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ID 송봉규 대표

산업 디자인의 알파와 오메가

BKID 송봉규 대표는 디자이너로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다.

BKID 송봉규 대표

흔히 산업 디자인을 바늘부터 우주선까지 디자인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산업 디자인의 넓은 스펙트럼을 대변한다. 그런데 최근 BKID의 행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느낌이다. 지구 반대편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전통 공예와 하이테크를 오가는 모습은 스튜디오의 운신의 폭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BKID의 수장 송봉규 대표와 지난 15년을 복기하고 앞으로의 15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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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 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를 거쳐 2010년 BKID를 설립했다. BMW, 아우디, 삼성, LG, 델, 디즈니 등 국내외 유수의 기업들과 산업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5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올해의 젊은 예술가로 선정되었으며 라이프스타일, IT, 가전, 의료 기기,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디자인한다. 지난해에는 서울시의 공공 의자 ‘폼앤폼’(p.155 참고)을 선보이며 공공 영역에서 디자인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근 BKID 런던 오피스를 개소했다. bkid.co

국경 너머로 돌린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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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ADI 뮤지엄에서 선보인 ‘티컵 유니버스’. 세라믹과 3D 프린팅 기술, 옻칠을 결합해 차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참여 디자이너 송봉규, 장민욱, 윤호열 사진 권진형
요즘 유독 해외 출장이 잦은 것 같아요. 메일로 인터뷰 제안을 했을 때도 막 런던에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 참이었잖아요.

삼성전자 디자이너로 일하다 독립한 지 올해로 15년 됐어요. 그사이 국내 산업의 지형도 많이 변했죠. 팬데믹을 겪고, 중국 디자인 시장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것도 목격했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10년, 15년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됐어요. 초기에는 한국인이 이미 포진한 미국이나 중국의 기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지금은 한국과 연고가 없는 해외 기업의 프로젝트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해외 지사가 필요해졌고, 지난 2월 런던 오피스를 열게 된 것이죠. 이번 출장은 AIX(Aircraft Interiors Expo)라는 행사를 둘러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년 전 보잉사와 맺은 인연을 기반으로 항공 분야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거든요.

익숙한 행사 이름은 아니군요.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항공기 인테리어 산업 전문 전시입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항공 분야 전문가들에게는 가장 인지도 높은 행사 중 하나이죠. 사실 항공 산업에 대한 관심은 디자인 회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근 에인트호번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GRO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때 더치 디자인 붐을 이끌던 회사 중 하나였고, 제가 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회사라 충격이 꽤 컸어요. 그 외에도 재작년, 작년에 문을 닫거나 규모를 축소한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가 눈에 띄게 늘었고요. 디자인 전문 회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들을 분석하게 됐는데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어요. 다수가 항공 프로젝트를 진행하더군요. 영국의 텐저린이 대표적입니다. 진입 장벽은 높지만, 트렌드의 주기가 짧은 IT나 가전 기기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데다, 국내에서 쉽게 할 수 없는 분야라 관심이 갔어요.

이번 출장 행선지 중 이탈리아 밀라노도 있었죠?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ADI 뮤지엄이 차 문화를 주제로 한 기획전을 열었어요. BKID도 차를 마시는 행위와 개념에 집중해 35종의 티컵을 개발했습니다. 한 10년 만에 밀라노를 찾은 셈인데 네트워크도 넓히고 유럽의 디자인 시장 상황을 살필 좋은 기회였습니다. 마침 알레시와 3년 정도 진행한 텀블러 ‘부리’도 같은 시기에 론칭해 알레시 플래그십 스토어와 공장도 둘러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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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의 ‘부리’ 텀블러. 실험실 비커 모양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으로 휴대성과 편의성을 높였다. 클라이언트 알레시 참여 디자이너 송봉규, 양성원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로 알레시와 공식 협업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라 더 관심이 갔어요. 해외 클라이언트들이 BKID를 찾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BKID뿐 아니라 한국 디자인 신 전반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 한정한 이야기이지만, 팬데믹 기간에 브랜드 실무진이 대거 세대교체가 되었다고 해요. 이전까지 브랜드를 이끌며 디자이너와 협업하던 직원들이 50~60대에 접어들면서 30대 실무자들이 그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죠. 이전에는 기업이 잡지 같은 전통 매체에서 디자인 파트너를 찾았는데 요즘은 인스타그램이나 비핸스에서 탐색하더군요. 그러다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눈에 들어왔다고 해요. 한국 디자이너들의 적극적인 프로모션이나 완성도 높은 포트폴리오에 관심이 생긴 것이죠. 시대의 흐름이 디지털로 넘어가면서 전자 제품을 기반으로 성장한 국내 디자이너들의 역량이 경쟁력을 갖추게 된 영향도 있습니다.

2005년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도한 제품디자인워크숍의 결과물이 상품화된 적이 있지만 알레시가 단일 디자인 전문 회사에 공식 제안해 제품을 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대교체에 대한 글로벌 디자인 신의 열망도 한국이 주목받는 데 한몫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브 베하가 올해로 60세가 됐다고 하더군요. 프로그, IDEO, 루나의 설립자나 디렉터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반면 현재 한국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들의 대표는 대부분 30대 후반에서 40대입니다. 실제로 여러 해외 클라이언트와 미팅해보니 공통적으로 ‘한국 디자인은 젊다’는 인상을 갖고 있더군요. 게다가 전문 디자인 스튜디오의 대표 중 적지 않은 수가 삼성, LG 등 대기업 출신으로 큰 조직과 작은 규모의 회사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런 디자이너가 세계 시장에 생각보다 흔치 않다고 합니다. 이런 점이 현재 한국 디자인 신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위기와 기회의 기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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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로우 10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컬래버레이션 가구 시리즈 ‘10 COLORS’에서 선보인 ‘닷 행거’. 앵커 방식으로 행거 모듈을 고정할 수 있어 사용자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 레어로우 참여 디자이너 송봉규, 김민창 사진 김권진
하지만 동시에 위기 신호도 감지됩니다. 그동안 국내 디자인 산업이 탄탄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만큼 제조 시장의 쇠퇴가 미치는 영향도 클 것 같아요.

현재 국내 제조 생태계의 대응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뉘는 것 같아요. 가격 경쟁력을 상실한 1, 2세대 제조업 대표들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브런치 팩토리 내지 라이선스 팩토리를 운영하면서 본거지를 옮기는 경우가 있고, 레어로우나 라이마스처럼 제조업을 넘어 브랜드로 진화하는 경우가 있죠. 참, 아고처럼 디자인 디렉터를 영입하고 해외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케이스도 있네요. 아무튼 예전처럼 대기업의 주문에만 의존하던 제조 공장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 돌파구는 없을까요? BKID도 대한특수금속과 함께 주물 브랜드 MM을 론칭해 활로를 모색한 적이 있잖아요.

안타깝게도 대한특수금속의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브랜드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어요. 처음 MM을 준비할 당시만 해도 경북 고령 지역에 연간 수천 톤에 달하는 주물을 생산하는 대형 공장이 50개 가까이 있었는데 이제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대한특수금속이 제조에 강점이 있고 BKID는 디자인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세일즈나 마케팅 부분을 보완하지 못했던 게 패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조업에 대한 해답은 내놓을 수 없지만 디자인 산업만 놓고 보자면 영국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아요. 영국은 이제 제조 제반 시설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죠. 반면 (브렉시트 이후 다소 주춤하긴 하지만) 여전히 좋은 디자인 스쿨과 디자인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요. 독일이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로컬 시장을 상대로 하는 중소기업의 디자인은 상황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국내 에이전시는 글로벌에서 기회를 찾아야 할 거예요. 근거리 운전을 하고 제조 시설을 찾아가 공장 대표와 상의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인 회사, 제조 회사가 세계 곳곳에 흩어지는 현상은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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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ID가 공동 운영했던 주물 브랜드 MM. 사진 김권진
중국의 부상 역시 국내 제조 산업과 디자인 생태계에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중국의 산업 생태계를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지난 10여 년간 중국의 제조 기반 대기업 역시 몇 차례 세대교체를 경험했습니다. 화웨이나 하이얼 같은 1세대를 거쳐 샤오미 등 2세대 기업이 등장했고, 현재는 DJI 같은 3세대가 도래했죠. 초기 가전 회사의 설립자들이 이제 60대가 됐고 레이쥔 샤오미 회장 역시 50대 중반입니다. 반면 DJI로 대표되는 3세대 기업의 오너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거든요. 10~15살 터울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셈입니다. 이제 20대 후반 창업자를 중심으로 한 4세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요.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현상이 있습니다. 오포의 낫싱이나 화웨이의 아너처럼 스핀오프 같은 신생 회사가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속도가 더딘 국내 상황을 보면 걱정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중국 디자인 신도 이에 발맞춰 성장 중입니다.

중국 안팎의 글로벌 기업을 경험한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디자인 스튜디오를 열고 있어요. 그런데 앞서 위협이라고 표현했지만 저는 오히려 이게 기회라고 생각해요. 중국 내의 디자인 산업 자체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급성장하는 중국 기업들은 한국 이상으로 국제화되어 있어요. 디자인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하죠. 한발 앞서 세계 무대를 경험한 한국 디자이너들이 개입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산업이 커질 때 텐저린이나 컨티늄이 발 빠르게 진출해 수혜를 입은 것처럼 말이죠. 관건은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가 기회를 포착할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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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앤폼Form & Foam’. 서울시의 공공 의자로 지난해 코리아디자인어워드 인더스트리얼 부문에서 수상했다. 사진 이상필
복잡한 상황 중 BKID는 과거와 미래에서 동시에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로봇이나 웨어러블 디바이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편 공예가와 협업도 하잖아요.

몇 년 전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BKID가 한창 두산로보틱스와 함께 협동 로봇을 개발할 때였는데 거의 동시에 강화도의 완초 공예 장인 박순덕 선생과도 협업을 하게 됐어요. 협동 로봇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사람의 팔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작동 원리나 길이도 사람의 팔을 모방했고, 페이로드 용량 역시 성인의 노동력을 감안해 10~20kg 선에 맞춥니다. 그런데 강화도에 내려가 박순덕 장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완초 공예가 원시 시대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도구 없이 두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공예품이기 때문이에요. 한쪽으로 사람 손을 대체하는 디자인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 철저히 사람 손에 의존하는 공예가와 일을 하다 보니 기분이 묘하더군요.(웃음) 산업 디자이너는 결국 시대의 산업이 요구하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인데 이 상이한 성격의 두 작업이 모두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산업용 로봇이 한번에 정확하고 안전하게 들어 올릴 수 있는 최대 중량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한때 산업 디자이너들이 한창 전자사전을 디자인하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모두 사라졌지만요. 1000개의 제품이 필요한 시대에서 1000개의 앱이 필요한 시대로 바뀐 거예요. 대학의 제품 디자인 커리큘럼이 UX·UI 커리큘럼으로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우리는 결국 지금 당장 시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디자인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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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로보틱스 M-시리즈. BKID는 일찍이 협동 로봇 디자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 스튜디오 중 하나다. 인간 팔의 동작 범위를 모방해 설계했으며 6개의 관절점을 갖고 있어 광범위한 유연성이 특징이다. 클라이언트 두산로보틱스 참여 디자이너 송봉규, 이일우, 김민석, 김세한 사진 두산로보틱스
하이테크와 전통 공예를 오가는 경험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보나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기분입니다.(웃음) ‘현타’가 오기도 하고, 동시에 치유도 받아요. 효율성의 극단을 추구하는 첨단 제품을 만들다가 지극히 비효율적인 프로젝트를 하면 환기도 되고요. 사실 당장의 수익만 생각하면 하이 테크놀로지에 집중하는 게 맞죠. 공예 프로젝트는 대부분 예산이 충분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로테크 역시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마을마다 옹기 터가 하나씩 있었다고 해요. 여기서 각 가정에 필요한 옹기를 제작하는데, 똑같은 옹기를 일괄적으로 생산하는 게 아니었어요. 집집마다 환경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맞춤형 옹기를 제작했던 것이죠. 오늘날의 비스포크 생산 방식이나 3D 프린팅의 역할을 옹기 터가 한 셈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과거로부터 인사이트를 얻을 때가 있어요. 최근 BKID가 정립한 슬로건 중 ‘크래프트 투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렇게 기술의 양극단을 커버할 수 있는 디자인 회사가 많지 않다고 봐요. 알레시 같은 브랜드도 BKID의 이런 점을 높이 샀다고 하더군요.

새로운 역할을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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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하 SDF) 영 디자인 프로모션의 멘토이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데 참가자 중 전통 공예나 미학에 천착하는 디자이너의 비중이 꽤 됩니다.

예전에는 디자인의 미덕을 대량생산에서 찾곤 했어요. 대량생산할 수 없는 제품은 공예라며 선을 긋곤 했죠. 하지만 요즘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아요. 최근 리빙 디자인 신의 흐름이 이를 대변하죠. 한국은 리빙 산업이 빠르게 성숙기로 접어들고 있어요. 몇 년 전 프리츠한센의 국내 매출이 아시아 지역 1위를 기록했다고 하죠. 최근 이케아는 서울에 5호점을 오픈했고요. 정제되고 완성도 높은 대량생산품이 보편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급부로 독창적인 제품을 찾는 이들이 생겼어요. 원래 트렌드란 유행의 과포화 상태가 되면 차츰 저물기 마련이죠. 공간의 차별화를 위해 공예적 감성이 깃든 제품을 찾는 곳이 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리테일 등 상업 공간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정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요. 아직 부침이 있지만 디자인 생태계의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신호라고 봅니다.

올해 SDF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의 멘토로 참여하십니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나요?

저는 2006년 SDF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 참가자 출신입니다. 사실 전시 참여를 결정하고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했어요. ‘이게 맞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내가 왜 여기서 전시하고 있지?’ 이런 생각을 했죠.(웃음) 대학 졸업 전시와는 또 다르니까요. 그런데 당시 전시에 참여하며 받은 피드백이 큰 자양분이 됐어요. 그때 만난 디자이너들과 여전히 교류하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조언은 혼자서 의심하고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보단 일단 한번 선보이고 피드백을 받아서 재조정하겠다고 마음먹는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스타트업으로 치면 피벗에 가깝죠. 아무리 머릿속으로 백번 시뮬레이션해봤자 현실은 달라요. 지레 걱정하거나 의심하기보다 일단 최선을 다하고, 관람객의 반응을 살펴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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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워크플레이가 진행한 <Bending/구부림>전. 전시명처럼 ‘구부림’을 탐구한 산업 디자이너들의 기획 전시다. 워크플레이는 올여름 서울대학교 캠퍼스 내 파워플랜트에서 디자이너의 마켓을 준비 중이다. 참여 디자이너 성정기, 송봉규, 이성용, 이장섭, 조기상, 미헬 뷔테파게Michel Bütepage
10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슈퍼 루키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이 신을 받치는 허리 같은 인상이에요.

어느덧 저도 40대 중반이에요. 60대까지는 활동할 계획이지만 슬슬 다음 챕터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소프트 랜딩을 계획한다고 할까요? 몸담고 있는 워크플레이 멤버들과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눠요. 나이대가 비슷하다 보니 같은 고민을 하는 거죠. 그때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배우나 운동선수에 대한 비유였어요. 배우는 얼굴을 속일 수 없다 보니 아역 배우일 때 할 수 있는 역할과 10대나 20대에 할 수 있는 역할, 중년 혹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하는 역할이 다 따로 있잖아요. 때에 따라 주연이었던 배우가 조연이 될 수도 있고요. 운동선수는 더하죠. 현역 선수로 뛸 수 있는 시기는 기껏해야 30대 중반이고 이후에는 정말 오랜 시간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해설자나 칼럼니스트가 될 수도 있죠. 포지션은 바뀌는데 계속 자기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를 합니다. 우리 세대의 디자이너들도 점차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위치에선 물러나겠지만 필드를 지원해 주는 선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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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BKID 사옥에서 진행한 〈Appendix〉전. 프로토타입, 기록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등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모아 공개하는 전시였다.
BKID 사옥 지하에 갤러리를 마련하고 동료 디자이너들이 전시를 열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산업 디자이너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봐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공예나 순수예술과 달리 산업 디자인을 보여주는 전시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클라이언트 없이는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어요. 건축가들은 클라이언트가 없더라도 건축 모형을 통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사람들을 끌어모으잖아요. 그 안에서 건축 담론도 도출하고 말이죠. 왜 산업 디자인은 그게 안 될까 하고 살펴보니 이미 대학 교육과정 자체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학생 때만 해도 산업 디자인 대학은 졸업 후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는, 직업 양성소의 색깔이 짙었던 것 같아요. 일련의 활동은 결국 그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갈증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네요.

사실 2006년에 SDF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에 참여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때 제가 수첩에 남긴 스케치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언젠가 사옥을 짓겠다. 그리고 사옥 한 층에는 갤러리를 두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어요.(웃음) 지금도 SDF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이 젊은 산업 디자이너의 역량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지만 사실 1년에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잖아요. 좀 더 상시적으로 산업 디자이너의 역량을 보여줄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갤러리를 열었어요. 사실 갤러리보다 너무 힘을 주지 않고, 가벼운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는 오픈 스페이스에 가깝죠. SoA에 사옥 설계를 의뢰했을 때도 이런 생각을 전했더니 지하에 층고 높은 공간을 마련해주었어요. 올해도 이곳에서 몇몇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브랜드와 전시 계획을 협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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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아크’. 〈하우스비전 2022 코리아 전람회〉에서 송봉규가 작가로서 선보인 작품이다. 그가 제안한 다용도 농막은 제품 관점에서 건축을 바라본 것이 특징이다.
클라이언트 하우스비젼 프로젝트 기획 하라 켄야 참여 디자이너 송봉규, 배민관
그렇다면 업계 선배로서 최근 골몰하고 있는 이슈가 있나요?

특히 요즘엔 프로젝트의 단가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젊은 디자인 스튜디오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한국의 디자인 단가가 지나치게 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부 경쟁의 심화 탓도 있지만, 제값을 받기 위해 우리 스스로 얼마나 노력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필드에 좋은 디자이너가 꾸준히 유입되려면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이언트와 단가 논쟁을 벌이자는 게 아닙니다. 더 좋은 계약 관계가 될 수 있게 노력하고 무리한 요구가 되지 않도록 계약서상 안전장치를 충분히 만들어둬야 하죠. 좋은 성과가 있을 때 다음 프로젝트에서 좀 더 당당히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태도도 갖춰야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런 요구가 해외에선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지지만, 국내 기업과 일할 땐 관행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생태계를 위해서 천천히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BKID 포트폴리오 @D.find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4호(2025.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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