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를 감각으로 번역하는 일, 미디어 아티스트 강이연
아티스트이자 카이스트 석좌교수인 강이연이 TED 2026 오리지널 스테이지에 섰다.

강이연은 기술을 다루지만, 그 처음과 끝에는 언제나 인간의 감각과 인식이 있다. 회화에서 출발해 영상과 프로젝션, 그리고 데이터 기반 작업으로 확장해 온 그는 디지털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익숙한 경계를 집요하게 의심한다. 그의 궤적은 기술을 시각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경험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분법 너머의 세계를 탐색하는 강이연의 작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이 복잡한 시대를 어떻게 감각하고 이해할 것인가.

TED 무대에 선 디자이너

지난 4월 밴쿠버에서 열린 TED 2026에 연사로 참여했죠? 탈북민이나 교포를 제외하고 한국인이 오리지널 스테이지에 선 것은 2013년 활 제작자 장동우 씨 이후 두 번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9년에 앞서 TED 무대에 섰던 제니퍼 주 스콧Jennifer Zhu Scott과의 인연이 계기가 됐어요. 테크 기업 창업자이자 투자자로서 평소 데이터의 주권에 관해 목소리를 내던 분이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TED에 관심이 있냐고 묻더군요. TED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웃음) 작년만 해도 샘 올트먼이 무대에 섰잖아요. TED는 내부 큐레이터가 연간 60~70명 정도의 연사를 발굴해요. 제니퍼가 담당 큐레이터와 연결해 줬고, 반 년가량 발표 주제를 발전시킨 뒤 무대에 섰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무대에 올랐나요?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기후변화는 분명 우리가 직면한 현실인데 변화 속도가 느려서 잘 와닿지 않는 반면, AI는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죠.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두 사건을 만들어낸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마구 열어젖힌 장본인임에도 이런 현상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모든 문제 해결의 첫 단추는 ‘인지’에 있다고 봅니다.
이 대목에선 디자인계의 주류 담론이 된 사용자 경험(UX)이 떠오르네요.
인간은 신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을 거듭해도요. 결국 감각을 통해 경험하게 되고,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문제이든 ‘거대 담론’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실패한다고 생각해요. 막연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많은 데이터를 인간이 인지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디자이너나 아티스트처럼 크리에이티브한 사람이 가장 잘한다고 믿습니다. 이번 TED 무대에선 이것을 주제로 강연했어요.





〈일루미네이션〉전. 파리 인근 로망빌의 피민코 재단에서 4월 24일부터 6월 21일까지 열린다. 올해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다. ⓒFIMINCO
강연 이후엔 바로 프랑스로 건너가 개인전을 열었죠. 이번 개인전의 주제로 무엇이었나요?
올해가 한불 수교 140주년이잖아요. 한국에서도 이미 다양한 행사가 열렸죠.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의 제안으로 전시가 성사됐어요.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대불안(Great Anxiety)’입니다. 한 논문에서 찾아낸 표현인데, TED에서 한 제 강연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대공황(great depression), 기후 위기와 함께 촉발된 대가속(great acceleration)을 잇는 이 신조어는 AI의 대두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급성장 중인 AI 기술의 퍼포먼스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그 곡선 형태가 인간의 불안 지수와 일치한다고 해요. 슬프면서도 흥미로운 일이죠. 이런 현실을 반영해 AI가 과연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고찰하고자 했어요.
이분법을 넘어
흥미롭군요. 국내 첫 개인전이었던 〈Between〉이나 지난해 신세계 더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선보인 〈Entanglement〉의 ‘이분법’이라는 주제가 점차 확장되고 진화하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이전까지 주로 인간과 자연의 얽힘을 다뤘다면, 점차 기술이라는 주제 의식까지 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이분법은 여전히 제 작품의 기반입니다. 인간이 이분법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한계에 봉착한 것 같아요. 예컨대 환경 파괴 문제의 저변에는 착취-피착취의 이분법적 구도가 깔려 있죠. 개인적으로 ‘어머니 지구(mother earth)’라는 표현에 불편함을 느껴요. 한없이 베풀어주는 자애로운 대상이라는 말 속에 ‘착취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그저 ‘엔티티entity’일 뿐이에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분법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됐나요?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에서 출발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서양화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입시 미술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이전까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면 그만이었는데, 대학교에선 주제가 있는 그림을 그려야 했어요. 그림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걸 깨닫고 꽤 오래 방황했습니다. 오일 페인트 냄새도, 캔버스의 프레임도 싫어서 도망치고만 싶었죠. 그런데 우연히 들은 영상 수업에 매료됐어요. 사람들은 이 데이터 덩어리를 흔히 비물질로 분류하는데, 저는 빛의 볼륨이 고유의 물질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질성의 유무로 디지털과 피지컬을 가르는 이분법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은 거죠.


그렇게 UCLA까지 진학하게 됐죠.
사실 진학하고 1년 가까이 애를 먹었어요. 피지컬 컴퓨팅, 코딩, 웹 등을 모두 혼자 해내야 2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거든요. 방향을 잡지 못해 고민하던 중 문득 무빙 이미지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늘 이미지 메이커였는데, 2차원 평면을 채우던 이미지를 확장하면 곧 무빙 이미지가 되는 거니까요. 특히 제가 흥미를 느낀 건 프로젝션이었습니다. 프로젝션만 잘 활용하면 이 작은 체구로도 큰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죠. 그렇게 방향이 잡히면서 제니퍼 스타인 캠프*에게 사사했습니다.
* UCLA 디자인 미디어아트학과 교수. 3D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디지털 설치 예술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국으로 넘어가 왕립예술학교(RCA)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죠. 구글, 나사와 협업한 ‘패시지 오브 워터’는 이미 그 시기부터 기획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어요.
당시 몰입형 예술 전시 기획사 슈퍼블루Superblue와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담당자가 구글 아트앤드컬처로부터 미팅 제안이 왔다고 하더군요. ‘하트비트 오브 디 어스Heartbeat of the Earth’라는 자체 기획 프로그램에 작가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었죠. 구글 아트앤드컬처는 서스테이너빌리티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고, ‘하트비트 오브 디 어스’는 그들의 업무 중 유일하게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지구에 관한 데이터를 활용한 아트워크를 제작하는 것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었는데, 사실 처음 승낙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복잡한 프로젝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웃음)
담수를 주제로 선정한 것이 흥미로웠어요.
탄소 발자국이나 기후변화에 관한 작품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물을 주제로 한 작품은 적었어요. 문제는 데이터를 어떻게 수집하느냐였는데, 그때 들어온 것이 나사였습니다. 구글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던 나사는 자신들이 갓 쏘아 올린 인공위성을 소개해 주었어요. 아직 발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인공위성인데 이전 기술로는 불가능했던 ‘담수’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것이었죠. 이 데이터를 저에게 독점으로 제공하겠다고 하더군요.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네요.
그런데 사실 제게 정말 어려운 프로젝트였어요. 이전까지 저는 주로 규모가 큰 몰입형 영상 작업을 하던 사람이었고, 이렇게 방대한 데이터를 격렬하게 다뤄본 적도 없었어요. 물론 구글 엔지니어나 나사 과학자들과 협업한 적도 없었죠.(웃음) 구글 특성상 최종 결과물은 웹이 되는데, 저는 그때까지 웹 개발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구글 웹에 올라간다는 건 곧 전 세계 누구에게나 2G 환경에서도 구동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하지만 나사에서 전달해 주는 데이터는 기가바이트 단위이죠. 이것을 2G 환경에서 돌아가게끔 최적화하는 일은 정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과연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카이스트 교수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학교에는 600명의 과학자가 계시잖아요. 영국에서 한국으로 자리를 옮긴 뒤 그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난제를 풀다 보니 어느 순간 프로젝트에 확신이 들더군요.


디자인 교육자, 강이연


사실 ‘패시지 오브 워터’를 선보였던 2023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지속 가능성에 대한 담론이 확 꺼진 기분입니다. 인류는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말이죠.
ESG를 너무 자본의 논리로만 수용한 게 문제 같아요. 금융가를 소재로 다룬 HBO 드라마 〈인더스트리〉에선 ESG 테크 기업의 몰락 과정을 꽤 비중 있게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기후 환경을 다루는 기업이 당장 수익을 내긴 어렵죠. 결국 투자자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데, 다분히 자본 관점으로만 다루다 보니 유행이 지났다 싶으면 자금을 거두는 겁니다. 정치 역시 깊이 연루돼 있어요. 정책 입안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죠. 하지만 현 미국 정권만 봐도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닌 듯해요. 그래도 카이스트나 저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XD 랩에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놓치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고 있어요. 기후 데이터를 엄청나게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해야 이를 시각적으로 번역해 사람들이 체험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죠.
여전히 그런 활동을 이어나가는 창작자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네요. 생각해 보니 작가 활동에 비해 교육자로서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아요. 어떻게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합류하게 됐나요?
작품 활동을 이어가면서 스스로 테크놀로지 사이언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겉핥기식 같아 괴로웠는데, 카이스트 교수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대 출신인 저에게 공대 산하 디자인과는 무척 생소했어요. 사실 연구실을 필수로 운영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원했습니다.(웃음) 다행히 영국에 머물던 시절 공대를 나와 RCA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제자가 한 명 있었어요. 그 친구가 저를 따라 카이스트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연구실 설립 과정을 도왔습니다.
소장을 맡고 있는 XD 랩의 구성원과 운영 방식도 궁금합니다.
현재 XD 랩은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재미있게도 지원 동기를 물으면 꽤 비슷한 대답이 돌아와요. 수학, 과학을 워낙 좋아하고 잘했지만 늘 마음 한편에 창의적인 것, 시각적인 어떤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진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면 이성과 감성이 ‘듀얼 리터러시’, ‘멀티플 리터러시’가 되는 인재들이라고 생각되곤 합니다. 게다가 공부가 습관이 돼 있다 보니 모르는 건 망설임 없이 배우면 된다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장착돼 있어요. 사실 다른 연구실은 주로 논문에 초점을 맞추는데, XD 랩은 조금 달라요. 논문을 목표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과 연구 과정에서 논문이 파생되는 구조죠.

거꾸로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도 많겠어요.(웃음)
맞습니다. 특히 카이스트 산업디자인과의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는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예술 분야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물론 저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을 사랑하지만, 왜 이 분야에선 사용자 경험을 염두에 두지 않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예술의 지나친 폐쇄성이 소통의 단절로 이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자주 하고요. HCI나 UI·UX 개념을 예술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죠.
개방성과 신체성


그런 개방적인 태도가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에도 드러납니다. 제가 작가님 이름을 처음 인식한 것도 BTS의 철학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전시 〈커넥트, BTS〉였어요.
〈커넥트, BTS〉전은 5개 도시에서 20여 명의 작가와 큐레이터가 참여한 글로벌 프로젝트였어요. 이대형 감독에게 제안받았는데, 포맷이 무척 독특하고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서펜타인 갤러리,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DDP 등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시가 열리는 것도 그렇고, 앤터니 곰리나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등 거장들이 참여하는 점도 흥미로웠죠. 하지만 무엇보다 단순히 BTS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의 촉매제로 기능해 각지의 창작자를 연결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해외에 오래 머물다 보니 그 전까지 BTS의 영향력을 체감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작업을 준비하면서 10대부터 60대까지 12명 정도의 아미를 직접 만나 심층 인터뷰를 했어요. 거기서 얻은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 ‘Beyond the Scene’입니다.
〈커넥트, BTS〉뿐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을 했죠.
예거 르쿨트르나 막스 마라 같은 럭셔리 브랜드부터 구글 등 빅 테크 기업까지 제법 많은 곳과 협업했는데, 짧게는 70년, 길게는 100년 이상 된 헤리티지 하우스와 협업할 땐 정말 많은 것을 배웁니다. 폰트 하나, 컬러 하나에도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집하는지, 그러면서도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허락하는지 알 수 있었죠.


솔직히 저는 꽤 보수적이고 편협한 편집장입니다.(웃음) 철학자 한병철이 〈사물의 소멸〉에서 지적했듯, 이 시대를 장악하고 있는 디지털 세계가 사유와 관조, 기억을 무너뜨리는 것을 우려하죠. 첨단 기술을 다루는 작가님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아닙니다. 충분히 공감해요. 저는 물론 디지털을 사랑하는 작가이지만, 작업할 때 외에는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해요. 최근 역사학자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소멸〉을 읽으며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스포티파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을 듣는 경험을 얼마나 플랫하게 만들었나요? 저는 기술과 인간의 이분법 너머를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우리 종(種)이 최상위 포식자로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신체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