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오혜진 그래픽 디자이너·스튜디오 오와이이 대표
새롭다.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작업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린 인상이다. 텍스트와 리서치에 뿌리를 내리고, 전과 다르기 위해 오래 연구하고 고민하는 디자이너. 자신만의 방식과 철학으로 나아가는 오혜진을 만나 스튜디오 오와이이 설립 10주년의 소회부터 물었다.

[Creator+]는 Design+의 스페셜 시리즈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프로젝트에 크리에이터의 일과 삶의 경로, 태도와 방식을 더해 소개합니다. 인물을 조명하는 1편과 프로젝트를 A to Z로 풀어내는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주로 발행됩니다. [Creator+]는 동시대 주목할만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한 ‘오!크리에이터’를 잇는 두 번째 크리에이터 기획입니다.
editor’s note
오혜진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2014년부터 스튜디오 오와이이(OYE)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텍스트에서 낚아챈 아이디어를 꼬리잡기하듯 이어 나가 자신만의 별자리로 그려냅니다. 주제, 개념에서 인물과 역사,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우주를 탐험하고, 소화한 것만 시각화해요. 커머셜 그래픽 디자인이든, 전시를 위한 작업이든, 이러한 태도는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디자이너 오혜진의 포트폴리오는 흥미로운 지점들로 뻗어 나갑니다. 그는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디자인했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통로의 벽을 컬러풀하게 바꿨으며, 신생 출판사 도미노프레스의 아트디렉터로 함께하며 읽히지 않는 로고와 도미노 블록 같은 총서를 만들었어요. 지난해에는 AGI(국제그래픽연맹)의 새로운 멤버로 선정됐고요. 수많은 책과 인쇄물로 둘러싸인 그의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재밌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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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1.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시작과 확장
스튜디오 오와이이를 시작한지 올해로 10주년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 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 스튜디오를 만들었어요. 실제로 임시 스태프를 구해 함께 작업해 보기도 했고, 정직원을 고용할까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요. 지금까지는 작지만 유연하게, 그리고 제 개성이 드러나는 작업 위주로 해오다 보니 여전히 혼자 운영하고 있어요. (웃음) 10년··· 그래도 나름 잘 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는 만화를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리라 결심한 결정적 순간이 있나요?
중고등학생 때 만화책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걸 즐겼어요. 그러던 중 엄마가 어디선가 “디자인이라는 게 요즘 돈을 잘 번다더라”는 얘기를 들으시고, 디자인과 지원을 권하셨어요. (웃음) 제가 자란 익산은 아주 작은 도시예요.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컴퓨터로 작업해 본 적도 없었어요. 학교에 다니며 그래픽 디자인이 이런 거구나, 하고 조금씩 알게 됐죠. 어떤 결심을 했던 건 아니고,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인 영역에서도 인쇄물 작업에 어떤 매력을 느꼈나요?
원래 책을 좋아했어요. 종이에 대한 감각이나 읽는 즐거움도 좋았고,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만화책을 모으기도 했죠. 디지털 세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세대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대학생 때는 오진경 북 디자이너의 사무실에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울 기회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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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다시 그래픽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제가 만화로 시작해서인지 그래픽 디자인을 그림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책 표지가 있으면 거기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제목을 얹는 게 디자인이라고요. 그렇게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슬럼프가 꽤 길었어요. ‘그래픽 디자인이란 정확히 뭘까? 적당히 보기 좋게 만드는 게 전부일까?’하는 고민이 커졌고,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대학원에서는 선생님과 동료들에게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친구들에게 대학원을 ‘마감’이라고 표현하는데요. 2년 뒤로 맞춰진 마감이죠. (웃음) 혼자 탐험할 수도 있지만, 일정한 강제성이 있으면 더 몰입하게 되잖아요. 국내 대학원이었기 때문에 생활에 큰 변화 없이 공부할 수 있었고, 언어 습득에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돼서 오히려 모국어를 더 유려하게 다듬는 훈련이 되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고, 작업에 대해 토론하며 비평적 사고를 키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해외 아트북페어와 리소 인쇄 워크숍,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 보려는 선택이었을까요?
2015년, 코우너스(Corners)의 조효준 디자이너와 함께 7박 9일 동안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Jan van Eyck Academie)의 찰스 나이펠스 랩(Charles Nypels Lab), 엑스트라풀(Extrapool), 캐피탈(Kapitaal) 등 세 곳의 인쇄 작업실을 둘러봤어요. 둘 다 리소 인쇄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리소 투어〉라는 작은 책을 만들어 네덜란드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보내기도 하고, 이런저런 아트북페어에서 판매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비슷한 활동을 하는 해외 작업자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죠. 그 인연 덕분에 네덜란드의 ‘매지컬 리소(Magical Riso)’ 행사에 초대받기도 했고, 2019년에는 ‘베르겐아트북페어(Bergen Art Book Fair)’의 디자인 작업을 맡게 되었어요. 가끔 한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어떻게 해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런데 사실 특별한 비결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아트북페어를 다니며 좋아하는 출판사나 작업자들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친구가 되면서,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난 것 같아요.
PLUS 2. 번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디자인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은 번역”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디자인은 번역이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말해왔고, 저도 거기에 속했던 사람이죠. 하지만 요즘에는 그 표현이 조금 진부하게 느껴져요. ‘번역’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닌 강력한 의미가 있잖아요. 출발어와 도착어의 관계, 그리고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할 것인지, 혹은 원어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매끄럽게 읽히도록 번역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 최근 저에게 디자인으로서 번역은 원어를 잘 포장하고 매끄럽게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출발점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요. 결과물과 내용이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저 내용에만 종속돼서 잘 포장하고 보여주는 것에만 머물러 있는 작업은 너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텍스트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리서치를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 방식 때문에 그런 한계를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평소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 같은 매체에서 특정 스타일이나 시각적 무드를 작업의 참고 자료로 가져오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피상적 형태만 베껴내는 데 급급한 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결과물이 시각 언어이기 때문인지, 저는 오히려 텍스트나 개념처럼 비가시적인 요소에서 많은 힌트를 얻어요. 작업을 할 때도 내용에서 뻗어 나가는 리서치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주제와 관련된 인물, 텍스트, 사건, 작품 등을 조사하고 연결 지으며 작업의 내러티브나 배경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을 좋아해요. 그렇게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죠. 그러다 보니 그래픽 디자인이 단지 포장지나 꾸밈 장치처럼 프로젝트에 개입되는 것에 다소 한계를 느끼게 된 것 같아요.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4 000033](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000033-832x1239.jpg)
한정된 시간 안에서 수행하기에 쉽지 않아 보이는 과정이에요.
리서치 내용이 많아지면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아요. 먼지를 털어내고 핵심만 추려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죠. (웃음)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 작업을 설명할 때도 훨씬 할 말이 많아져요. ‘왜 이렇게 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분명해지니까 커뮤니케이션도 더 수월해지고요. 어떤 반문이 와도 막힘없이 대응할 수 있는, 단단한 맷집을 갖게 된 기분이죠.
클라이언트와 이견을 조율하기도 하나요?
당연히 이견이 생길 때도 있어요. 그래도 최대한 설득하려고 하죠. 저는 시안을 대부분 한 개만 만들어요. 물론 작업 과정에서는 여러 방향을 고민하며 수많은 스케치를 하지만, 최종적으로 제안할 때는 하나의 시안만 보여드려요. 대신, 그 한 개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죠. 그렇기 때문에 보여지는 형태가 어떻든, 방향성 자체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출판사와 작업한다고 하면 제작비를 투자하는 것도, 책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지는 것도 출판사잖아요. 무조건 제 의견을 밀어붙일 수는 없죠. 그래서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서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협의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디어를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집하는 디테일이 있다면요?
이 단계에서는 아주 미세한 선택의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을까?’에 대한 미묘한 감각이죠. 이를테면 90g과 100g의 종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어떤 굵기도 1mm와 2mm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민하기도 하고요.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이러한 미묘한 선택과 균형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없으면 결과물에서도 그 아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PLUS 3. 디자이너의 지금 전시
북 디자이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인상적인 책 작업도 많아요.
맞아요. 많은 분들이 저를 북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만, 사실 저는 제가 북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하고자 하는 것을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지, 책만 다루는 디자이너는 아니니까요. 저에게는 입체적인 관점이 중요해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책이라는 틀 안에 담길 수도 있지만, 웹사이트나 공간, 혹은 사운드 같은 무형의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작가로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죠.
디자인 전시는 대부분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간섭의 정도만 다를 뿐, 결국 클라이언트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요. 누군가 의뢰를 하고, 그 기획을 바탕으로 내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이니까요. 저는 평소, 자신이 고찰해온 능동적인 문제의식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작가적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결과물에 대한 결정권이 클수록 작가성이 짙어지는 것뿐이고요.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만든 것이라도 디자인의 방향성과 형태의 결정, 디테일과 미학적 감각은 결국 디자이너에게서 나오는 거잖아요.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5 HA330373](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HA330373-832x551.jpg)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6 IMG 3418](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IMG_3418-832x551.jpg)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7 IMG 3415](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IMG_3415-832x551.jpg)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Stedelijk Museum)에서 〈BHLNTTTX〉전이 진행 중이에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미술관의 그래픽 디자인 큐레이터인 토마스 카스트로(Tomas Castro)로부터 전시 제안을 받았어요. 한 해에 한 명(팀)의 젊은 디자이너를 선정해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 시리즈 ‘Post/No/Bills’의 다섯 번째 전시였죠.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면 보이는 중앙 계단 양옆의 통로에서 펼쳐지는 전시예요. 보통 그래픽 디자인의 결과물은 화이트 큐브 안에서 잘 보이지 않잖아요. 책은 서점에서 만나고, 포스터는 전통적으로 거리나 벽에 붙여졌고요. 그래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을 화이트 큐브가 아닌,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 시리즈 이름도 ‘전단 부착 금지(Post No Bills)’고요. 기획 자체가 너무 재밌었어요.
이곳은 사람들이 서서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보는 장소잖아요. 작품 하나하나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공간의 무드를 바꾸는 작업에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또 이전 전시가 흑백 무드여서 제 작업은 컬러풀했으면 좋겠다는 큐레이터와 디렉터의 코멘트도 있었고요. 그것도 너무 그래픽 디자인 같았어요. 디자이너가 하는 일은 전시든, 프로젝트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왔죠. (웃음)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8 Stedelijk museum PostNoBills PT April 2024 Web 복사](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Stedelijk-museum_PostNoBills_PT_April-2024-_Web-복사-832x1257.jpg)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9 Stedelijk museum PostNoBills PT April 2024 3 Web](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Stedelijk-museum_PostNoBills_PT_April-2024-3_Web-832x1526.jpg)
〈BHLNTTTX〉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만들면, 그 웹사이트 자체가 또 하나의 작업이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졸업 전시의 포스터를 맡게 되면 그것 또한 또 다른 졸업 작품이 되고요. 그래서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작업을 다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하곤 해요. 저도 그 방법론을 따라 기존 작업을 보여준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큐레이터도 네덜란드에서 아직 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번 전시가 제 작업을 소개하는 데 적절할 것 같다고 했죠. 오히려 오리지널을 너무 많이 파괴하지 말라고 했고요. 게다가 마침 스튜디오 10주년이기도 하잖아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은 총 세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기존 작업을 전지에 랜덤하게 배치한 뒤 재단해 책을 만들고, 옆면을 잘라 낱장의 인쇄물로 변형한 후, 이를 다시 리소 인쇄해 벽에 전단처럼 붙이는 방식이었어요. 두 번째는 통로에 있는 7개의 아치 벽에 컬러 패턴을 만드는 작업이었고요. 세 번째는 여러 이미지를 다시 가공해 각각 다른 속도로 변하는 이미지를 스크린세이버 같은 형식으로 화면에 송출하는 작업이었어요. 전시명인 ‘BHLNTTTX’는 전시 제목(Exhibition Title)을 영문으로 쓰고 모음을 제거한 후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거예요. 이번 전시의 주제였던 ‘기존의 내용을 어떻게 나열할 것인가, 혹은 보여줄 것인가’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어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고, 그만큼 해석의 여지도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10 Stedelijk museum PostNoBills PT April 2024 3850 Web](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Stedelijk-museum_PostNoBills_PT_April-2024-3850_Web-832x555.jpg)
PLUS 4. 배움과 도전, 어제에 머물지 않는 것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평소 그래픽 디자인이 평면적인 지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공간, 혹은 확장된 매체로 보이면 좋겠다, 혹은 스케일이 커지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진행 중인 작업 중 하나가 그래요. 건축사사무소 푸하하하프렌즈(FHHH Friends), 가구 및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다주로(dajuro)와 함께 만드는 공간 프로젝트예요. 보통 그래픽 디자인은 공간이 완성된 후 가장 마지막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고, 저는 문법화된 브랜딩 디자인의 언어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편인데요. 이번 작업은 카테고리로 보면 브랜딩에 속하지만, 기존의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라 ‘그래픽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푸하하하프렌즈의 윤한진 소장님이 그래픽이 종이에 있을 때는 시간이 지나며 레이아웃이 점점 무너지는데, 예를 들어 메뉴판을 만들면 운영자가 메뉴를 추가하거나 빼면서 형태가 바뀌잖아요. 그런데 그래픽이 공간에 각인되면 그것은 불변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내가 만드는 그래픽이 가구, 건축, 공간의 요소로 작동하면 좋겠다, 그 지점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올해 12월이나 내년 초쯤 공개될 예정이에요.
쉽게 지루해지기 때문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제안하려고 노력한다고요. 이와 관련된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지금 떠오르는 장면은, 제 책상 위에 늘 여러 권의 교과서가 펼쳐진 채 겹쳐 쌓여 있던 모습이에요. 한 과목을 1시간씩 차분히 공부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거죠.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책을 읽을 때 여러 권을 동시에 읽어요.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예상치 못한 연결 지점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웃음) 그리고 최근에 문득 제가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과 결국 해냈을 때의 성취감에 중독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래픽 디자인도 마찬가지예요. 주어진 예산과 상황, 맥락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일이잖아요.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11 KakaoTalk 20240823 104458226 01 복사](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KakaoTalk_20240823_104458226_01-복사-832x555.jpg)
최근 작업에서 새롭게 시도한 것도 있나요?
아마 도미노프레스 로고일 것 같아요. 저는 로고 작업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최근 만든 것 중에서는 이 도미노프레스 로고가 특히 마음에 들어요. 출판사 로고는 보통 책의 표지나 책등에 작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고, 다양한 표지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죠. 도미노프레스는 ‘도미노’라는 패를 책에 비유하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쌓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지어진 이름이에요. 그래서 로고 자체의 형태보다, 책등에서 어떻게 보이는 게 좋을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해본 적 없는 방식과 관점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는 노하우로 ‘배우는 자세’를 꼽아준 적이 있어요. 요즘 새롭게 배운 게 있다면요?
여기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도구나 기술이 아니라 지식에 가까워요. 최근 사운드와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됐는데, 앞서 이야기한 공간이 사실 노이즈 사운드와 관련된 공간이에요. 또 사운드 아티스트 유영주 작가의 전시 그래픽을 맡기도 했고요. 마침 작년에는 〈갤러리 사운드〉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마르코 후지나토(Marco Fusinato)라는 작가가 등장하더라고요. 그는 노이즈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비주얼 아티스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운드를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당시에도 그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최근 두 작업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서 요즘에는 이런 사운드, 혹은 청각적 상상에 관해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그리고 사운드에서 이어져 나와 ‘시간성’도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예요.
매번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시도하는 것이 힘들진 않나요?
힘들지는 않고 너무 재밌는데, 항상 모르던 걸 하려고 하니까 망할까 봐 걱정은 되죠. (웃음) 그렇지만 두려워하면 결국 아무 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아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실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PLUS LIST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생각을 확장해 준 책 5
- 〈갤러리 사운드〉, 케일럽 켈리, 미진사
- 〈뉴 큐레이터〉, 플러 왓슨, 안그라픽스
-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 버나드 셀라·레오 핀다이센·아그네스 블라하, ENKR
- 〈사진 국가〉, 김계원, 현실문화A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arte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쉬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는 혼자 계속 생각해야 하는데, 책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거잖아요.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말이 있으면 거기서부터 또 다른 가지가 뻗어 나가기도 하고요. 〈갤러리 사운드〉는 보이지 않는 사운드를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뉴 큐레이터〉는 건축과 디자인 전시와 관련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는 아티스트북에 관한 책이에요. 책을 내용이 담기는 틀이 아니라 하나의 전시장으로 바라봐요. 〈사진 국가〉는 19세기 후반 일본과 사진의 역사에 관한 내용인데요.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기록 사진이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은 최근 자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 읽은 책입니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가, 왜 이런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웃음)”
TIPPING POINT
“저는 항상 작업이 끝나고 나면 다른 어떤 감상보다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게 했는지가 저한텐 중요한 것 같아요.” 생각의 꼬리 물기는 기획과 스케치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업을 마친 후 떠오른 질문들이 새로운 작업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 지적 호기심과 연결되어 그를 평면 너머 다른 영역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지치지 않는 동력이 디자이너 오혜진을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12 오혜진 썸네일 최종](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오혜진-썸네일-최종.jpg)
![[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13 오혜진 디자이너님 썸네일 2 2](https://design.co.kr/wp-content/uploads/2024/08/오혜진-디자이너님-썸네일-2-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