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유현선의 A to Z: 전시 디자인부터 금속 활자 제작까지

유현선 워크룸·카우프만·파일드 디자이너

책, 전시, 브랜드 아이덴티티까지. 유현선은 시각 디자인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기획에서 구조까지 섬세하게 설계하는 디자이너다. 워크룸과 카우프만의 구성원으로 단어와 문장의 감도를 시각적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이어가는가 하면, 파일드의 구성원으로 사진과 관련된 프로젝트도 맡는다. 문장과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직조하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키워드 별로 살펴봤다.

[Creator+] 유현선의 A to Z: 전시 디자인부터 금속 활자 제작까지

북 디자인부터, BI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 타이포 디자인, 사진 작업 등 시각물과 관련된 전방위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유현선 디자이너의 작업 세계, 그리고 그동안 그녀가 쌓아온 포트폴리오를 A부터 Z까지 키워드로 소개합니다.

프로젝트 A to Z

BI design
B
1 4 3 SuperMatcha
슈퍼말차의 리브랜딩 작업.

유현선 디자이너의 작업에서 BI 디자인은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슈퍼말차의 리브랜딩 작업이다. 기존의 강렬한 초록색 배경과 명확한 브랜드 로직은 유지한 채, 서체의 무게감과 균형을 조정해 브랜드의 인상을 섬세하게 다듬었다. “기존 서체는 기울기나 곡선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어요. 좀 더 단단하고 수평적인 인상을 주는 서체로 바꾸자고 제안드렸죠.” 기존의 골격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감도를 더한 셈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커넥트 현대’ BI 디자인이 있다. ‘아울렛’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새롭게 해석한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로고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브랜드가 어떻게 보여지고 작동해야 하는지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큰 기업일수록 브랜드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화된 시스템이 필요한 법이다. 유현선은 색상값, 서체, 구성 비율 등 시각적 디테일은 물론, 매장 위치나 특성에 따라 어떻게 응용될 수 있을지까지 고려해 설계했다. 이 시스템은 커넥트 부산에 처음 적용됐고, 이후 청주 지점으로 확장되었다. 도시마다 공간은 달라도 브랜드의 인상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는 점은 그만큼 골조를 잘 설계했음을 방증한다. 유현선에게 이 프로젝트는 ‘없던 브랜드를 만드는 일’에 가까웠고, 그만큼 더욱 철저하고 정교한 시스템 설계가 필요했다고 전했다.

<Foreve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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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선 디자이너가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맡은 <Foreverism>.
5 2 2 Foreverism

한 권의 책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진 실험은 디자이너가 사유를 어떻게 시각으로 풀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유현선 디자이너가 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맡은 <Foreverism>가 그 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제목조차 드러나지 않으며 별 형태의 그래픽이 중심을 잡는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실험은 본문에 있다. 한 페이지 안에 스물 아홉 가지 텍스트 크기와 행간이 위에서 아래로 나열되며 점차 작아지고 다음 페이지에서 다시 처음 크기로 되돌아가는 방식이다. 책의 주제인 ‘영원주의(Foreverism)’가 과거의 문화와 감각을 현재로 반복 소환하는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착안해 시각적인 배열에 변화를 준 것. 이 파격적인 구성은 트위터에서 화두가 되기도 했는데 ‘읽을 수 없다’는 불만 섞인 반응도 있었지만, ‘새로운 독서 리듬을 제안하는 실험’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뒤따랐다. 한편 ‘영원주의’라는 주제는 2024년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 끝으로>라는 전시로 확장됐으며, 전시의 도록 디자인을 워크룸 예승완 디자이너가 맡고 있다.

Kauf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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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사물이 될 수 있을까? 유현선 디자이너는 이 질문에서 출발해 카우프만을 만들었다. 워크룸에서 직접 기획하고 주도한 세컨드 브랜드로, 책이나 포스터를 넘어 문장을 담은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출판사를 기반으로 한 워크룸의 정체성을 바탕에 두고 문장을 기반으로 한 사물 제작이라는 방향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책,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 텍스트에서 인상적인 문장을 수집하고, 그것을 실물의 형태로 옮긴다. 이름은 영화 〈어댑테이션〉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에게서 가져왔다. 각본가처럼 문장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브랜드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첫 제품은 ‘각본가를 위한 셔츠’로, 영화 속 문장을 패브릭에 담았다. 이후 캔버스백, 포스터, 티셔츠 등 다양한 아이템을 출시하며, 문장을 감각적인 형태로 번역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카우프만은 물성과 문장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실험장이자, 유현선 디자이너의 취향과 시선이 오롯이 담긴 브랜드다. 단순한 굿즈가 아닌, 문장을 통해 감각을 자극하고 일상의 맥락에 새로운 층위를 부여하는 사물들로 기획된다.

Metallic 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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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카우프만은 금속 활자를 모티프로 한 오브제 시리즈 ‘Metallic type’을 선보였다. 손바닥 크기의 단단한 알루미늄 덩어리 위에 알파벳 한 글자가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Summer’, ‘seoul’, ‘coffee’, graphic’ 등의 다양한 단어가 활용됐는데, 알파벳 하나하나를 독립된 오브제로 다루는 동시에 조합이 가능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감상을 넘어 타이포그래피를 만지고 구성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카우프만의 이번 시리즈 제품은 글자를 읽는 것을 넘어, 손으로 만지고 두고 바라보는 방식으로 문장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이번 시리즈는 단어 별로 오직 한 세트씩 제작됐으며 총 15종의 제품이 출시됐다. 현재 웹사이트에 공개된 제품은 모두 품절.

sans
S

유현선 디자이너가 참여한 ‘sans’ 브랜드의 로고와 브랜드 폰트 디자인은 ‘대체 커피’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치환한 작업이다. ‘sans’는 프랑스어로 ‘없음’을 뜻하며, 실제 커피 원두 없이 커피의 향과 풍미를 구현하려는 브랜드 철학을 품고 있다. 이 철학을 로고에 녹이기 위해 유현선 디자이너는 ‘SANS’의 ‘A’와 ‘N’ 같은 주요 글자의 획 일부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시각적으로 빈 곳을 남김으로써 ‘대체’의 여백과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윤민구 디자이너가 이를 기반으로 전용 서체를 개발했다. ‘대체 커피’의 개념을 담아 ‘대신 존재하는 것’, 그러나 본질은 비슷하다는 아이디어를 로고에서부터 전용 폰트까지 이어지는 디자인 흐름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The Most Beautiful Book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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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유현선 디자이너는 워크룸 소속으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전시의 기획과 시각 디자인을 맡았다. 김형진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을 이끌었고, 공간 디자인은 포스트스탠다즈의 김민수가 담당했다. 이 전시는 서울국제도서전과 보고타국제도서전 한국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 형태로 선보였다. 책을 진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조형성과 물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전시의 핵심 키워드는 ‘확대’였다. 김경태 작가가 촬영한 수상작 도서들은 실제 책보다 훨씬 큰 크기로 인화되었고, 서울 전시에서는 라이트박스를 활용해 마치 전광판처럼 구성했다. 개별적인 장치 없이도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간결한 방식이었고, 북 디자인 그 자체를 기념하려는 전시의 취지와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책을 단순한 콘텐츠 매개체가 아닌 하나의 조형물로 바라보는 시도를 통해 책의 아름다움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제안했다. 한편 이 전시는 2022년 월간 〈디자인〉이 주관한 코리아디자인어워드(KDA)에서 그래픽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그 가치를 재조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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