?

처음 선보인 건 센트럴 세인트 마틴 학사 졸업 컬렉션에서였어요. 원래는 졸업 쇼 무대에서 공개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쇼 자체가 전면 취소됐거든요. 그때부터 자연광에 천을 노출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햇빛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요소가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매번 다른 조건 속에서 천이 변화하는 걸 보며, 옷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시간을 입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2021년 브랜드 지용킴을 론칭하면서 이 방식을 본격적인 제작 방식으로 발전시켰고, 현재까지도 지용킴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시그니처 기법으로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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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블리치(Sun-Bleach) 과정 중인 개체들

선블리치 기법은 햇빛으로 원단을 바래게 하는 방식이잖아요. 이러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계기도 궁금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사실, ‘선블리치’라는 말도 나중에 저희가 붙인 거고요. 한국어로는 ‘빛이 바랜 옷’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요. 예전에는 햇빛에 바래면 못 입는 옷, 수명이 다한 옷으로 여겼지만, 저는 오히려 그 ‘가치 없음’에서 새로운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똑같은 방식으로 옷을 만들기보다는, 시간과 자연이라는 통제 불가능한 요소를 옷에 입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생긴 흔적들,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변화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이 방식에 매달리게 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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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생산하는 패션 산업의 반대 지점을 고수하는 지용킴(JiyongKim). 그런 점에서 선블리치는 단순한 염색 기법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말씀대로라면 결국 선블리치 기법은 브랜드 지용킴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겠네요?

맞아요. 선블리치는 단순한 염색 기법이 아니라, 브랜드가 추구하는 태도와 연결된 방식이에요. 빠르게 찍어내는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패션 산업의 한 축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방식이죠. 옷을 자연광에 두고, 하루하루 천천히 변화하는 색을 기다리다 보니, 여름이면 한 달이면 되던 작업이 겨울엔 두 달 반까지 걸리기도 하죠. 그만큼 비효율적이고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창작의 본질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만든 흔적, 예측할 수 없는 결과, 그래서 전부 다른 ‘개체’로 존재하는 옷들. 그게 지용킴이 말하고자 하는 감각과 철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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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는 위치와 각도, 시간대, 기후 조건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결과물이 되는 지용킴의 옷. 이들은 이를 제품이 아니라 ‘개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선블리치 기법을 통해 완성된 제품을 ‘개체’라고 말하는 점도 눈길을 끌더군요.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니까요. 같은 원단이라도 햇빛을 받은 위치, 각도, 시간대, 기후 조건에 따라 결과가 다 다르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똑같은 옷을 다시 만들 수 없고, 매번 다르게 완성된다는 점에서 각각이 독립적인 존재인 거죠.

하지만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은 브랜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큰 리스크잖아요.

그렇죠. 지용킴은 매년 1월과 6월, 파리 패션 위크 기간에 맞춰 시즌 컬렉션을 선보이는 브랜드인 만큼 일정 관리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선블리치 기법은 여름과 겨울에 제작 기간이 다를 수밖에 없어서 정말 바쁘게 움직여야 해요. 게다가 작업물에 대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요. 외부에 맡기지 않고 팀원들이 전부 직접 클리닝부터 검수, 포장까지 세 번 이상 꼼꼼하게 확인을 거쳐야 해요. 이 과정을 시즌마다 반복하는 거죠. 정말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용킴이 생각하는 ‘개체’가 제대로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LUS 4. 런웨이 바깥에서, 지용킴이 옷을 소개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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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킴(JiyongKim)은 런웨이가 아닌 전시를 통해 컬렉션을 선보인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는 옷이 품은 이야기와 특징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런웨이’를 고집하지 않는 브랜드라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대신 ‘전시’라는 형태로 옷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런웨이라는 방식이 지금 시대엔 어떤 한계가 있다고 느끼신 걸까요?

지용킴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선블리치라는 제작 방식부터 개체마다 각기 다른 특성들을 실제로 보고, 들어야지 이해할 수 있는 옷들이 많거든요. 런웨이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옷이 지나가다 보니, 그 안에 담긴 구조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전시 형태의 프레젠테이션을 선호했죠. 직접 보고, 만져보기도 하고, 또 질문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만 저희 옷이 가진 밀도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이어든, 고객이든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지용킴을 이해했으면 했거든요. 또, 요즘 시대엔 이러한 접근 방식이 더 매력 있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요.

패션 외 분야와의 협업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어요. 삼성전자, Super73, 클락스 같은 협업을 보면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걸 넘어 새로운 창작의 영역을 탐색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런 점에서 지용킴에게 협업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더군요.

사실 저희가 직접 다룰 수 없는 산업 영역이 많잖아요. 예를 들어 Super73과 같은 전기 바이크나 삼성전자의 스피커 같은 경우, 저희가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오브제에 지용킴의 언어를 입히는 작업은 새로운 창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 자체로 브랜드의 감각을 다르게 보여줄 기회니까요. 그리고 협업을 통해 브랜드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데요. 단순히 멋진 브랜드와 만나는 걸 넘어서 지용킴이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혹은 못 했던 세계를 열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태도가 될 수밖에 없어요.

말씀처럼 새로운 영역 브랜드와 만났을 때, ‘지용킴다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가요?

가장 중요한 건 지용킴이 지켜온 가치들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거예요. 저희는 늘 희소성이나 독창성, 그리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있거든요. 그걸 유지하기 위해 프로젝트마다 늘 고민을 많이 해요. 예를 들어 협업할 때도 단순히 유명한 브랜드이기보다는, 지용킴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조형 언어나 태도가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가를 제일 먼저 봐요. 협업이든 전시든, 새로운 시도를 할수록 오히려 기본을 단단히 붙잡는 일이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결국 어떤 형식이든 브랜드의 태도와 감각이 왜곡되지 않고 드러날 수 있는지, 그게 저희가 협업에 임하는 기준이에요.”

그렇다면 앞으로 함께 일해보고 싶은 브랜드도 있어요?

예전부터 가구 브랜드와의 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브랜드에서 보여주는 조형적 접근이나 소재 활용 방식이, 옷을 넘어서 다른 오브제에서도 확장 가능하다고 느꼈거든요. 특히 더 큰 스케일의 오브제를 다루는 작업에 끌려요.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늘 입체 구조나 흐름을 고민하다 보니, 그런 감각이 가구나 공간 오브제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브랜드라고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지용킴의 언어를 새로운 형태로 번역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만나보고 싶습니다.

PLUS LIST

김지용 디렉터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 3

-파비오 피라스
-크리스토프 르메르
-버질 아블로

지용킴 디렉터 김지용에게 패션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어준 사람은 어머니다. 옷 가게를 운영하시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옷을 보고 고르고, 매장 안의 공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패션 산업에 대한 감각을 체득했다. “좋은 것을 발견하는 일”의 즐거움을 처음 배운 것도 그때였다. 이후 센트럴 세인트 마틴 석사 과정에서 만난 파비오 피라스(Fabio Piras) 코스 리더는 ‘왜 이 옷을 만들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옷을 말할 수 있는 태도와 절대적인 미에 대한 기준을 심어준 인물이었다. 구조와 실루엣, 옷이 움직이는 리듬에 대한 이해는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로부터 배웠고, 옷 너머의 이야기를 설계하고, 창작자로서의 언어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네 사람은 김지용에게 각각 다른 방향의 자극을 주었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브랜드 지용킴을 밀어준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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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에 론칭한 지용킴(JiyongKim)이 단기간에 도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브랜드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와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천을 그을리는 선블리치 기법처럼, 시간의 흔적을 옷에 새기는 방식을 통해 지용킴은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개체마다 다른 감각’을 말해왔다. 형태와 흐름을 강조한 드레이핑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완성된 옷보다 과정과 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 브랜드는, 반복과 기다림을 기꺼이 감내하는 농업적 근면성과 손의 감각을 믿는 공예적 태도 위에 서 있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지용킴은 자신만의 속도로 확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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