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손이 빚은 빛의 섬, 호모 파베르 2026

“우리는 발바닥에서부터 의식한다.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순간 무언가를 감지하고, 손가락 끝으로 생각한다.” 호모 파베르 2026의 예술 감독 에스 데블린은 몸과 손, 감각에 대한 이야기로 전시의 포문을 열었다. 9월 1일부터 30일까지 베니스 산조르조마조레섬의 조르조 치니 재단에서 열리는 전시는 각 장인을 고유한 기술과 지식을 품은 하나의 섬으로 바라본다. 서로 다른 섬은 빛과 재료, 자연과 건축을 통해 마침내 군도를 이룬다.

인간의 손이 빚은 빛의 섬, 호모 파베르 2026

장인의 손에서 시작되는 여정

전시는 첫 장면부터 예상을 벗어났다. 수백 명의 장인이 사용하는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 ‘손의 언어A Language of Hands’에선 완성품 대신 도구와 재료가 펼쳐졌다. 그 너머 대형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영상은 기술을 설명하는 장인들의 육성과 함께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의 손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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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들의 작업실을 재현한 ‘손의 언어’. 사진 Sophia Bennett

영상이 끝나면 스크린이 슬라이딩 도어처럼 열리고 관람객은 다음 공간으로 진입하는데 이곳에서 비로소 장인들의 얼굴과 마주했다. 수백 명의 장인을 익명의 집단으로 제시하는 대신 저마다의 기술과 세계를 가진 독립적인 창작자로 바라보도록 한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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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장인을 익명의 집단으로 제시하는 대신 저마다의 기술과 세계를 가진 독립적인 창작자로 바라보도록 한 ‘장인들의 인덱스An Index of Artisans’.

이어지는 ‘사물의 알파벳An Alphabet of Objects’에서는 200여 점의 작품을 거대한 원형 키네틱 구조물 위에서 천천히 회전시켰다. 이때 작품의 그림자가 벽면에 투사되고, 관람객은 실제 작품과 그림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오브제를 여러 층위에서 인식할 수 있었다. 사물을 하나의 언어로 삼아 오브제를 읽는 경험을 구현한 것이다. 어두운 실내를 따라 이어지는 동선은 문을 나서는 순간 베니스의 눈부신 빛과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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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회전하는 구조물과 함께 변화하는 그림자도 작품이 되는 ‘사물의 알파벳’.

그 전환점에 자리한 공간이 ‘폐의 도서관A Library of Lungs’이다. 울창한 정원으로 둘러싸여 ‘베니스의 허파’로 불리는 산조르조마조레의 특성을 작품으로 번역한 것으로, 거대한 폐를 연상시키는 목재 구조물을 정원과 실내 사이에 배치했다. 작품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미세한 소리를 내며 속삭이듯 반응해 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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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품은 목재 구조물로 연출한 설치 공간 ‘폐의 도서관’.

재료와 시간이 만든 세계

이번 전시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공간은 ‘보름달이 떠오르다A Full Moon Rising’다. 조르조 치니 재단의 옛 수영장을 어둠에 잠기게 한 뒤, 물 위에 반원형 구조물을 띄우고 수십 점의 둥근 항아리를 배치했다. 수면에 반사된 빛과 중첩된 항아리의 실루엣은 제목 그대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연상시킨다. 이 공간의 출발점은 한국의 달항아리다. 수백 년 전 물을 담아 옮기던 생활 용기에서 비롯된 달항아리의 둥글고 완전하지 않은 형태는 세계 각국의 장인들이 저마다의 재료와 기술로 다시 빚어낸 공통의 언어가 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한국관’처럼 연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항아리를 특정 국가의 문화적 상징으로 제시하는 대신, 서로 다른 전통을 연결하는 공예 언어로 읽어냈다. 김시영, 윤상현, 장마리아, 유지안 등 많은 한국 작가가 이 전시에 참여해 한국 공예의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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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치니 재단 수영장에 설치한 ‘보름달이 떠오르다’. 달항아리를 연상시키는 반원 구조물이 물 위에 떠 있다. 사진 Sophia Bennett

달이 물 위로 떠올랐다면 다음 공간에서는 시선이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뿌리내린 상승A Rooted Ascent’은 완성된 사물이 아닌 재료의 기원에 주목했다. 대나무와 버드나무, 라탄 등 자연 재료를 중심으로 목재 공예와 자연 섬유로 만든 작업을 전시했고, 목공예가와 바스켓 메이커의 시연이 이어졌다. 또한 이곳에서는 2024년 로에베 공예상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이종원 작가의 ‘원초적 구조(식물)Primitive Structures(Botanical)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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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와 섬유를 활용한 공예 작품을 선보인 ‘뿌리내린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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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와 섬유를 활용한 공예 작품을 선보인 ‘뿌리내린 상승’.

‘살아 있는 작업실An Atelier Alive’은 실제 작업실을 전시장 안으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선 도자, 가죽, 종이, 섬유, 금속 등 다양한 분야의 장인들이 직접 작업하고, 관람객은 손의 움직임부터 도구와 재료까지 눈앞에서 지켜봤다. 세계 기념물 기금World Monuments Fund, 페촐리 미술관Museo Poldi Pezzoli, 오픈 케어Open Care와 협력한 작품 복원 과정도 함께 소개해 보존과 복원 역시 장인 정신의 일부임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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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작업실을 전시장 안으로 옮겨놓은 듯한 ‘살아 있는 작업실’.

빛이 연결하는 도시와 공예

이제 전시는 베니스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끝없는 새의 노래An Infinite Birdsong’는 베니스의 밤을 하나의 풍경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벽면에는 도시의 아치형 창문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반복되고, 안쪽에는 조명이 들어간 거울을 배치했다. 밤의 운하에 비친 건축물의 창처럼 반짝이는 표면 사이로 새와 곤충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자, 금속, 유리, 종이, 나무 등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든 작품들이 공간을 채우고, 중앙의 유리 진열장에는 같은 생명체를 모티프로 한 주얼리 작품이 놓여 자연과 건축, 빛과 공예가 겹쳐지는 거대한 새장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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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밤을 하나의 풍경으로 옮겨놓은 듯한 ‘끝없는 새의 노래’.

다음에 이어지는 공간 ‘거대한 전환A Great Turning’은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팔라디안 클로이스터Palladian Cloister에서 펼쳐졌다. 회랑을 관통하는 긴 수면 위에 설치한 거대한 원형 키네틱 미러가 2개의 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며 하루 동안 변화하는 자연광을 받아들였다. 회랑의 아치와 하늘, 물, 주변 건축물은 거울 위에서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며 반사되는데, 눈앞에 있던 건축물이 어느 순간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물 위에서 흔들리는 이미지로 변했다. 베니스 석호에 떨어지는 빗방울에서 착안한 표면의 패턴과 깨진 거울 조각을 모자이크에 활용했던 지역의 전통을 반영한 이 작품은 도시가 축적한 빛과 반사의 역사를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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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키네틱 미러와 물, 사운드, 건축 요소를 결합한 설치 ‘거대한 전환’. 사진 Alexandre Vazquez

이후 동선은 다시 빛을 향했다. 팔라디오 식당Palladian Refectory으로 향하는 거대한 계단 위에는 수십 마리의 새가 공중에 떠 있었다. ‘빛나는 방주A Luminous Ark’는 베니스 석호에서 발견되는 새를 모티프로 한 항저우 기반 페이퍼 아티스트 원 치우원Wen Qiuwen의 대형 종이 조각이다. 에스 데블린이 베니스에서 관찰해 스케치한 새의 모습을 작가는 중국 전통 등 제작 방식을 차용해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조각 안에 설치한 LED 조명이 종이 새를 거대한 등불처럼 빛나게 하며 공간 전체를 동화적인 장면으로 바꾸었다. 팔라디오 식당에 들어서면 빛이 색을 지운다.

‘빛의 향연A Feast of Light’은 흰색 빛과 오브제만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도자, 유리, 섬유, 종이가 각기 다른 물성을 드러냈다. 한국 작가 조은희는 한지를 꼬아 실처럼 만든 뒤 직조하고 찹쌀풀로 굳히는 전통 지승 기법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제작해 영역을 확장했다. 흰색의 세계를 지나자 정반대 풍경이 펼쳐졌다. ‘형태의 무지개A Rainbow of Forms’에서는 플라스틱, 에나멜, 레진, 유리 등 다채로운 재료로 만든 작품들이 거울 선반과 회전하는 받침대 위에 놓여 있고 천장 전체를 덮은 거울은 끊임없이 색과 형태를 반사하며 공간감을 증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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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빛과 오브제만으로 구성한 ‘빛의 향연’.

공예가 만드는 새로운 공동체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전시는 다시 조용해졌다. ‘20개의 고요한 노래Twenty Silent Songs’가 열린 사이프러스 클로이스터는 과거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공부하던 곳이다. 장인들은 종이 만들어내는 진동 패턴, 즉 ‘키마틱스cymatics’를 저마다의 재료와 기술로 재해석해 20개의 작품을 완성했다. 회랑을 따라 설치한 작품 중에는 자개 디자이너 유지안의 작품도 있었는데 중앙에서 시작해 가장자리로 퍼져나가는 물결 모양의 자개 패턴으로 보이지 않는 소리를 시각화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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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는 20개의 사운드 패널로 구성한 설치 작품 ‘20개의 고요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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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 클로이스터는 과거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공부하던 곳이다.

보르게스 미로Borges Labyrinth에서 전시가 마무리됐다. 이탈리아 직조업체 보노토Bonotto가 제작한 대형 태피스트리에는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종과 사라질 위험에 처한 희귀 공예 기술이 함께 담겼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베니스Come Home Again’라는 제목은 우리가 속한 생태계와 공동체를 다시 바라보라는 메시지처럼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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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 동물과 공예에 대한 메시지를 태피스트리에 담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 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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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게스 미로에서 전시가 마무리됐다.

호모 파베르 2026은 인간의 손에서 출발해 도시와 자연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에스 데블린은 ‘빛의 섬’에서 500명이 넘는 장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지 않고 각자를 고유한 기술과 이야기를 가진 하나의 섬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그 섬들은 빛과 재료, 물과 공기, 자연과 건축을 통해 연결된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남는 것은 화려한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인간의 손이다.

기간 9월 1~30일
장소 조르조 치니 재단
주관 미켈란젤로 재단
사진 Giulio Ghirardi(별도 표기 외)
예술 감독 에스 데블린
웹사이트 homofaber.com

글 양윤정 통신원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80호(2026.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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