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미소바케카케 손규리 디자이너: 이야기를 재료로 케이크를 디자인하다

손규리 미소바케카케 디자이너

미소바케카케의 손규리 디자이너는 의뢰인의 사연을 색과 형태로 번역해 감정의 한 장면처럼 케이크로 구현한다. 최근 엔믹스 정규앨범 커버와 tvN ‘셀럽 케이크’로 주목받으며 사라지는 매체 위에서도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확장해 왔다.

[Creator+] 미소바케카케 손규리 디자이너: 이야기를 재료로 케이크를 디자인하다

editor’s note

미소바케카케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연을 케이크로 표현하는 작업실입니다. 이곳을 운영하는 손규리 디자이너는 의뢰인들의 사연을 ‘일기장의 한 페이지’처럼 받아들이죠. 한 장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색과 형태로 풀어 케이크에 담아내고, 그 과정을 하나의 조형 작업처럼 이어갑니다. 지난 10월, 엔믹스(NMIXX)의 정규앨범 1집 [Blue Valentine] 커버에 등장한 케이크 역시 이렇게 만들어졌죠. 멤버별로 각기 다른 콘셉트와 서사를 케이크에 담아낸 건데요. 시안을 세 차례 조정하며, 감정과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해석한 작업이었죠. CJ ENM의 콘텐츠 채널인 tvN과 협업해 선보이고 있는 ‘셀럽 케이크’도 눈길을 끕니다. tvN 드라마와 예능 속 캐릭터와 서사를 케이크로 재구성해 선보이는 흥미로운 실험이죠. 조소 전공과 회사 생활, 갤러리 경험을 거쳐 케이크라는 매체를 만난 뒤 손규리 디자이너는 자신만의 시각 언어를 만들어 왔습니다. 사라지는 재료는 오히려 작업의 완결을 분명하게 하고, 매일 다른 사연은 창작의 원천이 되죠. 케이크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DSC09567
미소바케카케를 운영 중인 손규리 디자이너

PLUS 1. 디자인 언어로 사연을 번역한 케이크

지난 10월 발매한 엔믹스(NMIXX)의 정규앨범 1집 [Blue Valentine] 커버에 등장한 케이크가 X(구 트위터)에서 팬들 사이 큰 화제를 모았어요. 멤버별로 각기 다른 디자인을 적용한 케이크를 선보였다고요.

엔믹스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올해 tvN과 함께 진행해 온 ‘셀럽 케이크’ 시리즈를 보고 제 작업 방식이 잘 맞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후 멤버별로 케이크를 하나씩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앨범이 정규 1집인 만큼 멤버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정체성과 캐릭터 정보를 전달받았어요. 소속사에서는 그 이미지를 미소바케카케 스타일로 자유롭게 해석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실제로도 해석을 열어두고 자율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많이 믿어주셨어요. 그래서 멤버마다 다른 분위기와 성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디자인할 수 있었습니다.

KakaoTalk 20251210 182512138
엔믹스(NMIXX)의 첫 정규 앨범 [Blue Valentine] 커버에 등장한 미소바케카케의 케이크 사진 엔믹스 X 공식 계정, JYP엔터테인먼트
이전까지는 개인 의뢰를 중심으로 디자인해 오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기획사나 브랜드와의 협업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은 개인 의뢰와 브랜드 협업 사이에 큰 차이를 두고 있진 않아요. 하지만 초창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어요. 브랜드 의뢰는 브랜드가 원하는 비주얼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 방향에 맞춰 작업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미소바케카케의 정체성과 디자인 언어가 뚜렷해지면서, 기업이나 브랜드에서도 제 방식을 존중해 의뢰를 주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지금은 요구사항을 그대로 구현하는 ‘주문 제작’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제가 해석한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됐죠. 브랜드든 개인이든, 결국 이야기를 어떻게 조형적으로 풀어내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엔믹스와의 협업에서는 케이크를 18개나 제작했다고 들었어요. 작업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여섯 명 멤버별로 세 번씩 제작해서 총 18개를 만들었죠. 각 멤버의 케이크를 3차 시안까지 조정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때마다 ‘똑같은 케이크’를 다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어요. 촬영을 위한 디테일들이 있다 보니 시안 조정이 여러 번 필요했어요. 케이크 위에 올리는 오브제나 색감이 화면에서 어떻게 보일지, 촬영 중에 부서지거나 먹는 장면이 필요한지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이번 작업은 제일 큰 사이즈의 케이크로 제작해서 육체적으로도 꽤 힘들었어요. 촬영 날에는 ‘이전과 똑같이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도 있었고요. 그래도 최종 결과물이 잘 나왔고, 개인적으로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KakaoTalk 20251210 115313443 06
의뢰인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 케이크 디자인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신 건가요?

인물의 사연을 담아 케이크를 만드는 방식은 사실 제 예전 미술 작업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흐름이에요. 작업을 할 때도 늘 다른 사람의 삶이 궁금했고, 그들의 경험을 통해 제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길 바랐거든요. 그래서 거리에서 주운 물건이나 누군가의 흔적이 담긴 것들을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그 이야기들을 엮어 하나의 작업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을 오래 해왔어요.

KakaoTalk 20251205 110343487 13 3
조소를 전공하며 제작한 손규리 디자이너의 작업물

미소바케카케의 케이크 디자인도 그런 태도에서 출발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주문 제작 형태로 시작했지만, 그 방식이 제게는 잘 맞지 않더라고요. 단순히 ‘이 문구를 써주세요’, ‘이 이미지를 넣어주세요’ 같은 요청을 수행하는 건 창작이라기보다 기술적인 구현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방식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결국 예전 미술 작업에서 하던 것처럼 이야기를 출발점에 두게 되었죠.

꼭 라디오 프로그램 같네요. (웃음) 제작해 오신 케이크 개수만큼 다양한 사연을 접하셨겠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별에 관한 사연이 기억에 남아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별을 나름의 ‘기념일’처럼 챙기더라고요. 한 번은 다음 달에 헤어지기로 약속했다고,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자는 의미로 케이크를 주문하신 분이 계셨어요. 처음에는 ‘이별하는데 왜 케이크를?’ 하고 이해가 잘 안됐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감정이 묘하게 와닿았어요. 독특하지만, 그들만의 방식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한데 그렇게 감정에 이입하기 어려운 사연은 디자인으로 해석하기 어렵지 않나요?

그렇죠, 사실 감정에 완전히 이입하는 건 어려울 때가 많아요. 제가 겪어보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고, 말씀드렸던 이별 사연처럼 처음 들었을 때는 ‘이걸 왜 케이크로 하지?’ 싶은 경우도 있거든요. 근데 저는 사연을 막 깊게 파고들지는 않아요. 앞뒤를 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요. 그냥 그 한 페이지? 딱 그 문장만 읽고 느껴지는 분위기나 톤만 잡아요. 그 정도만 있어도 작업은 할 수 있거든요. 완전히 이해를 못하더라도, 사연이 조용한 감정인지 밝은 감정인지, 복잡한 느낌인지… 그런 건 또 바로 느껴져요. 그래서 제가 그걸 디자인으로 옮기는 거지, 논리적으로 해석해서 만들지는 않아요. 그 순간의 분위기를 케이크 위에 담는다는 느낌이 더 큰 셈이죠.

PLUS 2. 케이크 디자이너가 된 K-직장인

DSC08895 2
미소바케카케의 ‘미소’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좋아해 붙였다고.
학부부터 박사까지 조소를 전공하셨더군요. 원래도 손재주가 좋았던 편이세요?

손으로 만드는 건 무엇이든 잘했던 것 같아요. 입체로 만드는 건 쉬웠는데, 평면에 그리는 건 어렵더라고요. 조소가 잘 맞았죠. 예술고등학교를 진학할 당시 주변에서 ‘디자인을 해야 먹고 산다’, ‘요즘은 디자인이 대세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디자인과로 입학은 했는데 평면 작업이 저랑 너무 안 맞더라고요. 2년을 디자인과에서 보내고, 마지막 1년은 조소과로 전과했어요. 그렇게 대학교도 이어서 조소과로 진학했고요.

그러다 돌연 회사에 또 취업하셨어요.

계속 조형 작업만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게 정말 맞는 길인지 고민이 많이 됐어요. 어릴 적부터 미술밖에 해본 게 없어서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작업이 지루해졌던 시기도 있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찍 산책하는데,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직장인에 대한 로망과 환상이 생기더군요. 마침, 드라마 <미생>도 유행하고 있었고요. ‘나도 저런 세계를 한번 살아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었죠. 작업을 잠시 내려놓고 취업을 결심했고, 호텔 인사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미술이나 디자인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 끌렸죠.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거든요.

DSC09054 1
디자인플러스와 인터뷰 중인 미소바케카케의 손규리 디자이너
그렇게 3년 반가량 직장을 잘 다니셨는데 창작자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직장 생활을 3년 반 정도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정말 ‘다시 작업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딱 들었어요. 사실 20대 후반쯤부터는 작업이 재미없고, 내가 하는 일이 그냥 말장난 같다는 생각도 들고, 예술의 의미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잠시 회사를 선택한 건데, 현실 속에서만 계속 지내다 보니까 오히려 ‘나는 뭘 만들고 싶은 사람이지?’라는 마음이 더 강하게 올라오더라고요.

결정적인 계기가 뭐였냐고 하면… 진짜 그냥 문득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다시 할래’ 이런 느낌. 회사 안에서 사람들과 지내면서 지치는 것들도 있었고, 저한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모두가 목숨 걸고 있는 걸 보면서, ‘아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또 회사 생활이 헛된 건 아니었어요. 사람들 관계 속에서 배운 것도 많고, 다양한 캐릭터를 관찰하면서 제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가도 알게 됐거든요. 고통도 있었지만, 배움도 진짜 많았던 시간이었죠.

“3년 반 동안 정리된 인간이 되는 연습을 했던 시간 같아요.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까, ‘이제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창작에 대한 욕망이 다시 생겼는데, 조소 작업이 아니라 케이크를 선택하셨네요?

가장 큰 이유는 ‘재고’였어요. 조소나 설치 작업은 전시를 한 번 하고 나면 작품이 다 다시 제 창고로 돌아오거든요. 바로 판매되는 구조도 아니니까, 계속 쌓이고 또 쌓이고… ‘이걸로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현실적으로도 작업이 굴러가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어요. 돈이 들어와야 다음 작업도 하고, 또 그다음 작업도 하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회전해야 하는데, 순수 조형 작업만으로는 그 구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정말 순수 작업하시는 분들을 제일 존경해요. 그건 진짜 큰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전략적으로 뛰어나서 케이크를 선택한 건 아니고, 그냥 저만의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은 것 같아요. 케이크는 재고가 남지 않고, 만들고 바로 누군가에게 가고, 또 다음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그게 작업을 계속 굴러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거죠.

PLUS 3. 매일 새로운 디자인을 떠올리는 법

KakaoTalk 20251210 112844875 05
입소문을 타면서 노홍철, 이찬혁 등 셀럽을 위한 케이크 디자인도 제작 문의가 들어온다고. 사진은 노홍철 케이크.
사연마다 전혀 다른 케이크를 디자인해야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디자인을 고안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세요?

사연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지금도 부담이에요. 사실 매일 지쳐 있다고 해도 될 만큼요. 새로운 욕망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늘 따라오거든요. 그래서인지 모든 주문이 아직도 무서워요. 저는 시안을 미리 보여드리지 않고, 사연을 읽고 바로 작업해요. 의뢰인은 결과물을 받는 순간 처음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케이크를 건네는 그 순간이 가장 두렵죠. 좋아해 주실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럼에도 저를 믿고 맡겨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작업을 받아들여 주시는 거니까요. 그 신뢰가 있어서 계속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연을 읽고 바로 작업한다고 하셨는데, 별도로 스케치 과정이 없다는 거죠?

스케치를 거의 안 해요. 사연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 바로 입체 이미지처럼 떠올라요. 그걸 스케치로 옮기기보다 그냥 바로 손이 먼저 움직이는 편이에요. 중간 시안 같은 것도 없어요. 만들면서 형태가 잡히고, 그 과정에서 완성되는 방식이거든요. 원래 사람들 관찰하는 걸 좋아해서, 그 사람이 가진 분위기나 결 같은 걸 보면서 머릿속에서 바로 조형적으로 정리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디자인한다고 해서 별도의 준비 과정이 있는 건 아니고, 사연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기 시작하는 거죠.

케이크 디자인과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면요? 디자인 외에도 신경 쓰는 요소들도 있을 것 같아요.

맛은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디자인 위주로 작업하다 보니 여러 맛을 동시에 운영하는 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시트 맛 두 가지, 크림 맛 두 가지 정도로 아주 단순화했어요. 바닐라와 초코처럼 누구나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본 맛만 두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KakaoTalk 20251210 114904143 03
미국의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로부터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케이크. 일명 ‘칼더 케이크’.
처음 케이크 디자인을 할 때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초반에는 완벽주의가 너무 심했어요. 케이크 하나 만드는 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부스러기 하나도 보이면 안 될 것 같고, 모든 게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작업이 끝나질 않더라고요. 계속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금씩 타협하는 법을 배우게 됐어요. 지금도 힘들긴 하지만, 반복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수련’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지금은 ‘여기까지가 완성이다’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도 있는 걸까요?

현실적으로는 픽업 15분 전이 완성의 기준이에요. 그때는 제가 마음속으로 ‘이건 완성이다’라고 믿어야 하거든요. 시간이 됐는데도 계속 고치려고 하면 끝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 스스로 딱 ‘됐어’라고 느껴지는 그 포인트에서 멈추려고 해요. 누가 보면 휑해 보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너무 꽉 차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게 제 감각인 것 같아요. 오히려 조소 작업을 할 때는 마감이 없어서 더 힘들었어요. 케이크 디자인은 그에 비하면 마감이 명확하죠.

완성된 케이크는 누군가에게 ‘먹힘’으로써 존재가 사라지는데요. 이에 대해 아쉬운 점은 없으세요?

글쎄요. 아쉽다는 감정보다는, 케이크라는 매체가 원래 가진 속성이라고 생각해요. 말씀처럼 누가 먹는 순간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완성된 디자인이 얼마나 오래 남을지, 누가 따라 할지 같은 고민을 끝없이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거든요.

말씀하신 디자인의 ‘고유성’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것 같아요. 특히 의뢰인의 서사를 디자인으로 해석한다는 콘셉트는 현대미술의 개념과도 비슷한 느낌이라서요. 애매모호한 부분도 없진 않을 것 같고요.

초반에는 그런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케이크 분야는 유행이 빠르고, 한 스타일이 뜨면 모두가 비슷하게 따라 하는 흐름이 있거든요. 그래서 ‘내 디자인을 어떻게 지켜야 하지?’, ‘이걸 지켜야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제 작업과 비슷한 사례를 제보받은 적도 종종 있고요.

“누가 따라 하든 그건 이미 지나간, ‘죽은 케이크’예요. 제가 할 일은 계속 새로운 걸 만들고, 제 기술을 더 단단히 쌓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결국 ‘이걸 온전히 지키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닿게 되더라고요.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비슷해 보이는 지점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누가 따라 한다는 걱정보다는, 제가 계속 새로운 걸 만들 수 있는 상태인지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PLUS 4. 지금, 디자이너 손규리를 움직이는 것들

미소바케카케의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다 보니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보이시더라고요.

네, 맞아요. 독거노인 프로젝트 ‘그루터기’, 어른과 아이가 만나는 세계 ‘선물교환센터’ 등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어요. 그리고 지난 11월에는 3355 콜렉티브와 문화예술NGO 길스토리가 준비한 자립준비청년 창작가 후원 캠페인 전시 오프닝을 위한 케이터링을 맡아 함께 했어요.

KakaoTalk 20251210 113646195

브랜드나 연예인 협업도 물론 좋은 기회지만, 사실 제 개인적인 관심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거든요. 반면 실종 아동이나 자립 청년처럼 제가 원래 관심을 두고 있던 사회 문제에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외적 활동이 창작자로서 지치지 않고 임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나요?

그렇죠. 특히 학대 가정에서 벗어나 센터에서 지내는 친구들을 직접 만나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는데요. 케이크가 ‘이야기를 담는 작업’이라고 설명해 주면, ‘그럼 내가 가진 안 좋은 기억을 만들어서 먹어버릴래’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럴 때면 케이크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작은 힐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의 미소바케카케는 어떤 모습이길 바라세요?

솔직히 말하면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싫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걸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거든요. 창작이든, 전혀 다른 일이든, 제 인생 안에서 또 다른 챕터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지금 일을 이렇게 오래 할 줄도 몰랐어요.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잠깐 하다가 그만하겠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새 3년이 흘러버렸더라고요. 앞으로도 계속할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지금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며 자연스럽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PLUS LIST

손규리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준 다큐멘터리 3

손규리 디자이너는 2012년 8월 6일부터 10일까지 KBS에서 방영한 <인간극장: 산하의 여름>을 꼽았다. 차도 들어가지 않는 산골에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 살며, 할머니·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아이 ‘산하’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산하가 PD를 따라다니며 보여주는 순수한 눈빛과,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가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 KBS <다큐멘터리 3일>

지난 2022년 종영한 KBS <다큐멘터리 3일>를 지금도 즐겨본다. 특히 일상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다큐멘터리 3일>은 특정 장소와 사람들의 삼 일을 취재하듯 따라가며 보여주는 방식이 매력적이라고. 일상 속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점이 좋아 자주 찾아보는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가장 깊은 호흡>을 인상 깊게 봤다고 말한다. 프리다이빙하는 여성 선수의 여정을 따라가며, 인간이 왜 그렇게 극한의 도전을 하는지, 숨을 참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행이나 경험으로는 닿을 수 있지만, 때로는 영원히 느껴보지 못할 감각과 순간들이 있다는 점에서 그런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고 설명한다.

TIPPING POINT

디자이너에게 마감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손규리 디자이너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픽업 시간이 곧 마감 기한이고, 그 시간 15분 전이면 어떤 상태라도 ‘완성’이라고 믿어야 한다. 처음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용납되지 않을 만큼 완벽주의를 떨쳐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은 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조건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 또한 창작자로서 갖춰야 하는 자세임을 배워갔다. 완벽을 끝까지 추구하는 대신, 지금의 손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을 선택하는 것. 그 깨달음이야말로 미소바케카케의 작업을 앞으로 계속 움직이게 한 ‘티핑 포인트’가 아닐까.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