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로호타입: 활자 사이의 여백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다

김기창·홍슬기·김연우 로호타입 디자이너

로호타입에게 글자는 조형을 넘어 사고를 확장하는 장치이자 관계를 시작하게 하는 언어다. 각기 다른 매체 속에서도 글자가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감각을 남기는지 탐구한다.

[Creator+] 로호타입: 활자 사이의 여백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다

editor’s note

로호타입은 글자를 통해 세상을 정리하고 그 질서 위에 대화를 쌓아가는 스튜디오다. 서체를 다루는 정교한 감각과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열린 태도를 함께 지니고 있다. 활자에서 출발해 그래픽, 전시, 공간, 웹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언제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100 Beste Plakate〉의 한국 전시를 오랜 기간 운영하며 포스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고, 그래픽 디자이너의 시선을 한층 확장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SeMA Reference Library에서는 도서관의 언어 체계를 새로 설계하며 글자가 공간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실험했다. 이번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하 SDF)에서는 월간 <디자인>과 기획전 Graphic Universe 2025를 공동 기획하여 글자를 릴레이로 디자인하는 흥미로운 작업 방식을 채택했다. 규칙을 설계하고 그것으로 다시 사람과 세계를 잇는 일. 그래픽을 언어로 관계로 이어지는 순간을 믿는 스튜디오, 로호타입은 활자 사이의 여백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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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호타입의 김기창, 홍슬기, 김연우 디자이너 (순서대로)

PLUS 1. 디자이너 듀오에서 트리오로

로호타입은 김기창, 홍슬기 두 분으로부터 시작됐죠.

김기창. 처음엔 ‘명인명촌’이라는 전통 식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어요. 독립 후 여러 프로젝트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에 슬기 님께 도움을 청했고, 자연스럽게 긴 시간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인턴으로 시작했지만,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서 결국 같이하면 시너지가 날 동료라고 생각했습니다.

홍슬기. 맞아요. 원래는 사제 관계로 시작해 여러 번 함께 작업하며 서로 취향과 작업의 결이 잘 맞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호하는 정도가 비슷한 수준을 넘어 실제 결과물로도 연결될 정도로요. 그래서 ‘로호타입’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로 6년 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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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한편에 놓인 로호타입 명함
최근 김연우 디자이너님이 합류하며 삼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연우. 원래 무빙웹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계의 웹 프로젝트를 주로 맡고 있었는데, 로호타입 웹사이트 개편을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 두 분과 인연이 생겼어요. 이후 ‘노는 인턴’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활동을 같이하며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됐습니다. 읽고, 즐기고, 경험하고, 주관을 나누는 시간이 많아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김기창. 저희가 연초에 비정기적으로 ‘노는 인턴’이라는 프로그램을 해요. 공식적인 인턴십이 아니라 함께 책을 읽고 전시를 보며 서로의 취향과 태도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지는데요. 연우 님은 그 과정에서 저희와 결이 잘 맞았고 작업 스타일도 비슷해서 함께하자고 직접 제안했죠. 올해 9월에 합류했지만 이미 저희와 여러 차례 합을 맞춰 본 분이라 기대가 돼요.

업무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모르고도 팀원을 모집하는 ‘노는 인턴’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네요. 구인에 이런 방식을 접목한 이유가 있나요?

홍슬기. 우선 저희가 규모가 큰 디자인 스튜디오는 아니잖아요. ‘로호타입만의 디자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시기에 노는 인턴을 시작하게 됐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일하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나더라고요. 특히 일만 잘하는 사람보다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을 우선시했습니다. 대화가 양분이 되어 신뢰가 쌓이고 관계가 단단해지잖아요.

김연우 독서나 사진 워크숍에서 나눈 이야기가 다음 프로젝트의 단서가 되기도 해서 좋았어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인턴십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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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로호타입에 합류한 김연우 디자이너는 웹사이트 개편을 통해 김기창, 홍슬기 디자이너와 인연이 닿았다고.
사실상 비공식 합숙 면접인 셈이네요(웃음).

김기창, 홍슬기. 사실 놀자고 불러냈지만, 취향도 태도도, 우리와 함께했을 때의 그림도 두루 살핀 건 맞아요(웃음).

세 분이 협업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요?

홍슬기. 프로젝트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논의를 함께 시작해요. 이후 자연스럽게 역할을 분담하죠. 대체로 저희에게 들어오는 일은 모두 기술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에 PM을 통해 책임자를 나누고 그래픽 비중을 분배하는 식이에요. 기술적인 분업보다 ‘이야기의 방향’을 먼저 잡아요. 결과가 아니라 감각의 방향을 함께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LUS 2. 포스터가 결집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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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호타입을 대표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100 Beste Plakate〉 한국 전시 모습
로호타입 하면 포스터 얘기를 빼놓을 수 없죠.

김기창. 포스터는 우리에게 실험의 장이에요. 글자와 인쇄의 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매체죠. 리소그래피나 홀로그램, 금박 등 다양한 인쇄 가공을 자주 시도해요. 장식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사용하죠. 인쇄물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감각은 화면과 다릅니다. 종이의 질감, 잉크의 번짐, 빛의 각도까지 모두 그래픽 언어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100 Beste Plakate〉 한국 전시는 로호타입을 대표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되었나요?

김기창. 제가 2017년 〈100 Beste Plakate〉에 명인명촌의 연작 포스터 4점으로 처음 선정되며 협회 관계자들과 연결됐어요. 이후 교류를 이어오면서 한국에서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두성페이퍼갤러리와 협력해 2018년부터 매년 서울 전시를 공동 기획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전시를 주관하는 협회와 신뢰가 충분하지 않아 어려움도 있었는데요. 첫 해 전시에는 포스터 실물을 오직 반밖에 못 받아서 나머지는 직접 출력해서 전시해야 했어요. 하지만 몇 해를 거치며 결과를 입증하며 신뢰를 얻어냈죠. 이제 국내 전시 후 포스터도 저희가 보관할 정도로 견고한 관계인데요. 협회도 저희의 전시 방식을 좋아하고 존중해 주세요.

한국만의 별도 콘셉트와 포스터를 제작해 전시하는 점도 협회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홍슬기. 서울 전시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순회전과는 다른 맥락을 주고 싶었어요.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살리고 관람자가 포스터의 물성을 체감할 수 있도록 구성했죠. 조명, 종이, 행잉 방식까지 새롭게 접근했습니다. 포스터의 크기나 배치에도 리듬을 주어 시선이 공간을 따라 흐르도록 설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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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크기와 배치부터 조명, 종잉, 행잉 방식까지, 단순한 순회전과는 다른 맥락을 기획한 점이 〈100 Beste Plakate〉한국 전시만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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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자가 포스터의 물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 경험을 디자인했다.

김기창. 한편, 코로나 시기에 심사 과정의 에피소드도 기억에 남아요. 원래는 오프라인으로 전부 확인했던 포스터를 모두 온라인으로 심사를 진행했는데, 실제 인쇄본이 도착하니 예상보다 훨씬 강렬한 색감의 작품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웹이다 보니 조금 더 시선을 가로채는 데 중점을 두고 작업했을 수도 있고요. 종이의 재질과 인쇄 방식이 시각적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시의 연장선이자 확장으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라고요.

김기창. 전시가 한 해의 이벤트로만 끝나지 않길 바랐어요. 그동안 불가피하게 협회 관계자들과 온라인으로만 소통했는데요. 올해 행사에 초대 받아 처음 대면으로 인사를 나누게 됐어요. 국내에서 크고 작게 포스터 전시가 열리고 있긴 하지만, ‘포스터만을 위한 전시’라는 개념이 아직 낯선 터라 전시의 맥락과 디자이너의 시선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죠. 현장에서 인터뷰 형식 등을 활용해 촬영한 다큐멘터리 를 제작 중입니다. 오는 12월 로호타입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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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호타입 공식 유튜브를 통해 공개할 예정인 다큐멘터리
기반을 닦지 않은 상태로 해외 협회와의 협업을 성사한 게 놀라워요. 다른 문화권과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협업의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김기창. 결국 이해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그래픽의 기본은 같습니다. 협업할 때는 상대의 맥락을 먼저 이해하려고 합니다. 〈100 Beste Plakate〉 협회나 주한 스위스 대사관과 협업할 때도 그들의 문화적 결을 파악한 뒤 대화하며 시각적 방향을 정했습니다.

홍슬기. 같은 언어를 써도 결이 달라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그래픽 전통만 봐도 리듬이 다르죠. 우리는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며 합의점을 찾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최근 포스터가 인테리어 오브제로 소비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향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나요?

홍슬기. 굳이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포스터가 단순히 예쁜 물건으로만 머물지 않길 바라요. 시각 언어로서 포스터가 여전히 정보를 전달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LUS 3. 타입으로 말하는 디자인의 언어

로호타입은 타입 디자인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래픽 전반으로 확장된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로호타입이 생각하는 ‘타입과 그래픽의 경계’는 무엇인가요?

홍슬기. 매체를 만나면서 그래픽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포스터든 웹이든, 글자가 놓이는 환경에 따라 형태와 리듬이 달라지니까요.

김기창. 글자가 이미지로 읽히는 순간, 타입은 이미 그래픽이 됩니다.

“타입과 그래픽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타입이 곧 그래픽이고, 그래픽이 곧 타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면에서 매체를 만났을 때 명확한 기능을 해냈던 게 서울시립미술관의 Reference Library 프로젝트라고 생각됩니다.

홍슬기. 도서관의 핵심은 책을 잘 찾게 하는 일입니다. 저희는 단순히 시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과 이용자 사이의 언어를 새로 정의했습니다. 청구기호는 도서관의 약속 같은 존재죠. 그 약속을 디자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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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SeMA Reference Library 프로젝트

책이 이동하거나 새로 들어와도 같은 질서 안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기호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양립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고자 직관적으로 구성했어요. 사서에게도, 방문자에게도 어렵지 않도록요.

김기창. 이 프로젝트는 그래픽보다 운영이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라벨 표기 시스템, 리플렛, 집기까지 모두 하나의 구조 안에서 연결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용자의 시선이 멈추지 않게 하는 디자인을 목표로 삼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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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SeMA Reference Library 프로젝트

지금도 프로그램은 현재진행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도서가 늘어나고 서가가 이동할 때마다 우리가 만든 구조가 함께 변화합니다. 그래픽이 아니라 운영 체계로서의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었던 작업이었죠.

최근 디자인계에서는 AI 기반 툴이나 가변 폰트 등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로호타입이 유지하려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홍슬기. 변화하는 흐름을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중심은 늘 글자에 둡니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 글자가 지녀야 할 본질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기술보다 글자의 구조나 형태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합니다.

기본이 단단해야 그 위에 새로운 시도를 얹을 수 있으니까요.”

PLUS 4. 함께 만든 질서, 그리고 다음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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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자인페스티벌 기획전 <그래픽 유니버스 2025> 포스터 디자인
올해 서울디자인페스티벌(SDF)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기창. 이번 SDF에서는 〈그래픽 유니버스 2025(Graphic Universe 2025)〉라는 이름으로 전시 기획에 참여합니다. 서울대학교의 크리스 하마모토, 이정아 디자이너와 함께 공동 기획했고 총 42팀의 디자이너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오프라인 전시와 동시에 웹사이트에서도 같은 전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로호타입의 부스는 웹사이트의 인터랙션을 공간적으로 확장한 형태로, 세포 분열처럼 이어지고 확장되는 원형 구조를 구현했습니다.

앞으로 타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로서 앞으로의 포부를 들려 준다면요?

김기창. 타입을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제약이 있다고 느끼진 않아요. 글자를 기반으로 하면 그 위에 어떤 실험이든 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로호타입은 하나의 규칙보다 관계로 유지되는 스튜디오예요. 배우고, 이야기하고, 다시 시도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요. 또 외부에서 봤을 때 변화하는 스튜디오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면서도 그 안의 온도는 유지되는 팀으로 남고 싶습니다.

PLUS LIST

로호타입이 소개하는 SDF 기획전 관람 포인트 3

올해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을 위해 로호타입과 이정아 디자이너, 크리스 하마모토 서울대학교 교수가 함께 기획한 ‘Graphic Universe 2025’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포스터’를 콘셉트로 삼았습니다. ‘ㄱ’부터 ‘ㅎ’까지 14가지 자음이 들어간 참가팀이 끝말잇기를 하듯 디자인 신의 동료를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100 Beste Plakate〉의 포스터숲에서 착안한 이 전시는 올해 디자인한 42점의 포스터를 만나볼 수 있는데요. 올 한 해 대한민국의 면면을 반영한 그래픽들로 구성된 이미지를 다채롭게 만나 보세요.

-Point 1

이름으로 연결되는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 현재 한국 디자인 신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와 디자이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Point 2

참여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올해의 포스터: 2025년 신작, 이번 행사와 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 42점을 한자리에서 만나 보세요.

-Point 3

일시적인 전시가 아닌 앞으로도 이어지는 ‘진행형 전시’입니다.

TIPPING POINT

타입을 언어로 바라보는 순간 디자이너의 질문은 달라진다. ‘무엇을 어떻게 예쁘게 만들까?’에서 ‘무엇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로호타입은 그 질문을 포스터와 공간, 웹에서 반복해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글자에서 질서로, 질서에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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