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K X SDF 국제 컨퍼런스 스페셜] 산업 디자이너, 에르완 부홀렉

사물은 어떻게 문명이 되는가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에르완 부홀렉이 디자인코리아와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 주관하는 국제 컨퍼런스에 연사로 나선다.

[DK X SDF 국제 컨퍼런스 스페셜] 산업 디자이너, 에르완 부홀렉

한때 반항아를 꿈꾸던 디자이너가 어느덧 주류의 한복판에 섰다. 에르완 부홀렉의 디자인 언어는 지난 30년간 동시대 산업 디자인의 보편적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50세를 맞은 그는 이제 커리어를 구축하는 일보다 만드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 집중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엘레강스’ 역시 조형적 아름다움을 넘어 겸손과 환대의 태도로 확장된다. 월간 〈디자인〉과 10년 만에 다시 나눈 대화에서 그는 지나온 시간을 복기하며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화해하는 미래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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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형 로낭 부홀렉(Ronan Bouroullec)과 스튜디오를 결성하고 비트라, 플로스, 크바드라트, 삼성전자 등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했다. 2023년 로낭 부홀렉과 결별하고 현재는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는 11월 26일 디자인코리아와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 협업하는 국제 컨퍼런스 연사로 나설 예정이다. erwanbouroullec.com 인물 사진 이우경 기자

커트 코베인을 꿈꿨던 디자이너

20261020053727 EB 2025 Vitra Mynt credit FlorianBohm 1
비트라의 민트(Mynt) 체어. 로낭 부홀렉과 결별 후 비트라에서 처음 단독으로 선보인 의자다. 전통적인 오피스 체어의 틀을 깨고 어느 공간에서도 어울리도록 디자인했다. 사용자의 체중과 자세에 따라 반응하는 메커니즘이 특징이다. 사진 Florian Bohm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월간 〈디자인〉 창간 40주년을 기념해 축하 메시지를 담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지난 호가 월간 〈디자인〉 창간 50주년 기념호였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죠? 당신의 지난 시간을 복기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얼마 전 50세가 되었습니다. 나이라는 것이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바라보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저는 커리어를 쌓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약 30년 전 형과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디자인을 실천하는 방식과 방법론, 활동 영역, 언어를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에게 비치는 우리의 모습도 구축해야 했고요.

어떤 방식으로 구축해 나갔나요?

당시부터 우리는 디자인을 발전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 경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소통하고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후자에 다소 의아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드는 디자인이 물리적 범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디자인은 하나의 철학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며, 그 철학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디자인의 물리적 실체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차원을 끊임없이 결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저는 이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명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겪은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이제 저는 디자인에 좀 더 순수하게 접근하고자 합니다. 물리적 실체와 제품 본연의 속성이 중심이 되는 방식 말입니다. 여전히 저는 더 많은 것을 직접 구현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축적한 지식 덕분에 이제 무언가를 매우 정교하게 구축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엔지니어링 영역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한편으로 이제 지나치게 ‘틀에 맞춰져 있거나’ ‘점잖게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적어도 모든 것을 100% 완벽하게 정리한 뒤에 말해야 한다는 부담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예전처럼 모든 면에서 반듯하고 적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없죠.

사진 Florian Bohm

모든 것을 초탈한 구도자 같군요.(웃음) 잠시 스튜디오 초창기로 시간을 돌려보죠. 당시 필리프 스타크로 대변되는 프랑스 디자인 신은 장식적이고, 유머러스한 조형미를 추구했습니다. 반면 당신의 디자인은 무척 달랐죠. 당시 주류 스타일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이에 반하는 디자인을 추구한 건가요?

솔직히 의식적으로 당시 주류 디자인에 반기를 들겠다고 결심한 기억은 없습니다. 제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 것은 현대미술과 인디 음악, 시골에서 자란 경험 그리고 수학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을 공부하면서 미니멀리즘과 개념적인 표현 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는 간결하고 정제된 미학을 추구하던 인디 음악과도 잘 맞아떨어졌죠. 또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프랑스의 장식예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문화는 파리 사람들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저는 명료하고 논리적인 방법론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당시 주류 디자이너들이 구사하던 조형 언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젊은 시절이었기에 그 부르주아적 스타일에 약간의 반감마저 느꼈던 것 같습니다. 주류 디자인에 대한 반작용도 어느 정도 담겨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저 좋아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 쪽에 더 가깝습니다. 이를테면 라디오헤드와 미니멀 아트를 결합하고, 여기에 농장에서 발견한 변함없는 소박함을 더한 세계라고 할까요?

흥미로운 화학작용이군요.

저는 인디 음악 특유의 불손함과 급진성을 사랑했던 세대에 속합니다. 세계 디자인계의 흐름을 폭넓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고 배우는 데 익숙했죠. 그런 태도가 당시 다른 디자이너들과 자연스럽게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당시 인디 문화의 산물처럼 여겨졌던 우리의 정제된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이제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디자인이 유희가 부족한, 지나치게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저는 커트 코베인이 되고 싶었지만, 오랜 세월 같은 음악을 연주하다 보니 어느새 셀린 디옹이 되어버렸습니다. 영원히 반항아로 남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농장에서 배운 언어, 시대의 디자인이 되다

20261020062453 EB 2025 Flos Maap credit PhilippeThibault 27
초경량 종이 질감의 섬유, 멤브레인을 소재로 한 플로스의 대형 벽 조명 시리즈 ‘마프(Maap)’. 사용자가 직접 형태를 완성하도록 했다. 사진 Philippe Tarridas
확실히 당신이 추구한 미니멀리즘은 20세기 초 기능주의적 미니멀리즘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느낍니다. 당신이 추구하는 단순함과 당시의 디자인 사조를 구분 짓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시의 기능주의적 미니멀리즘 이면에는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매우 급진적인 태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능주의는 특정 정치적 운동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했죠. 사람들이 왜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좋아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가 디자인한 실내 공간 전체를 보고 있으면 저는 조금 두려운 느낌마저 듭니다. 실수나 불완전함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20세기 사람들은 합리주의와 과학을 통해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 저는 저 자신과 협업하는 기업이 함께 설정한, 매우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 작업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조건 안에서 가장 적절하고 타당한 디자인을 찾고자 하죠. 일단 제품이 세상에 나오고 나면 그다음은 제 통제를 벗어난 영역입니다. 그렇다고 제 디자인 철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해진 공식 같은 것도 없으니까요.

자연 역시 당신의 디자인 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모티프입니다.

자연은 제게 무척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자연이 지닌 영리함에도 매료되어 있습니다. 식물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건축물입니다. 최소한의 자원만 사용하면서도 완벽한 효율성을 발휘하니까요. 자연은 ‘조화를 만들어내는 혼돈’ 을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저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이러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산업 생산은 똑같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정확히 동일한 공정을 반복한다는 발상에 기초합니다. 자연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그 과정에는 훨씬 많은 변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무들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저마다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죠. 저는 유기적인 세계가 천천히 연산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매력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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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0064949 EB 2021 HIMD credit PhilippeThibault 12
HIMD는 에르완 부홀렉이 자신의 철학을 반영해 선보인 가구 브랜드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 본연의 기능에 집중하고 수공예적 가치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사진 Philippe Thibault
앞서 당신이 언급했듯이 브르타뉴의 시골 농장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농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지극히 실용적이며, 그 쓰임에 충실합니다. 의도적으로 멋을 부리거나 특정한 스타일을 추구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저는 이렇게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좋아합니다. 농장이라는 공간이 지닌 자유로운 사고방식도 마음에 듭니다. 무언가를 심거나, 동물을 옮기거나, 덤불을 베는 것처럼 단순한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성취감 역시 좋아하죠. 대부분의 디자인은 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해 온 단순한 문제들을 다룹니다. 새로운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익숙하게 느끼는 오래된 형태와 사용 방식을 적절히 연결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인체 공학적으로도 자연스럽고 편리한 디자인이 가능해지죠. 우리 문명에는 디자이너가 발견해야 할 수많은 형태와 사용 방식의 원형이 존재합니다. 제게 농장은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사물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제가 농장에서 얻어 지금까지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실용적인 사물과 일상적인 노동이 결국 하나의 문명을 만들어낸다는 감각입니다.

20261020063558 ERB 2015 Samsung TheSerif credit StudioBouroullec 45
산업 디자이너로서 당신은 비트라, 플로스 등 글로벌 기업과 협업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더 세리프와 뮤직스튜디오로 잘 알려졌죠. 클라이언트였던 삼성과의 협업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삼성과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의도적으로 기업 내부의 전문 지식과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일종의 ‘초보자’였죠. 그런데 저는 초보자라는 개념을 무척 좋아합니다. 초보자는 잘 모르기 때문에 많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여전히 세상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삼성과의 협업에서 제 역할은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고, 그중 일부가 실제 제품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좀 더 넓게 보면 제가 삼성에 제안한 프로젝트들은 일상적인 생활용품과 전자 제품 사이에 존재하는 시각적 간극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첨단 기술과 소박한 일상의 사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첨단 기술을 과시하는 시각적 요소를 최대한 지우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오히려 과거의 형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죠. 대표적인 사례가 ‘더 세리프’입니다. 초슬림 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 경쟁하던 당시 TV 업계에서 저는 오히려 ‘두꺼운’ TV를 디자인했습니다. 제 디자인은 반드시 기술이 지향하는 논리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극도로 미래지향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죠. 하지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이 서로 다른 디자인 언어를 하나로 수렴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삼성과의 협업 경험은 제 경력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제 작업 방식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당신의 작업은 산업적 대량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드로잉과 공예, 소규모 제작, 보다 실험적인 생산 방식도 꾸준히 탐구해 왔죠. 얼핏 대척점에 있는 듯한 두 영역을 어떻게 넘나들고 있나요?

디자인을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디자인이 산업적 맥락이나 상업적 제품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할아버지가 울타리를 수리할 때도 그 안에는 디자인이 숨어 있었습니다. 나무에 지지대를 설치할 때도 디자인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요리할 때도 디자인이 깊숙이 관여하죠. 저는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하지만, 스튜디오에서 한 해에 발표하는 프로젝트는 보통 5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가벼운 주제를 다루며 실험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접 제품을 제작하거나 간단한 컴퓨터 코딩을 해보는 식이죠. 이 모든 활동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주로 탐구하는 것은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자체이지만, 동시에 제작 방법론이나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반복하는 개념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활동이 하나의 일관된 작업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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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 스튜디오 5. 더 세리프에 이어 다시 한번 삼성전자와 협업한 제품이다. 오브제 역할을 겸하는 무선 스피커로 2026 iF 디자인 어워드 골드를 수상했다.

부홀렉이 생각하는 엘레강스와 디자인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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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텍스타일 디자인 브랜드 크바드라트의 코펜하겐 쇼룸. ‘색상은 없고 오직 소재만 있다(No colours, just materials)’라는 콘셉트로 디자인했다.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레일에 다양한 원단과 러그를 걸고, 압출 유리 파티션 벽으로 공간을 나누었다. 사진 Michel Giesbrecht
지난 25년간 당신과 로낭이 디자인계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컸기에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결별 이유를 캐묻기보다 결별 이후 달라진 점을 알고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지닌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커리어를 구축하는 데 쏟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성을 예전만큼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외적인 소통이나 홍보에 한결 여유로워진 반면 디자인 작업 자체에는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고민해 온 주제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문제들을 좀 더 깊이 탐구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인체 공학이나 경량 생산 방식 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예전보다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하는 과정에 더 큰 열정을 느낍니다. 몇몇 프로젝트는 훨씬 깊이 파고들고 싶기도 하고요. 돌이켜 보면 로낭과 함께 일할 때는 전략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순수한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오는 11월에는 서울디자인페스티벌과 디자인코리아가 공동 주관하는 국제 컨퍼런스에서 ‘엘레강스(Elegance)’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엘레강스는 단순히 우아하거나 시각적으로 정교한 상태 이상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디자인을 해오면서 디자인이 문명을 지탱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토대인지 깊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은 일상적인 사물입니다. 컵과 접시, 시계, 옷, 가구, 전자 제품, 교통수단 같은 것들이죠. 일련의 사물들은 과거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은 앞선 세대가 남긴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하고 유용한 것이죠. 동시에 그 사물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물에는 일종의 ‘사회적 규범’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이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죠.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려면 사물이 드러내는 신호를 매우 섬세하게 다뤄야 합니다. 물론 모든 디자인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습니다. 스포츠카처럼 극도로 사치스러운 제품은 특정 집단을 결집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성을 깊이 존중하고, 필요한 순간에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환대하는 환경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엘레강스’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제게 엘레강스란 아름다움과 겸손, 그리고 환대의 태도를 함께 어우르는 개념입니다.

서두에 언급했던 월간 〈디자인〉 창간 40주년 기념 메시지 이야기로 돌아가죠. 당시 디자이너 관점에서 10년 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려 할 것이고, 제품 교체 주기도 짧아질 것이라고 말했죠. 이에 따른 제품 디자이너의 책임감을 강조했고요. 현시점에서 당시의 예측이 얼마나 정확했다고 진단하나요?

결과적으로 크게 틀리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지금이라면 조금 다르게 표현할 것 같아요. 물건의 수명이 짧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무조건 잘못된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가구 산업에서는 오히려 제품의 수명 주기를 단축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제가 협업하는 디자인 기업 대부분은 여전히 1970년대 유럽과 북미에서 확립된 품질 기준을 따르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평생 사용할 소파를 구매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겁니다. 해외여행을 떠날 일도 거의 없었고,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꾸거나 이혼하는 일도 흔치 않았으니까요.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경우도 많았죠. 하지만 인류 문화는 크게 변화했습니다. 진보는 변화를 촉진했고, 그 변화는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멋진 것이죠. 이제 제품도 이러한 삶의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시간과 운송, 물류 같은 요소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벼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삶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재활용 가능성에 대해 많이 고민합니다. 동시에 하나의 가구를 여러 사람이 이어서 사용하게 될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으로는 꽃처럼 가벼운 종이로 물건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오래 사용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대답은 지나치게 안이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으로 10년 전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군요. 10년 뒤인 2036년, 디자이너 관점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나요?

글쎄요.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점점 더 효율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이를 구상하고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복잡성 또한 끊임없이 증가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러한 복잡성이 결국 작은 단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발전할까 우려합니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AI는 이러한 복잡성에 대응하기 위한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를 구현하는 방식에는 서로 다른 방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초대형 AI 모델을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델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표준화된 세계를 전제로 설계합니다. 거대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이죠. 반대로 AI를 자연처럼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작은 요소들의 집합으로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하는 전지전능한 지능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작동하며 개별적으로는 제한된 수준의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효율성이 높은 시스템입니다. 제 관점에서는 어떤 중앙집중식 통제 체계보다 자연이 훨씬 더 나은 모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세계보다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훨씬 더 지향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화해하는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전자 기술이 주방 도구처럼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통합되는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미래가 도래하리라 믿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기능은 원시적일 만큼 단순하지만, 자원을 활용하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방식에서는 고도로 정교하고 효율적인 세상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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