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가 처음 손을 내민 한국 브랜드, 혜인서(HYEIN SEO)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브랜드가 살아남는 법

​유난히 올해 상반기에는 '혜인서'의 이름이 더욱 자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시대복장》전부터 나이키와의 협업, 그리고 새로운 컬렉션까지 발매한 혜인서. 올해 가장 바쁜 상반기를 보낸 한국 디자이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바쁜 시기가 지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혜인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서혜인과 최근의 작업물부터 K 패션에 대한 생각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나이키가 처음 손을 내민 한국 브랜드, 혜인서(HYEIN SEO)

얼마 전, 한국 패션계가 들썩였다. 나이키가 처음으로 한국 패션 브랜드와 협업해 스니커즈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나이키가 선택한 브랜드는 바로 ‘혜인서(HYEIN SEO)’. 많은 매체에서는 한국 패션 역사에 기념비적인 일이라고도 입을 모으기도 했다. ‘혜인서’는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디자이너 서혜인이 이진호와 함께 앤트워프에서 론칭한 브랜드로, 데뷔 시즌부터 전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2018년 한국으로 기반을 옮기며 독보적인 감성으로 브랜드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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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IN SEO x NIKE’ CAMPAIGN PHOTO ⓒHYEIN SEO

​유난히 올해 상반기에는 ‘혜인서’의 이름이 더욱 자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시대복장》전부터 나이키와의 협업, 그리고 새로운 컬렉션까지 발매했다. 올해 가장 바쁜 상반기를 보낸 한국 디자이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바쁜 시기가 지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혜인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서혜인과 최근의 작업물부터 K 패션에 대한 생각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Interview

서혜인 HYEINSEO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가장 최근의 작업부터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한국 브랜드 최초로 나이키와 협업을 진행했어요. 어떻게 시작된 협업인가요?

브랜드를 운영하며 하나의 목표가 있었는데 나이키와의 협업이었습니다. 2017년에 나이키에서 스폰서를 받아 런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FINAL BOSS’라는 타이틀의 컬렉션이었고, 당시 나이키에서 새로 출시되는 ‘Vapor Max’라는 모델과 어울리는 컬렉션을 제안했어요. 그 프레젠테이션 이후에도 컬렉션에 필요한 신발 등 다양한 부분에서 나이키의 서포트를 받으며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습니다.

그때 관계자에게 ‘나이키와 협업하려면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을 삼가는 편이 유리하다’는 팁을 받았어요. 그래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스포츠 브랜드의 협업 제안이 있었지만, 언젠가 좋은 계기로 나이키와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차분히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2년 전에 나이키 글로벌에서 자기 색이 뚜렷한 한국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은 나이키 코리아에서 저희를 추천하면서 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어떤 부분에 가장 포커스를 맞추고 기획과 디자인을 진행하셨나요?

저는 내러티브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게 ‘혜인서’라는 브랜드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염두에 두었던 부분은 협업으로 출시되는 제품뿐만 아니라 신발에 어울리는 룩부터 촬영까지 전체적인 그림을 구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제품 비주얼부터 모델, 포토그래퍼, 비디오그래퍼, 이벤트 기획까지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저희가 직접 선정하고 디렉팅 할 수 있게 요청드렸습니다. 나이키에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을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을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스니커즈 출시 프로젝트는 예산이 꽤 많이 드는 작업이라, 저희가 여태껏 운용할 수 없었던 큰 스케일의 프로덕션팀들과도 합을 맞추었는데요. 물론 어려운 부분도 많았지만,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신뢰가 나이키 측에서 당연한 일은 아닐 텐데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했어요.

— 이번 나이키의 모델은 ‘070 Shake’ 였죠. 이전에도 실리카겔, 우원재, 뉴진스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과도 협업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기준으로 아티스트를 선정하셨나요?

한국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혜인서’와 어울리는 인물을 떠올렸을 때 ‘070Shake’가 1순위였습니다. 그녀가 만드는 음악도 좋아했지만, 터프하면서도 섬세하고 우아한 면을 동시에 지닌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늘 관심이 가는 인물이었어요. 섭외는 저희가 직접 진행했는데 ‘070Shake’가 작업물을 보고 흔쾌히 허락을 해줘서 성사 당시에 정말 기뻤습니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만나보니 겸손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 감동을 받았어요. ‘좋은 사람이 아름다운 것도 만들어 내는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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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IN SEO x NIKE’ CAMPAIGN PHOTO ⓒHYEIN SEO

​— 콕 집어서 ‘나이키와 협업하는 것이 목표였다’라고 할 만큼, 꼭 나이키여야 했던 이유가 있나요?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럴 것 같은데요. 저도 시즌의 착장을 구상할 때 신발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화의 한 모델을 염두하고 피팅을 보고, 제작 단계에서 색감과 디테일을 따와 옷에 적용하기도 하고요. 흥미로운 아카이브 피스들도 이베이 등으로 많이 찾아보는데 그 선택의 대다수가 나이키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협업하고 싶었던 브랜드라 여겼습니다. 솔직하게는 로고의 아름다움이 주는 힘도 큰 것 같아요. 옷을 디자인할 때 로고를 크게 혹은 돋보이게 사용하는 편은 아닌데 그럴 때마다 ‘나이키 로고를 얹으면 완성이 될 텐데’하며 팀원들과 웃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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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시대복장》 (일민미술관, 2025.5.30.─7.20.) 3전시실, 프로세스 보드 ⓒHYEIN SEO

— 2025 상반기는 정말 바쁘셨을 것 같아요.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했던 《시대복장》전에도 참여하셨는데 어떤 기획으로 참가했는지 궁금해요.

전시는 1년 정도 준비를 했습니다. 시작은 일민미술관과 자주 협업하는 출판사이자 디자인 스튜디오인 ‘워크룸 프레스’ 측의 협업 제안이었어요. 워크룸 프레스와 함께 10년의 작업물을 엮어 책으로 만들던 중 ‘책에 다 담을 수 없는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냐?’라는 의견을 주셨고, 이걸 바탕으로 일민미술관 측과 논의 후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미술관 측에서도 동시대 패션이 시대의 미감과 정서를 어떻게 수용하고,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흥미롭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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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시대복장》 (일민미술관, 2025.5.30.─7.20.) 프로젝트룸, 대기실 ⓒ HYEIN SEO

전시에는 총 8개의 컬렉션을 선별해 선보였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20개가 넘는 컬렉션을 만들었지만 초기 작업은 자료와 재료가 전시할 만큼 풍부하게 모이지 않아 제외했습니다. 앤트워프에서 서울로 완전히 터전을 옮긴 2017년 이후의 작업물을 보여주는 게 전시의 취지와도 맞다고 생각했어요. 큐레이터분들과 논의하면서 공이 많이 들어갔던 컬렉션, 그리고 전시로 보여줄 내용이 풍성하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작업 중심으로 선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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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시대복장》 (일민미술관, 2025.5.30.─7.20.) 3전시실, 프로세스 보드 ⓒHYEIN SEO

— <시대복장>전을 보다보니 액서서리와 스트랩 같은 디테일에 공예적인, 그러니깐 수작업이 필요한 요소가 많은 것 같았어요. 사실 제작하기도 힘들고 수고로운 작업일 텐데 많이 진행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저는 꿰고, 엮고, 뜨개질하고, 자수를 놓는 등 손으로 만드는 섬세한 작업을 좋아합니다. 학생 시절에도 계속해서 수정이 필요한 패턴 작업보다 손을 써서 만드는 일에 더 즐거움을 느꼈고요. 그리고 얼마 전 옷장을 정리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어요. 오랫동안 버리지 못한 옷들은 대부분 그런 정성이 담긴 디테일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런 요소를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공예적인 디테일에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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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시대복장》 (일민미술관, 2025.5.30.─7.20.) 3전시실, 프로세스 보드 ⓒHYEIN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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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시대복장》 (일민미술관, 2025.5.30.─7.20.) 프로젝트룸, 대기실 ⓒHYEIN SEO

그런 디테일을 만드는 과정은 즐겁지만, 대량생산에 들어가면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습니다. 한 벌은 쉽게 만들 수 있어도 수백 벌이 되면 제작자와 팀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타협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어요. 그래서 모든 시즌에 그런 디테일을 담지는 않고 어떤 시즌은 디자이너로서 욕심을 담은 작업에 집중하고, 다음 시즌은 오히려 기능과 구조에 초점을 맞추며 균형을 맞춰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디테일을 덜어내는 일도 결코 쉽지 않고,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떤 옷이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옷은 없기에 수작업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소비자들이 작은 디테일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 그럼 워크룸 프레스와 함께 협업해 하반기에 출시할 책은 어떤 형태로 출시되나요?

편집자님이 제안해 주신 구조는 평행하는 두 권의 책입니다. 한 권은 ‘혜인서’의 10년의 작업물을 정리한 아카이브 북입니다. 다양한 결을 가진 그동안의 작업을 단정하게 시간순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권은 워크룸 프레스의 편집팀 주도하에 소설, 에세이, 비평 등이 담길 예정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두 번째 책이 보고 싶은 마음에 출간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책과 전시를 준비하며 지난 컬렉션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앞으로의 방향성을 담은 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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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 ‘게으름La paresse’ (1896)

— SS 25 시즌은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 어떤 컬렉션인지 궁금합니다.

SS25 컬렉션은 준비 기간이 부족했어요. 평소엔 약 세 달 정도 여유를 두고 새로운 자극이나 레퍼런스들을 보고, 조합하며 컬렉션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번엔 옷을 만드는 시간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전시와 나이키 협업 준비 기간이 겹쳐서 다른 것들을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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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25 CAMPAIGN PHOTO ⓒHYEIN SEO

그래서 제게 가장 익숙한 집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입는 옷에서 시작해보자고 정했어요. 자주 사용하지 않던 소재들이라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놀라긴 했지만, ‘혜인서’에서 다루지 않았던 쉬폰 커튼, 꽃무늬 패브릭, 실크 같은 홈 인테리어나 란제리에 쓰는 소재들을 다뤄보고 싶었어요. 컬렉션을 만들면서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의 ‘게으름(La paresse)’이라는 목판화를 참고했고, 이 이미지의 무드가 룩북 모델 키코 미즈하라(Kiko Mizuhara)와 함께 도쿄 외곽의 친구 집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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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25 CAMPAIGN PHOTO ⓒHYEIN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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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25 CAMPAIGN PHOTO ⓒHYEIN SEO

— 최근 컬렉션 중 FW24 ’Near to the wild heart’ 컬렉션이 인상적이었어요. 에스닉한 무드를 품고 있으면서도 ‘혜인서’만의 스트리트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컬렉션이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신다면.

한 컬렉션을 만드는 동안 많은 것을 보며 이야기에 살을 붙여가는데요. 시작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의 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였습니다. 힘 있는 제목이라 생각했고, 작가의 생이 맨발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여자 같아서 매력적인 소재로 느껴졌습니다.

FW24’Near to the wild heart’ CAMPAIGN VIDEO ⓒ HYEIN SEO

컬렉션의 디테일로 도자기 단추를 써보고 싶었는데, 연이 닿아 앤트워프 예술 학교의 선배이자 지금은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엘리제 게트리프(Elise Gettliffe)와 협업을 진행했어요. 서로 보고 느꼈던 것들을 메신저로 주고받으며 함께 컬렉션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엘리제가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검은 흙을 이용해 도자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검은 땅이 드넓은 풍경과 도자기 유물들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에스닉한 무드를 느끼신데는 이런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엘리제가 만든 도자기의 색과 문양을 니트로 짜보기도 하고, 멕시코의 검은 흙으로 만든 단추를 어디다 써볼까 고심하며 만들었어요.

— 다음 시즌은 어떤 기획으로 진행됐나요?

《시대복장》 전시를 열고 저도 몇번 더 방문했었는데, 완성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래서 새 시즌은 좋아했던 컬렉션을 돌아보며 당시 못해봤던 것들, 아쉬웠던 것들을 꺼내보기로 하고 컬렉션을 시작했습니다. 오래된 페르시아 카펫의 문양을 써보고 싶었고, 매듭 공예를 할 때 주로 사용하던 소재 대신 저지 원단을 직접 잘라서 옷에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 완성상을 그려놓고 만들어가기보다는 손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향을 따라가보기도 하고,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오트밀, 민트같은 파스텔 컬러를 많이 적용해보며 재밌게 작업했습니다. 다 만들고 옷을 입은 모델들을 보니 90년대에 방영했던 안노 히데아키(Anno Hideaki)의 만화〈신비한 바다의 나디아〉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어느덧 브랜드 운영하신 지 10년이 넘으셨어요. 긴 시간 동안 새로운 작업물들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나요?

브랜드를 운영한 지 10년이 되다 보니 일의 고충도 자연스럽게 겪게 되고, 처음처럼 모든 일이 새롭고 즐겁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만들기의 즐거움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다채로운 미감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 협업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 마감의 순간에 한 목소리로 완성될 때 여전히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만들어 낸 것들이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누군가에게 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저희의 옷을 입고 춤을 추고, 뛰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그 옷이 사람의 움직임과 함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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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혜인서는 그래픽, 슬로건과 같은 스트리트 컬쳐의 요소를 많이 사용하며 ‘스트리트 쿠튀르(Street Coutre)’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왼쪽) FW14 ‘Fear Eats the Soul’ LookBook. (오른쪽)SS15 ‘Bad Education’ CAMPAIGN PHOTO ⓒHYEIN SEO

— 그래픽, 슬로건같은 스트리트 컬처 요소들을 많이 사용했던 초기에 비해 스타일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많은 분들이 여쭤보는 질문인데, 10년 전의 스타일을 고집했다면 지금까지 이 브랜드가 존재했을까 하고 생각해요. 브랜드를 시작하는 시기에 제시했던 스타일이 당시에는 신선하고 적절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넘칠 만큼 많은 로고와 슬로건의 변주들 속에서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시대도 사람도 끊임없이 변하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갈 테니 지금에 맞는 디자인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전하며 새로운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 패션 디자이너로서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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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23 ‘Horizon’ CAMPAIGN PHOTO ⓒHYEIN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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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22 ‘Nausicaä’ CAMPAIGN PHOTO ⓒHYEIN SEO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생각하는 지금의 ‘혜인서’만의 색은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 동안 옷을 통해 여러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 왔는데요. 이 브랜드의 색은 위의 대답처럼 계속 바뀔 거예요. 저도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고, 제가 이 일을 하는 동안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다는 욕심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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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19 ‘Save Yourself’ CAMPAIGN PHOTO ⓒHYEIN SEO

스타일과 관심사는 계속 변해갈 테지만, 그 어떤 이야기로 풀던 언제나 단단하고 강렬한 여성성에 대해 유념하고 있어요. 저는 내부에서 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으니 밖에서 봤을 때 어떻게 비치나 궁금해서, 언젠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모델로도 여러 번 함께 해주신 김솔이 작가님이 ‘혜인서’의 인물들은 스포츠 만화 주인공의 그림체를 닮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고교 야구대회 결승을 앞둔 선수들 같다고, 잘 싸울 것 같다고 말했는데, 당시에 듣고 크게 웃었지만 어쩐지 수긍이 갔어요. 튼튼한 다리로 현실을 디디고, 앞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단단하게 마주하는 눈빛을 가진 여자들을 좋아합니다.

​— 지금까지 만들었던 수많은 컬렉션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마음에 드는 시즌은 어떤 컬렉션인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컬렉션 중 하나는 SS21 시즌이었던 ‘달의 궁전(Moon Palace)‘입니다. 폴 오스터(Paul Auster)의 소설 제목에서 가져왔어요. 죽음에 가까웠던 주인공이 여러 우연과 인연을 마주하며 삶을 살아내고 성장하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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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21 ‘Moon Palace’ CAMPAIGN PHOTO ⓒHYEIN SEO

함께 작업한 그래픽 아티스트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인도 출신의 솜나트 밧(Somnath Bhatt) 이였어요. 그가 만든 니콜라스 자르(Nicolas Jaar) 라는 음악가의 앨범 아트를 보고는 꼭 한 번 같이 일해보고 싶어서 연락을 했습니다. 보통은 메신저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옷에 쓰일 도안들을 함께 만들어 갔습니다. 저는 소설 이야기와 옷을 만드는 과정들을 공유하고, 솜나트는 인도 신화와 그곳의 다양한 직물과 그림을 보여줬어요.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사담도 나누고 서로의 세계를 공유하며 천천히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친구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고 느껴요. 마음 맞는 사람과 일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가 보여준 공예적인 요소들은 이후 컬렉션에도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 패션은 옷부터 사진, 영상 등 종합적인 요소들이 합쳐진 종합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협업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협업은 어떤 것이었나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협업들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남았던 협업 중 하나는 사운드 아티스트 루드윅 버거(Ludwig Burger)와 함께 진행했던 스토어의 소리 설치 작업입니다. FW23 컬렉션을 만들던 당시에 그가 만든 필드레코딩 작업들을 자주 들었어요. 그는 스위스에서 활동하며 빙하와 용암 소리를 채집해서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냈는데요. 보이지 않는 소리가 컬렉션에 어떻게 반영이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다 설명할 수 없었는데, 스토어라는 공간이 생기고서는 루드윅을 직접 초청해 그의 작업물을 열두 개의 다른 스피커로 틀었습니다. 용암 소리를 미세하게 조정하니 작은 새소리같이 들렸는데 예상치 못한 청각적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Soundwork by Ludwig Berger ⓒHYEIN SEO

다가올 협업은 앞에 언급했던 대로 워크룸 프레스와 함께 만든 책의 출간이 있어요. 문학 총서를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와 함께 만든 책이 이 브랜드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스텝이 될 것 같아요. 여태껏 기존에 출판된 글들로 컬렉션을 만들며 영향을 받았는데, 언젠가는 소설가와 시작부터 이야기를 만들며 컬렉션을 만들어가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해외에서는 여전히 K패션이 강세라고들 하잖아요. 한국에서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K 패션’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현재 한국의 패션은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K 팝의 세계적인 인기에 힘도 얻고 있고요. 이 브랜드도 K 팝의 성장 속에서 많은 아티스트들이 입어 줌으로써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를 했던 유럽은 이미 오랜 문화 축적이 있어서인지 뭔가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다소 약해졌다고 느껴져요. 반면 한국은 변화의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무언가를 부수고, 또 새로 만드는 과정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큰데요. 이건 사실 창작자들에게는 좋은 환경일 수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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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19 ‘Save Yourself’ CAMPAIGN PHOTO ⓒHYEIN SEO

— 그럼, 그 흐름 속에서 ‘혜인서’는 어떤 포지션을 유지하고 싶은지 궁금해요.

워낙 바쁘게 달려오느라 지난 시간과 작업을 깊고 차분하게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에《시대복장》전시를 준비하며 십 년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도 전시를 올리고 두어 번 혼자 더 미술관에 가서 관람했는데, 깨달은 건 저는 분류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혜인서는 이런 브랜드야’라고 단정을 지으면 저는 거기서 멀어지고 싶어졌어요. 이미 만들어 낸 것들은 스스로 지겨워지고, 비슷한 류의 옷들이 많이 보이게 되면 또 새로운 주제를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지난 십 년의 행보였어요. 일관된 스타일을 반복하는 게 세일즈 면에는 좋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저희와 맞지는 않았어요.

지용킴은 소재를 너무나 깊이 있게 잘 다루는 디자이너이고, 포스트 아카이브 팩션(파프)은 옷의 구조적인 패턴을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린 디자이너라면, 저는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강점이 있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주제를 다루더라도 ‘혜인서’만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의 여성성을 제안하는 브랜드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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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18 ‘Waste Land’ CAMPAIGN PHOTO ⓒHYEIN SEO

— 앞으로 혜인서는 어떤 브랜드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몇 년 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1930-40년대 문학인과 미술인들의 교류를 다룬《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시를 본 적이 있어요. 100년 전 사람들이니 지금은 이제 모두 세상에 없겠다고 생각하니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젊은 문인들과 미술가들이 주고받은 서신들, 자주 모였던 장소들의 기록, 그들끼리 남긴 사진들을 보며, 새삼 ‘지금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팀원들, 동료들, 음악가와 작가들의 교류안에서 이 브랜드도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한 시대의 정신과 미감이라는 것도 생기는 것이구나’를 새삼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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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19 ‘Save Yourself’ CAMPAIGN PHOTO ⓒHYEIN SEO

저는 시대의 적절한 화두와 꺼내야 할 필요가 있는 주제들을 옷이라는 매체를 통해 적절하게 다루며 유연하게 다음 챕터로 흘러가는 브랜드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먼 훗날 지금을 돌아봤을 때 2020년대와 3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초상 속에 남아 그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던 디자이너로 기억된다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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