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 서점과 미술관, 디자인 최전방에서 만나다
오혜진 그래픽 디자이너·스튜디오 오와이이 대표
새롭다.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작업을 마주할 때마다 떠올린 인상이다. 텍스트와 리서치에 뿌리를 내리고, 전과 다르기 위해 오래 연구하고 고민하는 디자이너. 자신만의 방식과 철학으로 나아가는 오혜진을 만나 스튜디오 오와이이 설립 10주년의 소회부터 물었다.
[Creator+]는 Design+의 스페셜 시리즈입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프로젝트에 크리에이터의 일과 삶의 경로, 태도와 방식을 더해 소개합니다. 인물을 조명하는 1편과 프로젝트를 A to Z로 풀어내는 2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주로 발행됩니다. [Creator+]는 동시대 주목할만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를 소개한 ‘오!크리에이터’를 잇는 두 번째 크리에이터 기획입니다.
editor’s note
오혜진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입니다. 2014년부터 스튜디오 오와이이(OYE)를 운영하고 있어요. 그는 텍스트에서 낚아챈 아이디어를 꼬리잡기하듯 이어 나가 자신만의 별자리로 그려냅니다. 주제, 개념에서 인물과 역사,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우주를 탐험하고, 소화한 것만 시각화해요. 커머셜 그래픽 디자인이든, 전시를 위한 작업이든, 이러한 태도는 바뀌지 않아요. 그래서 디자이너 오혜진의 포트폴리오는 흥미로운 지점들로 뻗어 나갑니다. 그는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디자인했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통로의 벽을 컬러풀하게 바꿨으며, 신생 출판사 도미노프레스의 아트디렉터로 함께하며 읽히지 않는 로고와 도미노 블록 같은 총서를 만들었어요. 지난해에는 AGI(국제그래픽연맹)의 새로운 멤버로 선정됐고요. 수많은 책과 인쇄물로 둘러싸인 그의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이 모든 것이 재밌다고 말합니다.
PLUS 1.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시작과 확장
스튜디오 오와이이를 시작한지 올해로 10주년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개인이 아닌 집단이 되면 더 좋을까 싶어서 만든 스튜디오예요. 실제로 임시 스태프분을 구해서 함께 작업해 보기도 하고 정직원을 고용할까 고민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작지만 유연하고 저의 특성이 드러나는 작업 위주로 해오다 보니 아직 혼자 운영하고 있어요. (웃음) 10년··· 그래도 잘 해오긴 했나 보다 싶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원래는 만화를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리라 결심한 결정적 순간이 있나요?
맞아요. 중고등학생 때 만화책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저희 엄마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디자인이라는 게 요새 돈을 잘 번다더라” 하셔서 시각 디자인과에 지원하게 됐어요. (웃음) 제가 자란 익산은 아주 작은 도시예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컴퓨터로 작업해 본 적도 없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알게 됐죠. 어떤 결심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얼떨결에 들어갔는데 재밌어서 계속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인 영역에서도 인쇄물 작업에 어떤 매력을 느꼈나요?
책은 원래도 좋아했어요. 종이에 대한 감각과 읽는 것, 방의 한 면 전체가 만화책일 정도로 모으는 것도 좋아했고요. 제가 디지털 세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세대라 더 그랬나 싶기도 해요. 대학생 땐 오진경 북 디자이너 사무실에서 틈틈이 알바하면서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됐죠.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다시 그래픽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제가 만화로 시작해서인지 그래픽 디자인을 그림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책 표지가 있으면 거기에 들어갈 이미지를 만들고 제목을 얹는 게 디자인이라고요. 그렇게 계속 작업하면서 슬럼프가 꽤 길었어요. ‘그래픽 디자인이 뭔지 잘 모르겠다, 적당히 보기 좋게 만드는 게 디자인인가?’ 답답함이 커져서 대학원에 간 거예요. 대학원은 선생님과 동료들을 통해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친구들에게 대학원을 ‘마감’이라고 하는데요. 2년 뒤의 마감인 거죠. (웃음) 혼자 탐험할 수도 있는데 강제성이 있으면 더 하게 되잖아요. 국내의 학교니까 삶의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아도 되고, 언어를 습득하는 데 시간이 들이지 않아서 오히려 모국어를 유려하게 잘 쓰는 데 훈련이 되었어요.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고 작업에 관해 토론하며 비평적 사고를 키웠던 것 같아요.
해외 아트북페어와 리소 인쇄 워크숍,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해 보려는 선택이었을까요?
2015년 코우너스(Corners) 조효준 디자이너와 7박 9일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Jan van Eyck Academie)의 찰스 나이펠스 랩(Charles Nypels Lab), 엑스트라풀(Extrapool), 캐피탈(Kapitaal), 세 곳의 인쇄 작업실을 둘러봤어요. 둘 다 리소 인쇄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그 여행기를 바탕으로 〈리소 투어〉라는 작은 책을 만들어서 네덜란드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아트북페어에서 판매하기도 하면서 비슷한 활동을 하는 해외 작업자들과 교류하게 되었어요. 네덜란드의 ‘매지컬 리소(Magical Riso)’라는 행사에 초대받기도 하고, 2019년 ‘베르겐아트북페어(Bergen Art Book Fair)’의 디자인 작업도 아트북페어로 만난 인연에서 시작된 거예요. 한국에서 태어나 공부하고 활동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해외 프로젝트를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어요. 아트북페어에 다니며 지역의 경계 없이 좋아하는 출판사나 작업자와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새로운 일들이 파생된 것 같아요.
PLUS 2. 번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디자인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은 번역”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디자인은 번역이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말했고 저 또한 거기에 속해 있던 사람이지만, 요즘에는 그 말이 조금 진부하게 느껴져요. ‘번역’이라는 단어가 지닌 강력한 의미가 있잖아요. ‘출발어’와 ‘도착어’의 관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할 것인가, 원어와 조금 달라지더라도 매끄럽게 읽히도록 번역할 것인가. 요새 저에게 디자인으로서 번역은 원어를 잘 포장하고 매끄럽게 읽히도록 하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출발점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져요. 결과물이 내용과 밀접해야 하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내용에만 종속돼서 단지 잘 포장하고 보여주는 것에만 멈춰 있는 작업은 너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텍스트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리서치를 통해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 방식 때문에 그런 한계를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평소 인스타그램이나 핀터레스트 같은 매체에서 소위 어떤 스타일이나 시각적 무드를 작업의 참고 자료로 가져오는 것은 피상적 형태만 베껴내는 데에 급급한 태도라고 여기며 경계하는 편이에요. 결과물이 시각 언어이기 때문인지 텍스트나 개념처럼 비가시적인 것에서 많은 힌트를 얻고, 내용에서 뻗어 나가는 리서치를 꽤 많이 하는 편이죠. 이를테면 주제와 관련된 인물, 텍스트, 사건, 작품 등을 추가로 스터디하고 연결 짓고 작업의 내러티브나 배경을 확장해 나가면 내용을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무척 좋아해요. 그렇다 보니 그래픽 디자인이 단지 포장지나 꾸밈 장치처럼 프로젝트에 개입되는 것에 다소 한계를 느끼게 된 것 같아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수행하기에 쉽지 않아 보이는 과정이에요.
일단 리서치 내용이 많아지면 정리가 어려워요. 먼지를 털어내고 핵심만 추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웃음) 그런데 이렇게 진행하면 작업을 설명하는 데도 할 말이 많아져요. 제가 왜 이렇게 했는지가 강력하니까 커뮤니케이션하기도 훨씬 수월하고요. 어떤 반문이 와도 막히지 않는 강한 맷집을 갖게 된 느낌이죠.
클라이언트와 이견을 조율하기도 하나요?
당연히 이견이 있을 때도 있어요. 그래도 최대한 설득하려고 하죠. 저는 시안을 대부분의 경우 한 개만 만들어요. 물론, 혼자서 여러 방향성을 고민하고 정말 많은 스케치를 하는데, 제안할 때는 한 개만 보여드려요. 대신 그 한 개가 어떻게 도출됐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요.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형태가 어떻든, 방향성에 대해서는 수긍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것이, 예를 들어 출판사와 일을 한다고 하면 제작비를 투자하는 것도 출판사고 책에 대해서 나중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출판사이기 때문에 제가 밑도 끝도 없이 밀어붙일 수는 없어요. 그래서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서로 충분히 납득되는 선에서 협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아이디어를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고집하는 디테일이 있다면요?
이 단계에서는 아주 미세한 선택의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나을까’에 대한 미묘한 감각이죠. 이를테면 90g과 100g의 종이 중 어느 것을 쓸지, 어떤 굵기에 대해서도 1mm와 2mm 사이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하기도 하고요.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이러한 미묘한 선택과 균형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없으면 그게 결과물에서도 아쉽게 드러나는 것 같아요.
PLUS 3. 디자이너의 지금 전시
북 디자이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만큼 인상적인 책 작업도 많아요.
맞아요. 저를 북 디자이너라고 말해주시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저는 제가 북 디자이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책이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지, 책만 다루는 디자이너는 아니니까요. 저에게는 입체적인 관점이 중요한데요. 그 내용의 틀은 웹사이트가 될 수 있고, 공간이 될 수 있고, 사운드 같은 무형의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작가로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죠.
디자인 전시는 큐레이터의 기획에 의해 호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간섭의 정도만 다를 뿐이지 결국 클라이언트 일과 차이가 없다고 느껴요. 누군가 의뢰를 하고 그 기획을 근거 삼아 나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죠. 저는 평소 자신이 고찰해오던 어떤 능동적인 문제의식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작가적 행위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행위에 있어 결과물에 대한 결정권이 클수록 좀 더 작가성이 짙은 것뿐이고요.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만든 것이라도 디자인의 방향성과 형태의 결정, 디테일과 미학적 감각은 디자이너에게서 나오는 거잖아요.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Stedelijk Museum)에서 〈BHLNTTTX〉전이 진행 중이에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나요?
미술관의 그래픽 디자인 큐레이터 토마스 카스트로(Tomas Castro)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한 해 한 명(팀)의 젊은 디자이너를 선정해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 시리즈 ‘Post/No/Bills’의 다섯 번째 전시입니다.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면 보이는 중앙 계단의 양옆 통로에서 벌어지는 전시예요. 보통 그래픽 디자인의 결과물은 화이트 큐브에서 보이지 않잖아요. 책은 서점에서 만날 수 있고, 포스터는 전통적으로 거리에 붙여졌고요. 그래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을 화이트 큐브가 아닌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리즈 이름도 ‘전단 부착 금지(Post No Bills)’고요. 그 기획이 너무 재밌었어요.
작품을 서서 감상하는 장소가 아니라 걸어가면서 보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공간의 무드를 바꾸는 작업에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제 이전의 전시가 흑백 무드여서 저의 작업은 컬러풀했으면 좋겠다는 큐레이터와 디렉터의 코멘트가 있기도 했고요. 너무 그래픽 디자인 같았어요. 디자이너가 하는 것은 전시나 프로젝트나 똑같다는 느낌이 왔죠. (웃음)
〈BHLNTTTX〉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가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를 만든다고 하면 그 웹사이트가 디자이너의 또 다른 작업이 돼요. 졸업 전시 포스터를 맡는다고 하면 그것이 또 다른 졸업 작품이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을 다시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하는데요. 그 방법론을 취해서 기존 작업을 보여준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큐레이터 또한 네덜란드에 아직 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제 작업을 보여주기에 괜찮을 것 같다며 오히려 오리지널을 너무 많이 파괴하지 말라고도 했고, 또 마침 스튜디오 10주년이잖아요.
전시 작업은 총 세 가지였는데, 기존 작업을 전지에 랜덤하게 얹힌 다음 재단해 책을 만들고 옆면을 잘라 낱장의 인쇄물을 만든 다음 리소 인쇄해서 벽에 전단처럼 붙이는 연출을 한 첫 번째 작업과, 통로에 있는 7개의 아치 벽에 컬러 패턴을 만든 두 번째 작업, 그리고 여러 이미지들을 한 번 더 가공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변하는 이미지를 스크린 세이버처럼 화면에 송출하는 세 번째 스크린 작업이에요. 전시명인 ‘BHLNTTTX’는 전시 제목(Exhibition Title)을 영문으로 쓰고 모음을 제거한 다음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거예요. 기존의 내용을 어떻게 나열할 것인가, 혹은 보여줄 것인가의 이번 전시 주제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어요.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고, 그래서 해석의 여지 또한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PLUS 4. 배움과 도전, 어제에 머물지 않는 것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그래픽 디자인 작업이 납작한 지면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공간, 확장된 매체로 보이면 좋겠다, 스케일이 커지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중에 건축사 사무소 푸하하하프렌즈(FHHH Friends)와 가구 및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다주로(dajuro), 이렇게 세 팀이 만들고 있는 공간이 있어요. 그래픽 디자인은 공간이 만들어질 때 가장 마지막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고, 저는 문법화된 브랜딩 디자인의 언어가 흥미롭지 않아 하는데요. 이 작업이 카테고리로 따지면 브랜딩에 속해요. 하지만 정형화된 문법을 따르지 않고, ‘그래픽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에서 시작한 브랜딩에요. 푸하하하프렌즈의 윤한진 소장님이 그래픽이 종이에 있을 때는 레이아웃이 점점 무너지는데 – 예를 들어 메뉴판을 만들면 운영자가 메뉴를 더하거나 빼면서 – 그래픽이 공간에 각인되면 그것은 불변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 말에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내가 만드는 그래픽이 가구, 건축, 공간의 요소로 작동하면 좋겠다. 그 지점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작업하고 있어요. 올해 12월이나 내년 초에 공개될 예정이에요.
쉽게 지루해지기 때문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고 제안하려고 노력한다고요. 이와 관련된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지금 기억나는 건 항상 제 책상 위에 여러 교과서가 펼쳐진 상태로 겹쳐서 쌓여 있었어요. 한 과목을 1시간 동안 공부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거죠.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구나. 지금도 책을 읽을 때 한 번에 여러 권을 동시에 읽습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연결되는 지점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웃음) 그리고 최근에 제가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는데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과 결국 해내는 것에 중독돼 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래픽 디자인도 그렇죠. 주어진 예산과 상황, 맥락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최근 새롭게 시도한 것은 무엇인가요?
도미노프레스 로고인 것 같아요. 제가 로고 작업은 많이 안 하는데, 근래 만든 것 중에는 이 도미노프레스 로고가 마음에 들어요. 평소 출판사의 로고는 대개 책의 표지나 책등에 들어가기 때문에 아주 작게 쓰이는 경우가 많고, 다양한 표지 디자인과 조화를 이뤄야 하죠. 도미노프레스는 ‘도미노’라는 패를 책이라 칭하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쌓여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지은 이름이에요. 따라서 로고의 형태 자체가 아닌 책등에서 어떻게 보이는 게 좋을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되었죠. 전에는 해본 적 없는 방법과 관점의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는 노하우로 ‘배우는 자세’를 꼽아준 적이 있어요. 요즘 새롭게 배운 게 있다면요?
여기서 배우는 것은 도구나 기술이 아니라 지식에 가까워요. 최근 사운드와 관련된 작업을 하게 됐는데요. 앞서 말한 공간이 사실 노이즈 사운드와 관련된 공간이에요. 또 사운드 아티스트 유영주 작가의 전시 그래픽을 만들기도 했고요. 마침 작년에는 〈갤러리 사운드〉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마르코 후지나토(Marco Fusinato)라는 작가가 등장해요. 그 작가는 노이즈 사운드 아티스트인 동시에 비주얼 아티스트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운드를 어떻게 전시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삼는 사람이죠. 그때 책을 읽으면서도 너무 재밌었는데, 최근 두 작업과 연결된 지점이 있어서 이런 사운드, 혹은 청각적 상상에 관해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사운드와 이어져 나와 ‘시간성’도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예요.
매번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시도하는 것이 힘들진 않나요?
힘들지는 않고 너무 재밌는데, 항상 모르던 걸 하려고 하니까 망할까 봐 걱정은 되죠. (웃음) 근데, 두려워하면 결국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면 실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PLUS LIST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생각을 확장해 준 책 5
- 〈갤러리 사운드〉, 케일럽 켈리, 미진사
- 〈뉴 큐레이터〉, 플러 왓슨, 안그라픽스
-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 버나드 셀라·레오 핀다이센·아그네스 블라하, ENKR
- 〈사진 국가〉, 김계원, 현실문화A
-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arte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쉬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는 혼자 계속 생각해야 하는데, 책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거잖아요.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말이 있으면 거기서부터 또 다른 가지가 뻗어 나가기도 하고요. 〈갤러리 사운드〉는 보이지 않는 사운드를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의 측면에서, 〈뉴 큐레이터〉는 건축과 디자인 전시와 관련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NO-ISBN 독립출판에 대하여〉는 아티스트북에 관한 책이에요. 책을 내용이 담기는 틀이 아니라 하나의 전시장으로 바라봐요. 〈사진 국가〉는 19세기 후반 일본과 사진의 역사에 관한 내용인데요.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기록 사진이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은 최근 자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 읽은 책입니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는가, 왜 이런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웃음)”
TIPPING POINT
“저는 항상 작업이 끝나고 나면 다른 어떤 감상보다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이 작업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게 했는지가 저한텐 중요한 것 같아요.” 생각의 꼬리 물기는 기획과 스케치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업을 마친 후 떠오른 질문들이 새로운 작업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고, 지적 호기심과 연결되어 그를 평면 너머 다른 영역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와 즐거움이라는 지치지 않는 동력이 디자이너 오혜진을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