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너머의 낯선 분위기, 데보라 터브빌 사진전
패션 화보부터 포토콜라주까지, 피크닉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
미국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의 국내 첫 전시가 10월 23일부터 회현동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다. 약 200점의 작품으로 작가의 사진 세계를 조망하며, 영화 프로덕션 디자이너 윤성혜가 전시 공간을 연출했다.


오래된 공중목욕탕 샤워실에 모인 다섯 명의 여성. 수영복을 입은 이들은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고 저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둔다. 벗겨진 타일 위로 물기가 번져 있고 화면 전체에 가라앉은 빛이 감돈다. 1975년 미국 〈보그〉에 실린 ‘배스하우스(Bathhouse)’다. 화려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앞세우던 당대 패션 화보와 다른 이 사진은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Deborah Turbeville, 1932-2013)의 독자적인 시각 언어를 세상에 알린 작업이 됐다.

미국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의 국내 첫 전시 〈데보라 터브빌: 분위기〉가 10월 23일부터 회현동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다. 터브빌의 아카이브를 소장한 미국 무스 컬렉션(MUUS Collection)과 협력해 기획한 전시는 빈티지 프린트와 오리지널 콜라주 등을 포함한 원작 102점과 뉴욕에서 새롭게 제작한 프린트 88점 등 약 200점을 선보인다. 패션 사진에서 출발해 영화와 문학, 오래된 건축과 도시에서 얻은 감각을 사진 안으로 끌어들인 터브빌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다.
패션을 거부한 패션 사진가

데보라 터브빌.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이름이다. 사후 한동안 논의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던 그의 작업은 2020년 무스 컬렉션이 아카이브를 인수한 뒤 연구와 전시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19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터브빌은 뉴욕에서 디자이너 클레어 카델(Claire McCardell)의 어시스턴트 겸 모델로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하퍼스 바자〉와 〈마드모아젤〉의 패션 에디터를 거쳐 30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잡았다. 헬무트 뉴튼(Helmut Newton), 기 부르댕(Guy Bourdin)과 함께 1970년대 패션 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작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옷과 모델을 선명하고 매혹적으로 보여주던 당시의 관습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특유의 흐릿한 초점과 빛바랜 색조, 긁어낸 표면은 사진이 찍힌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꼼 데 가르송, 발렌티노, 샤넬과 작업할 때도 의상은 화면 속에 조용히 묻히곤 했다. 모델 역시 옷을 선전하는 존재라기보다 어떤 역할을 맡은 배우처럼 다가온다.
1975년 제작한 ‘마키야주(Maquillage)’는 이러한 실험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나른한 모델 사진에 손글씨와 잘라낸 이미지, 파편적인 문장을 더해 만든 가상의 패션 잡지로, 같은 해 뉴욕 리졸리 갤러리의 〈환상으로서의 패션〉전에서 거장들의 디자인과 나란히 소개됐다. 오늘날의 진(zine)을 떠올리게 하는 이 시도는 이후 사진과 서사를 결합하는 작업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영화와 문학은 터브빌의 사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알랭 레네(Alain Resnais),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의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한 장의 사진 속에 그 전과 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힘을 불어넣었다. 러시아 문학에 대한 애정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듭 찾았던 것도 그 맥락이다.
터브빌에게 ‘분위기’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인상이 아니라 이미지를 구축해 가는 방식이었다. 공간과 인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장면이 된다. 그 끝에는 어쩌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 세계를 향한 그리움이 있다.

“나에게 분위기란 장소를 뜻하지만, 어떤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 분위기는 손에 잡히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이다.”
데보라 터브빌
아스라한 분위기 속으로

이번 전시는 초기작부터 패션 화보, 건축과 장소를 탐구한 작업, 후기 포토콜라주에 이르기까지 터브빌의 작품 세계를 테마별로 아우른다. 메인주의 해안 마을에서 한 가족을 1년간 찰영한 초기작 ‘메인에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배스하우스’와 ‘마키야주’, 하얗게 분칠한 모델을 조각상처럼 세운 ‘에콜 데 보자르’,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sis)의 도움으로 촬영한 베르사유 궁전의 비공개 공간, 그가 오랜 시간 머물며 작업한 러시아와 멕시코의 풍경까지 이어진다. 낡은 나무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며 빈티지 프린트와 콜라주 원본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은 더욱 특별하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에 자리한 ‘패스포트(Passport)’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집필한 미발표 소설을 바탕으로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해 130여 점의 포토콜라주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중 20여 점의 원작을 선보인다. 경험과 허구, 글과 이미지가 교차하는 이 사진 소설에서 터브빌이 평생 탐구해 온 분위기는 한층 짙어진다.
영화 미술감독이 지은 전시장


전시 공간 디자인은 영화 프로덕션 디자이너 윤성혜가 맡았다. 오래된 문틀과 허물어진 듯한 아치, 시야를 흐리는 장치를 활용해 터브빌의 사진 속 낡은 공간과 불분명한 시간의 경계를 전시장 안에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특히 ‘패스포트’를 선보이는 공간에서는 종이에 사진을 붙인 원작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종이 위에 액자를 다는 세심한 방식을 택했다. 스캔 이미지에 번역 텍스트를 입힌 영상도 별도 공간에서 상영된다.


전시장 전반에는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의 초기 피아노곡이 낮게 흐른다. 사티가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시기의 짧은 곡들을 골라, 터브빌이 동경했을 법한 세계와의 접점을 찾으려 한 기획자의 해석이 반영됐다.

다만 터브빌의 사진은 글로 다 옮겨지지 않는다. 선명한 답 대신 흐릿한 장면 속에 단서를 남기는 사진, 손에 잡히지 않는 분위기. 이해하기보다 감각해야 하는 전시다. 깊어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피크닉에서는 낡은 문과 허물어진 아치 너머 터브빌이 붙잡아 둔 아스라한 시간이 펼쳐진다. 그 문을 열고 직접 걸어 들어가 보길. 전시는 2027년 2월 28일까지 이어진다.
〈데보라 터브빌 사진전: 분위기〉
기간 2026년 10월 23일 – 2027년 2월 28일
장소 서울시 중구 퇴계로6가길 30, 피크닉
운영 시간 10:00 – 18:00 (월 휴무)
기획 재단법인 목목문화재단, GLINT
협력 MUUS Collection
공간 디자인 윤성혜
홈페이지 피크닉
인스타그램 @pikni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