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김종성

건축의 인생, 건축가의 인생

힐튼서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이 호텔을 설계한 건축가 김종성이다. 남산 피크닉에서 열린 〈힐튼서울 자서전〉을 둘러본 소회와 건축가로서의 일생, 그리고 힐튼서울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Special Interview]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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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생.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재학 시절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6년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교(IIT)에 입학했다. 1961년 건축학사, 1964년 건축학 석사를 취득한 그는 학부 졸업 후 미스 반데어로에의 사무실에 입사해 다수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66년 IIT 건축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1972년 부학장, 1978년 학장까지 역임했으며 서울 힐튼호텔 설계를 계기로 한국에 돌아와 서울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를 이끌었다. 대표작으로 힐튼서울, SK서린빌딩,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서울올림픽 역도경기장 등이 있다. 2014년 문화훈장을 수훈하고 한국건축가협회 골드 메달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먼저 〈힐튼서울 자서전〉을 둘러본 소감이 궁금합니다.

근래에 보기 드문 고밀도 전시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알찬 건축 전시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죠. 치밀한 계획과 다양한 아카이브 자료가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그게 전시를 둘러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입니다. 이번 전시가 있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어요. 피크닉 김범상 대표와 임직원 여러분, CAC의 정다영, 김희정, 정성규, 곽승찬 큐레이터 그리고 전시 디자인을 맡은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기획관…. 이 인터뷰를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군요.

선생님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자 동료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IIT에 몸담고 있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반격이 거센 시기였잖아요. 당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1966년부터 IIT에서 조교수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강의가 없는 날엔 미스의 사무실에 출근해 설계를 병행했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968년에 베트남전쟁에 따른 대규모 반전 운동이 일어납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도 고개를 들었죠. 우리, 특히 미스 반데어로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겐 공공의 적이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지적에 일리가 있는 구석도 있어요. 일부 모더니즘 건축이 주변 환경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반성하며 수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보진 않았어요. 오히려 로버트 벤추리, 찰스 젠크스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나 이론가들이 신고전주의 건축에 우호적인 모습이 난센스라고 생각했죠.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단명한 건축 사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유효했던 것은 고작 10년 남짓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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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서울 대지 종단면도. 제공 서울건축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을 계승하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선생님만의 건축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한국과 미스의 주 활동 무대였던 시카고는 상황이 달랐으니까요. 1978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국내 건설계가 제공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법이나 재료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한된 조건 안에서 실현 가능한 공법을 찾아야 했죠. 대지를 해석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습니다. 미스 반데어로에가 기본적으로 대지를 해석하는 관점은 고대 그리스 신전과 맞닿아 있어요. 넓은 대지 위에 평평한 포디움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건축물을 얹는 것이죠. 그런데 한국에선 그러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 쉽지 않아요. 평평한 땅이 많지 않고 부지에 대부분 경사가 있습니다. 경사를 건축적으로 풀어나갈 때 저 역시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이를 가장 잘 풀어냈다고 자부하는 게 힐튼서울입니다. 호텔 부지의 낙차를 디자인으로 적극 수용했어요. 지하 1층부터 지상 1층까지 4.8m, 1층에서 2층까지 7.2m, 여기에 천장까지 6m를 더해 18m의 높이 차가 한눈에 들어오게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가슴이 솟구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정리하자면
당시 한국의 부족한 테크닉을 감안해 한 수 양보하고, 미스 반 데어로에의 건축 언어를 적극적으로 바꿔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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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서울의 공사 현장. 사진 임정의
사실 선생님의 건축에선 미스 반데어로에뿐 아니라 루이스 칸의 특징도 엿보입니다.

미스 반데어로에를 사사하기도 했고, 모신 입장에서 누구보다 그의 디자인 언어와 철학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한 가지 늘 의아한 점이 있었어요. 미스는 실내 공간에 자연광을 들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때마침 루이스 칸이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저는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킴벨 아트
뮤지엄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포스트텐션으로 30m가량 기둥 없이 구성하고, 프리캐스팅으로 제작한 곡면 천장 사이로 풍성한 자연광이 들어오죠.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터라 ‘앞으로 내가 설계하는 공간에 자연광을 적극 들이리라’ 마음을 먹었죠.

앞서 말씀하셨듯이 당시 국내 건설 기술은 아직 미흡했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런 난관은 어느 정도 예상하셨을 텐데요.

시카고에 터를 잡고 있을 때도 한국 건설업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시공을 시작하는 등 상승 곡선을 타던 때였죠. 지금껏 건축가로 활동하며 배우고 쌓아온 것을 발휘해 한국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때 마침 대우그룹 창업주인 김우중 회장과 인연이 닿았어요. 당시 정부는 골조 공사만 마친 교통센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대우에게 외화벌이에 도움이 되는 호텔을 지으라고 강권했어요. 장려가 아니라 거의 강권.(웃음) 아무튼 김우중 회장은 해외 경험이 있는 한국인 건축가를 수소문하던 중 저를 찾았습니다. 당시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에서 김우중 회장과 만났는데 이야기를 듣고 참여를 결정하는 데 2~3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힐튼 프로젝트가 시작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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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유리 아트리움 천장으로 자연광을 들였다. 사진 임정의
남산을 끌어안은 형상의 외관도 인상적이지만 사실 저는 알루미늄 커튼월의 색상 선정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힐튼이 말하다〉를
읽어보니 당시 서울 시내의 대기오염을 감안한 선택이었더군요.

대기 환경을 고려하는 것은 교육 훈련 과정에서 습득한 것이었습니다. IIT 재학 시절 도시계획가 루트비히 힐베르자이머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바우하우스에서 미스 반데어로에와 함께 교수로 지내다 미국으로 망명한 분이었죠. 당시 그는 학부생들에게 대기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제 머릿속에 각인됐습니다. 처음에는 은빛 커튼월을 생각했는데 자동차가 배출하는 배기가스의 끈적한 기름과 흙먼지 때문에 몇 년 못 가서 더러워질 것 같았어요. 게다가 당시 서울은 주로 석탄을 때고, 중유를 쓰던 때라 겨울에는 특히 매연이 엄청났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선택이었어요.

인테리어 소재의 선택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힐튼 로비에 총 네 가지 주재료를 적용했습니다. 녹색 대리석과 벽면 마감과 바닥 일부에 적용한 트래버틴, 기둥 등에 적용한 브론즈 그리고 벽면을 구성하는 오크 패널이 그것이죠. 미스 반데어로에도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네 가지 주재료를 사용했는데 거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체코 남모라바주 브르노에 위치한 빌라 투겐타트에서도 재료의 배합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공부하면서 내 건축 언어로 소화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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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대리석이 두드러졌던 힐튼서울의 로비. 사진 임정의
남산 힐튼에 대한 선생님의 애착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소유주가 바뀌고 철거가 결정됐을 때 반응이 의연해서 다소 의아했습니다. 건축을 원안 그대로 보존하자고 주장하기보다 여러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하셨고요.

물론 처음 철거 소식을 들었을 땐 충격적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어요. 힐튼을 지을 때 용적률 600%를 허용할 수 있는 부지였습니다. 그런데 730개 객실을 짓고 나니 용적률의 350%만 차지하게 됐습니다. 남은 250%가 공지로 남은 셈이죠. 그래서 언젠가 더 큰 건물을 짓고 싶어 하는 사업주가 나타날 거라고 직감했어요. 게다가 저는 자유시장경제의 순환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 숙명으로 받아들였죠.

오히려 국내 건축계에서 철거에 강경히 반대했습니다.

맞습니다.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 건축학회가 공동으로 서울시에 힐튼서울을 보존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죠. 당시 서울시도 이러한 제안을 일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던 것으로 압니다. 건축역사학회 역시 비슷한 취지로 서울시에 제안했는데 그때도 유화적인 답변을 내놨다고 하고요. 결론적으로 보존하진 못하게 됐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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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정의
그런데 건축계 바깥의 사람들에겐 이러한 반응이 선뜻 와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제적 논리로 탄생한 호텔이 경제적 논리로 사라지는 것이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니까요. 이것은 힐튼서울이 자본의 논리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설계 당사자로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좀 쑥스럽지만, 아마 남산 힐튼이 당시 한국 건축계에서 하나의 성취이자 산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건축가들에게 용적률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1980년대 한국 건축 기술의 집대성이란 가치일 테지요.

사실 자본의 논리로 치면 미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미국조차 가치 있는 건축은 보존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죠.

미국의 경우 공공의 협의가 이뤄지면 도시의 조례에 따라 건물을 보존하죠. 예를 들어 뉴욕에선 도심 내에 가치 있는 건축을 선별하는 위원회를
별도로 제정하고 기준에 부합하는 건물을 심사에 부칩니다. 이를 통과하면 재산권을 손보더라도 철거는 물론 증축이나 변형에도 제약을 가해요. 대신 다른 것을 부분적으로 허용해주는 방식으로 건축주의 권리를 보장하고요. 지금 한국의 제도적 문제점은 보존할 건물의 대상이 주로 근대건축만 해당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해방된 지도 이제 80년이 되었어요. 그사이에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 과연 없었을까요? 뭐든지 쉽게 지우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상황은 이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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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리움. 낙차를 활용해 로어 로비부터 2층 천장까지 공간이 트이게 설계했다. 사진 임정의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시민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던 점도 현재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 요인인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단순히 부동산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이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의 논리로 따지면 수십 년 된 낡은 호텔을 허물고 새로운 호텔을 짓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죠. 힐튼서울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최소한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식을 재고하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해요. 보존 가치가 있는 건축물의 연한을 낮출 필요도 있고요. 이번 전시도 그런 반향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전시를 둘러본 관람객들이 힐튼서울의 가치를 되뇌고, 이것이 각인된다면 하나의 무브먼트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거예요. 힐튼서울의 살신성인으로 그러한 움직임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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