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오혜진의 A to Z: 질문에서 시작한 그래픽 디자인부터 북 디자인과 전시까지

오혜진 그래픽 디자이너·스튜디오 오와이이 대표

스튜디오 오와이이를 운영하며 여러 시각 매체를 아우르는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작업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입체적이다. 오혜진의 작업 방식, 그리고 일상의 공간과 비일상의 예술 공간에서 마주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Creator+] 오혜진의 A to Z: 질문에서 시작한 그래픽 디자인부터 북 디자인과 전시까지

올해는 스튜디오 오와이이(OYE)의 설립 10주년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웹과 북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지난 10년간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왔어요. 한 가지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는 신선한 접근, 언뜻 무심해 보이는 것들에 담긴 세심한 연출, 내용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북 디자인과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는 전시 등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작업 세계와 지난 프로젝트를 키워드로 살펴봅니다.

프로젝트 A to Z

A4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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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텍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작업했던 웹진 〈초과〉 10호와 함께 오혜진 디자이너가 터닝 포인트로 꼽는 작업이다. 리서치 후 생각을 시각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업으로, 2019년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진행했다. 개념으로부터 시작해도 결과물은 가시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픽 디자인의 특성상 시각적 형태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Sol Lewitt)의 ‘월 드로잉(Wall Drawings)’ 개념 – 솔 르윗이 작품을 그리는 방법을 기술한 설명서를 보고 그가 고용한 제도사들이 그것을 그린다 – 에 영향을 받아 조건을 설정하고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형태를 도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A4 용지에 5×5 그리드를 그리고 점을 찍기 위한 모양자를 만들어 그 점을 이어가며 형태를 만들었다. 이 방법은 현재 그의 여러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Bergen Art Book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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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북페어를 통한 만남이 새로운 연결 고리가 되어 오혜진 디자이너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2013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아트북페어)에 참가한 이후로 타이베이, 베르겐, 뉴욕, 상하이, 도쿄, 암스테르담 등 열댓 군데가 넘는 도시의 아트북페어에 다녀왔다. 그중 2019년에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열리는 ‘베르겐아트북페어’의 웹사이트, 포스터, 리플렛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맡아, ‘보물’이라는 키워드에 따라 두 개의 레이어를 만들어 진행했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시작한 작업인데, 그래도 제가 처음으로 바다 건너 사람과 무언가를 만든 작업이었어요. (웃음)” 한편, 이 작업이 다시 가교가 되어 프랑스 쎄제디시옹 & 르메곳 에디션의 〈유용한 바보들〉 북 디자인 작업으로 이어졌다.

Collection of the BB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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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진 디자이너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BBDK, Best Book Design in Korea)’을 두 차례 수상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고 서울국제도서전이 주관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은 디자인 부문으로, 2020년부터 매년 10종의 책을 선정한다.

2023년 선정, 〈유용한 바보들 issue 0〉(쎄제디시옹 & 르메곳 에디션)
〈유용한 바보들 issue 0〉, Book design, Commissioned by l’idiot utile, 245 × 330 mm, Offset print, 2022

의류, 패션, 이미지, 미학, 경제, 직업을 다루는 매거진으로 프랑스 포토그래퍼 유베르 크라비에르(Hubert Crabières)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매거진이다. “유베르 크라비에르는 자신의 사진이 책에서 실험적인 재료로 쓰이길 바라는 면이 컸어요. 자르고 이어 붙이는 그 모든 것에 열린 사람이었죠. 다양한 이미지를 마음껏 다뤄볼 수 있는 작업이었고, 다른 면으로는 책이란 우정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프로젝트예요. (웃음) 언어가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핸디캡이 정말 많은데도 3년 동안 함께 작업한 거잖아요.” 현재 진행 중인 다음 호 또한 2년째 작업 중으로 머지않아 출간될 예정이다.

2024년 선정,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시간의흐름)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 Book, Commissioned by deltatime, 150 × 220 mm, Offset print, 2023

‘타자기 서체를 쓰지 않고 어떻게 타자기의 속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디자인 작업이 출발했다. 그 힌트를 ‘줄글’과 ‘시간성’에서 찾아 첫 번째 페이지에서는 한 줄, 그다음 페이지에서는 두 줄, 다음 페이지에서는 세 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줄씩 본문의 줄글이 늘어나는 방식의 레이아웃을 고안했다. 소진한 종이 한 뭉치를 손에 쥔 느낌을 주고자 요나스 메카스의 원고 부분만 백색 용지를 사용하고, 책 표지부터 나머지 부분은 원고 뭉치를 감싼 포장지처럼 보이도록 만화지를 활용했다. 표지 역시 ‘줄글’을 모티브로 마치 원고 더미가 쌓이고 널브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Domin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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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오혜진 디자이너는 2024년 설립된 도미노프레스의 아트 디렉터이다. 2021년 푸하하하프렌즈가 큐레이션한 도시건축비엔날레 현장프로젝트를 통해 만난 도미노프레스의 박세미 대표로부터 아이덴티티를 의뢰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도미노프레스는 건축과 예술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출판사로, “건축적 사고를 바탕으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한다. 로고, 명함과 같은 기본적인 도미노프레스의 시각물을 만들었고, 첫 번째 출판물인 건축 총서 PP(Project Presentation)의 북 디자인을 비롯해 앞으로 발행될 다수의 책을 디자인할 예정이다. 현재 김승회 건축가가 20년에 걸쳐 작업한 ‘이우학교’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이다.

“이번 작업은 책이란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공감대로 만나,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기획 단계부터 답사나 미팅을 함께하고, 전 과정에서 건축가, 편집자, 디자이너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최선의 능동적 태도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낭만과 이상으로 가득한 재밌는 프로젝트라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러나 순수함은 끊임없이 위협받기 마련이기에 부디 이 아름다운 꿈이 오랫동안 유지되며 재밌는 결과물을 앞으로 꾸준히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hibition Unbox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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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주석〉, Mixed media, Commissioned by MMCA Gwacheon, 2023 (Photo by 김주영(스튜디오 밀리언로지즈),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젊은 모색 2023: 미술관을 위한 각주〉, Diagram, 841 × 594 mm, Offset print, 2023

‘젊은 모색’은 지난 40년간 지속된 국립현대미술관의 신인작가 발굴 프로그램이다. 〈젊은 모색 2023〉은 건축과 디자인 중심으로, 장르와 매체의 확장을 시도해 13명(팀)의 작가가 전시 무대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주제로 미술관 공간을 사유하고 탐색했다. 오혜진 디자이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시공간 정보를 탐구하다 전시 그래픽에 주목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지금가지 열린 전시 포스터의 이미지를 모아 인스타그램 스토리 ‘과거의 오늘’이라는 기능처럼 〈젊은 모색 2023〉 기간 동안 과거의 오늘을 다시 상기시킨 것. 관람객이 방문한 날에만 볼 수 있는 작업 형태로, 전시 기간이 끝나면 사라지던 포스터가 마치 유령처럼 다시 스크린으로 떠오르도록 했다.

#2. 플랫폼엘, 〈언패러사이트(UNPARASITE)〉

2021년 플랫폼엘 전시 〈언패러사이트〉에 참여해 〈0.1평 문서〉라는 책을 만들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출발한 이 전시를 위해, 당시 이사를 준비하던 그가 책이 자신의 부동산을 점유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 낱장으로 벽에 전시된 문서 한 장 한 장이 공간을 점유하고, 이것이 묶여서 책으로 판매되었을 때 또 다른 누군가의 집을 점유하게 된다.

Ideas for Book Co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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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 사는 이야기〉(마티)

미술 비평가 유지원이 2010년대 신생공간을 관통하며 쓴 에세이. 미술을 사고(buy) 미술로 사는(live) 이야기이다. 오혜진 디자이너는 첫 미팅에서 바로 표지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저자가 모은 작품이 많았는데, 책도 어떻게 보면 대량 복제한 누군가의 작업을 사는 거잖아요. 저자가 수집한 작품을 표지에 얹으면 작가의 작품의 복제품을 사는 게 되지 않을까, 표지와 뒤표지에 모두 유지원 저자가 갖고 있는 미술 작품이 실렸으면 좋겠다. 이게 아이디어였어요.” 미술 작품이 실린 책 표지는 너무 흔하지만, 단지 아름다움 때문을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보통 처음 생각난 아이디어는 나중에 버리게 될 때가 많은데, 첫 아이디어가 끝까지 간 드문 사례예요.”

#2.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미메시스)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Book, Commissioned by Mimesis, 115 × 190 mm, Offset print, 2023

‘책 표지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비튼 책. ‘우리는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는 책 제목이자 저자인 푸하하하프렌즈의 사훈이다. “문장만 보면 자기계발서 언어 같기도 했어요. 글자를 어떻게 드러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푸하하하프렌즈 사무실에 걸린 사훈 액자가 떠올랐어요. 문장을 디자인하지 말고, 그 공간을 사진으로 찍어서 제목으로 기능하게 하자. 이렇게 제안했어요. (웃음)”

New Member of 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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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 국제그래픽연맹)는 47개국 540여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모인 세계적인 단체이다. 1952년,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교류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안상수, 하라 켄야(Kenya Hara) 등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회원 자격은 수상자를 결정하듯 AGI 회원 추천과 심사위원단의 심사를 통해 진행되어 의미가 있다. 오혜진 디자이너는 2023년 AGI의 회원으로 선정됐다.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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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 Book design, Commissioned by Nasun Agency, 210 × 128 mm, 172p, Offset print, 2022

다방면으로 리서치하며 여러 단서들을 하나의 주제 아래 연결 짓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시각화 작업을 진행해 나간다고 앞선 인터뷰에서도 밝힌바, 읻다 출판사의 에이전시 ‘나선’의 〈줄줄〉을 예시로 그 과정을 소개한다. 〈줄줄〉은 한국 젊은 시인의 시를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는 시집으로, 언어마다 다른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담당한 것이 특징이다. 오혜진 디자이너는 프랑스어판을 맡아 진행했다.

“의뢰를 받을 당시만 해도 시와 시집에 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였어요. 일단 시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시론에 관한 책과 시인이 쓴 에세이 등 시와 관련된 여러 책을 봤어요. 그리고 그때 마침 읽고 있던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의 〈예술로서의 디자인〉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죠. 시는 함축적이기 때문에 상상하고 음미할 시간이 필요한, 속도가 중요한 매체라는 거였어요. 읽는 속도에 관한 여러 사례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마지막 장에 구두점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소설 〈율리시스〉나 시면서 회화 작업인 파울 클레(Paul Klee)의 작품 이야기였죠. 그런 텍스트가 상상력을 자극했어요.

‘시 몇 행이니까 이렇게 페이지를 만들어야지’가 아니라 일단 시에 대해 스터디하고, 시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한 텍스트를 찾아보는 거예요. 당시 〈율리시스〉를 사서 마지막 장을 보기도 하고, 파울 클레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계속 가지를 뻗어 나갔어요. 사실 결과물과 상관없는 내용이 많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모르는 분야를 알아간다는 것도 너무 재밌어요.”

Riso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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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소 인쇄는 오혜진 디자이너가 오랫동안 흥미롭게 탐구한 인쇄 기법이다. (그는 2015년 네덜란드로 떠난 인쇄 작업실 여행기를 엮어 독립출판물 〈리소 투어〉를 출간하기도 했다.) “리소 인쇄 방식을 스터디하면서 ‘해상도’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됐어요. 해상도가 단순히 인쇄 품질만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떠한 문제를 또렷이 인식하고 있으면 ‘해상도가 높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해상도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스터디 할 수 있는 툴이었어요.”

Untitled Cat, 420x549mm, Riso print

오혜진 디자이너가 2019년 코우너스가 기획한 〈잉크 빌리지〉 전시에 참여하며 만든 리소 인쇄 포스터이다. 리소 인쇄를 경험하고 해상도의 개념을 스터디하면서 여러 표현 방식을 탐구해보고 싶어 만들었다고. 픽셀처럼 네모난 공간을 통해 귀여운 검은 고양이를 완성했으나, 이는 고양이라는 상징을 드러내기보다 재료를 다루는 형식을 연습해 보는 것이 목적인 작업이다.

Seoul Biennale of Architecture and Urbanis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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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건축사 사무소 푸하하하프렌즈가 큐레이팅한 ‘현장프로젝트: 의심스러운 발자국’ 섹션을 위한 그래픽 작업이다. 오혜진 디자이너는 웹 페이지를 비롯해 사이니지, 영상 타이틀, 다섯 작가의 개인적인 도시 이야기가 담긴 주사위 등을 만들었다. 기존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소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업으로,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시의 특성상 전시에 관한 정보는 모두 QR코드를 통해 웹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된 것이 특징이다.

Text
T

오혜진 디자이너는 리서치 과정에서 텍스트를 많이 참조한다. 결과물이 시각 언어이기 때문에 텍스트와 같은 비가시적 요소에서 그의 상상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주제와 관련된 텍스트가 힌트가 되기도 하고, 평소 읽었던 책 속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거나 떠오르기도 한다. 웹사이트의 블로그 ‘옮겨 적기’ 카테고리에 인용의 문구도 틈틈이 모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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