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유정, 황유정 대표
스튜디오 유정 황유정 대표는 오랜 기간 해외에서 활동하며 다수의 글로벌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도 국경을 넘나들며 작업을 이끌고 있는 그는 차세대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한다.
단단하고 유연하다. 이 이질적인 조합은 놀랍게도 한 사람을 표현하는 수식어다. 스튜디오 유정 황유정 대표는 오랜 기간 해외에서 활동하며 다수의 글로벌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재도 국경을 넘나들며 작업을 이끌고 있는 그는 차세대 디자이너들에게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꾸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어머니(조안준디자인 연구소 조안준 대표)의 영향이 컸다.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모습은 물론 월간 〈실내장식〉 〈건축문화〉 등의 편집주간을 역임하며 인테리어에 대한 글을 쓰는 모습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봤다. 자연스럽게 여성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모습을 동경하게 됐다. 어머니는 국내 디자인 컨설팅의 선구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시공을 겸하지 않고 오직 디자인에만 집중해 디자이너로서의 전문성을 강조했다. 이런 태도와 방식이 내게 영향을 미쳤다. 다만 어머니는 동양적 스타일의 디자인을 추구했는데 그 점은 나와 다르다.
해외에서 먼저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싶었다. 대학교 재학 중 프랑스의 에콜 데 아트 데코라티프Ecole des Art Decoratif에서 교환학생을 한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인이 대표인 시카고의 루시앙 라그랑주 아키텍트Lucien Lagrange Architect에 선발되어 인턴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로 유학생은 물론 미국 시민조차 취업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바늘구멍을 통과했다는 데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다.(웃음)
이후 피에르이브 로숑, 피터 마리노 아키텍츠, 스키드모어, 오윙스 & 메릴 등 세계 유수의 공간 디자인 기업에서 일했다.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업계를 이끄는 기업들이다. 피에르이브 로숑Pierre-Yves Rochon은 호스피탈리티 공간, 피터 마리노 아키텍츠Peter Marino Architects는 리테일 매장, 스키드모어, 오윙스 & 메릴Skidmore, Owings & Merrill은 사무 공간 디자인에서 뛰어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 세 곳을 모두 거친 덕분에 다양한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해 명망 높은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며 배울 수 있었다. 또 상업 공간 디자인 트렌드와 인테리어 시장의 경향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출한 인사이트가 있다면?
화려한 장식만 강조한 공간은 더 이상 소비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브랜드 헤리티지와 제품의 정체성을 표현한 콘셉트에 기반해 고객이 어떤 경험을 얻을 수 있을지 철저한 분석과 전략을 거쳐 계획한 공간 디자인이 중요하다. 공간을 방문한 이들이 독후감을 쓸 만큼 풍부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 설사 호불호가 나뉘더라도 확실한 콘텐츠와 콘셉트가 필요하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공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나만의 노하우는 아티스트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제작한 설치물을 활용해 확실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피터 마리노 아키텍츠에서 진행한 셀린느 매장 디자인과 스키드모어, 오윙스 & 메릴에서 리드 디자이너로서 주도한 유엔 사무국 공간 리뉴얼 프로젝트가 생각난다. 셀린느 매장 디자인은 당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피비 파일로Phoebe Philo와의 심층 인터뷰와 리서치를 기반으로 진행했다. 피비 파일로는 현대 여성의 부드러움과 강인함을 대변할 수 있는 분위기의 공간을 요구했다. 이에 우리 팀은 브랜드의 톤앤매너를 좌우하는 그의 취향을 깊이 연구해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거실처럼 느껴지는 디자인’을 콘셉트로 과한 장식은 철저히 배제하고, 단순하면서 여유가 느껴지는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유엔 사무국 리뉴얼은 디자인 디렉터로서 기존 건물의 보수와 새로운 건물의 공간 브랜딩 및 인테리어 디자인을 총괄했다. 산하 15개 기관과 1600여 명의 직원을 둔 대규모 조직과 함께 일한다는 점이 어려웠고, 특히 모든 부서장과 일일이 만나 합의점을 찾아야 했지만 협업에서 나오는 시너지를 최대한 발휘했다. 경직된 큐비클 공간에서 탈피해 소통을 권장하는 개방된 공간으로의 변화를 제안했다.
클라이언트와의 심도 있는 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클라이언트를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기업의 비전과 핵심 철학을 파악해 디자인에 반영한다. 디자이너 개인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는 것은 개인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 스튜디오의 개성을 강조하는 대신 고객 맞춤형 디자인에 주안점을 둔다.
2021년 한국으로 돌아와 스튜디오 유정을 운영하고 있다.
스튜디오 유정은 2020년 뉴욕에서 일할 때 법인을 설립해 사이드 프로젝트로 운영하고 있었다. 귀국한 이유는 이제 한국에도 세계적 기준에 걸맞은 심미안을 갖춘 클라이언트가 많으니, 굳이 외국에서 일하지 않아도 좋은 프로젝트를 많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여 년간 해외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을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홍익대학교에서 외래 교수로 강의하는 것과 올해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의 멘토로 참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현재 사무실은 한국에 있지만 외국 클라이언트와도 꾸준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국내에서 새롭게 채용한 직원들 이외에도, 과거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합류해 베이징, 뉴욕, 런던 등지에서 원격으로 일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다양한 원격 업무용 툴이 일반화된 덕분이다.
인테리어 디자인 외에도 컬러 컬렉티브, XYJ 등 한국적인 감성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론칭했다.
내가 디자인한 공간에서 사용하는 소품도 직접 제작하고 싶어 시작했다. 컬러 콜렉티브는 전통 색과 전통 자수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그래픽을 트레이, 테이블 매트, 컵 등 생활 소품에 입힌 브랜드다. 또 XYJ는 클라이언트 기반의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완벽한 불완전함’에 기반해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 있는 독특한 인테리어 오브제를 선보이는 브랜드다. 두 브랜드 모두 다양한 국적의 사용자가 무리 없이 쓸 수 있도록 한국적 정서를 인위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했다. 그럼에도 막상 결과물에서는 한국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보니,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내 안에 쌓인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웃음)
해외에서 활동하기 원하는 디자이너를 위해 조언한다면?
‘Be a badass’라는 말로 함축하고 싶다. 뛰어난 테크닉과 함께 성실함과 열정을 갖추면 좋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하지만 장차 조직의 리더로 거듭나려면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내 장점과 성과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자신의 견해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어딜 가나 거의 유일무이한 한국인 여성이었지만 어디서나 당당하게 내 의견을 피력했다. 기업의 한 구성원이지만 자신의 팀과 프로젝트에 대해 오너십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