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랩 김종유 소장
재료의 가능성을 배양하는 실험실
2026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디자이너스 초이스관을 선보이는 유랩 김종유 소장은 20년 가까이 현업에서 활동한 베테랑 디자이너다.

오늘날 소재는 디자인의 외피 이상을 의미한다. 공간이나 제품의 기능성 향상과 결부되기도 하고 브랜드의 철학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오늘날에는 재료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지속 가능성이나 로컬리티 같은 시대의 화두와 직결되기도 한다.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유랩과 오온 건축사무소를 이끄는 김종유 소장은 오랜 시간 바로 이러한 소재에 천착한 디자이너다.

無用之用

유랩이 어느덧 설립 19년 차를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고유의 디자인 철학을 다지고 확장한 디자인 회사도 드문 것 같아요.
몇 해 전 돌아가신 마영범 소장님과 B&A 건축사사무소의 배대용 소장님 영향이 큽니다. 실무자로서 모신 두 은사의 디자인을 훔쳤다고도 볼 수 있죠.(웃음) 마영범 소장님은 오브제가 공간을 어떻게 환기하는지 가르쳐주었어요. 또 배대용 소장님에게 배운 것은 공간의 축입니다. 건축과 인테리어가 축을 따라 어떻게 일체화되는지, 어떻게 해야 짜임새 있는 공간이 되는지 알려주었죠. 두 디자이너의 조형 언어가 유랩 안에서 적절히 믹스된 것 같아요. 저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계승했다고 볼 수 있죠.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디자인은 유랩을 이해하는 단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요. 논산 출신인 저는 19살에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10대 때는 논산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서울에 오니 이 도시도 비좁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운 것을 탐미해온 터라 여러 나라의 갤러리를 둘러봤죠. 그런데 여러 곳을 여행하고 깨달은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미학이 내가 태어난 땅에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때부터 동양철학을 파고들기 시작했죠. 그때 읽던 책 중 하나가 〈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였는데 마영범 소장님이 이 책을 발견하고 저자인 정용선 선생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저와 제 아내는 선생과 깊은 교류를 나누고 있죠.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가 생각나네요.(웃음)
제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극에는 자기 성찰이 있더군요. 자신을 일깨워가며 작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추상화가 아그네스 마틴도 그중 하나죠. 유년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받았다는 그는 울분을 해소할 길을 찾다 선불교를 만났다고 해요. 참선을 통해 자기와 마주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작품 세계로 이어졌죠.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긋는 선과 그런 아픔이 있는 사람이 긋는 선은 분명 다를 거예요. 아그네스 마틴의 참선처럼 저는 동양철학에서 자기 성찰의 길을 찾은 셈이죠.


그런 사상이 디자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나요?
프로젝트의 저변에 고르고 넓게 퍼져 있어요. 이번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선보일 ‘디자이너스 초이스’ 관도 그 중 하나이죠.
이번 호가 나올 때 즈음 서울리빙디자인페어가 한창이겠네요.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세요.
장자의 산목散木에서 영감받았어요. 유용한 나무는 금세 재목이 되지만 아무도 탐하지 않아 방치된 나무는 오히려 천수를 누린다는 사상이죠. 그렇게 자란 나무가 사람들에게 그늘과 쉼터를 제공해주니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에요. 전시 부스는 버려진 것, 규격에 맞지 않는 것, 잊혔던 것으로 채울 생각이에요. 레이저 커팅이나 용접을 할 때 나오는 용접 똥이나 삼베 천을 전시 연출에 활용하고 조현영, 정우원, 안도현, 김성철 등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해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는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존감을 높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재를 찾아 떠나는 모험


유랩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소재입니다. 이렇게 소재에 천착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처음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컸어요. 제가 회사를 설립한 게 30대 초반이었어요. 다소 이른 독립이었죠.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예산이 넉넉지 못한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한정된 예산 내에서 돋보이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을 소재에서 찾은 것이죠. 꼭 값비싼 소재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차운기 선생은 건축할 때 쓰레기장을 뒤졌다고 해요. 저도 초반에는 거푸집에 썼던 중고 합판을 활용하거나 공사장의 버려진 보드를 재활용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우리도 점점 하이엔드 공간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공간을 곧잘 옷에 비유합니다. 정말 좋은 옷들은 상표를 드러내지 않고 소재로 말하죠. 피부에 가장 밀접하게 닿는 소재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죠. 공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닥재에 고목을 쓰느냐, 대리석을 쓰느냐에 따라 공간의 인상은 물론 사용자의 경험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공간에 기氣를 만드는 것인데 소재가 그 출발점이라고 봐요.
지속 가능성 차원에서도 소재는 이제 디자인의 핵심 요소가 됐어요.
지속 가능성 차원에서 소재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팬데믹 시기였어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마켓컬리 같은 산지 직송 서비스를 애용했는데 주문한 상품에 비해 포장재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비단 배송 앱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시하거나 공간을 만들 때 나오는 폐기물도 어마어마하죠. ‘내가 쓰레기를 만드는 주범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관점이 반영된 프로젝트가 시리즈코너의 이태원 플래그십입니다. 폐지를 활용해 블록을 만들고 이것을 공간의 구성 요소로 활용했습니다. 매장 안에는 종이 블록을 활용한 의자도 하나 제작해 배치했는데 팔걸이 부분에 작은 나무를 하나 식재했어요. 이 종이가 나무로부터 왔고 결국 이 나무가 자라 다시 종이가 되는 순환을 암시하는 거였죠.



유랩이 관록 있는 회사임에도 디자인 언어는 매우 동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소재 때문인 것 같아요.
도시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공간은 콤팩트해질 수밖에 없어요. 달리 말하면 공간과 살을 부대끼며 산다는 뜻이 되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부에 손상을 주지 않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소재에 관심이 가더군요. 신소재도 좋지만 저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봐요. 들마루, 서까래…. 모두 자연에서 온 재료로 만들었죠. 이처럼 선조의 지혜가 묻어나는 자연 소재,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충분히 재조명할 만한 소재를 꾸준히 발굴해 적용하려고 해요.


그런 생각 때문인지 유랩의 공간은 공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공예 작가들과 활발히 협업하는 이유이죠. 유랩은 설계비 일부를 공예가들에게 소재 개발비로 지급해요. 의도적으로 소재 생산도 작가에게 맡기죠. 자기 작품을 판매하는 것처럼 이윤이 남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오월의 종 한남점과 그래픽 서점이 있죠.




오월의 종은 건축 외장재부터 아우라가 남다릅니다.
빵집을 설계할 때 많은 사유를 거쳤습니다. 빵을 만드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해보니 세라믹 생산 과정과 퍽 닮았더군요. 흙을 반죽해서 성형을 하고 숙성한 뒤 오븐에 넣어 굽는 과정이 완벽하게 일치하죠. 이에 기반해 김무열 작가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무사히 납품까지 완료해 프로젝트를 완수했습니다.
공간을 연 이듬해엔 〈오월의 종: 나의 마지막 빵집〉이라는 책까지 냈죠. 대형 프로젝트도 아니고 프랜차이즈 공간도 아닌데 단행본까지 출간한 이유가 궁금했어요. 건축사 사무소나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가 흔히 내는 작품집도 아니잖아요.
업력이 20년 가까이 되면서 우리 디자인을 한번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작품집은 내기 싫고.(웃음) 요즘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궁금해할지 생각하다 보니 딱 오월의 종 규모의 공간을 소유하고 운영하고 싶어 하는 독자가 많을 것 같았어요. 어떻게 땅을 매입하고 건축 모형을 만들었는지,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고, 채광은 어떻게 계산했는지…. 책 가장 뒤쪽에는 설계비부터 시공비까지 가감 없이 공개했어요. 어떤 과정을 거쳐 건물 하나가 탄생했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확실히 공유의 가치를 실천하는 디자인 회사라는 생각이 드네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과 실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다음 세대의 디자이너들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유랩 웹사이트에 우리가 탐구하고 실험했던 소재들을 면밀히 기록해놓은 것도 같은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평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소재 연구를 하는 편인가요? 그러기엔 프로젝트가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맞아요. 시간을 따로 내기보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계속 관찰하는 편입니다. 기획 당시부터 소재를 구상하는 경우도 있고, 중간에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랑핸드 마포점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프로젝트의 예산 자체는 넉넉하지 않았어요.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소재가 무엇일지 찾다가 눈에 들어온 게 파라핀이었죠. 브랜드가 향초를 제작하다 보니 원료인 파라핀을 무척 싸게 공급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거푸집에 파라핀을 부어 벽체를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통으로 제작할 생각이었지만 소재 특성상 균열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대안으로 모듈 벽으로 제작했죠.




mm를 파고드는 디자이너의 탐구 생활


그렇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프로젝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네이버 1784의 지하 구내식당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여기서 보통 하루에 1만 2000명이 식사를 한다고 해요. 상당한 인원이죠. 그린팩토리를 사용하던 직원들의 불만 중 하나가 식당 공간의 소음이었는데 워낙 많은 인원을 수용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죠. 소음을 줄일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흡음재는 너무 비쌌어요. 4×8 사이즈 한 장에 30만~40만 원씩 하더군요. 그때 운전을 하다가 눈에 들어온 게 고속도로 방음벽이었어요. 생산 업체에 문의하니 기성 흡음재 가격의 1/10 수준이더라고요. 그렇게 방음벽에 쓰는 알루미늄 자재로 공간을 완성했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소음을 70~80% 정도 막을 수 있었죠.


그야말로 관찰의 힘이 빛난 순간이네요. 이태원 그래픽 서점에서도 그 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클라이언트는 만화 카페를 열고 싶어 했는데 제가 일을 키웠어요.(웃음) 어른들을 위한 만화방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했고 아예 신축을 하자고 이야기했죠. 빛을 들이는 방식, 창이 없는 건물, 책을 읽는 다양한 자세, 그리고 술 마시는 서점 같은 키워드가 설계의 단초였습니다. 정북 방향 일조권 사선 제한 때문에 층이 올라갈수록 뒤로 물러서는 구조를 설계해야 했는데 이때 벌어지는 층 사이의 간격으로 빛을 들이자는 계획이었어요. 덕분에 따로 창을 내지 않았는데도 갑갑한 느낌이 들지 않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독서의 행태도 자세히 관찰했어요. 그리고 책을 읽는 다양한 자세를 공간에 반영하려고 했죠. 이것이 기성 건축가와 차별화되는 저만의 특징인 것 같아요. 보통 건축가들은 주변의 맥락을 반영해 건물을 지으려고 하죠.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이를테면 그래픽이 과연 도시를 거니는 행인들을 위한 건물일까요? 그보단 서점에 들어와 책을 읽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를 관찰하고 이를 외부로 연장하는 게 더 옳은 접근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죠. 공간의 즐거움은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2021년에는 건축사무소 오온(이하 오온)도 개소했습니다. 소장님에게 또 하나의 분기점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지금 준비 중이긴 한데 저는 이번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기점으로 조금씩 회사에서 페이드아웃fade-out하려고 해요. 유랩이 영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지금 팀원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게 제 마지막 목표이거든요. 그 과정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이 오온입니다. 지금은 유랩과 오온이 경계 없이 일하고 있지만 앞으로 일을 조금씩 줄여나가려고 해요. 나중에는 프로젝트를 저 혼자서 1년에 딱 하나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앞서 말했듯 저는 기존 건축가들과 프로젝트 접근 방식이 조금 달라요. 내부가 중요하고, mm 단위로 디테일을 생각하죠.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정밀하게 만든 공간을 원해요. 그런 몰입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만든 게 오온입니다. 인테리어는 필연적으로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시류나 젠트리피케이션에도 쉽게 영향받고, 소유주의 필요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죠. 하지만 건물은 한번 지어 놓으면 100년 이상도 버틸 수 있습니다. 유랩은 앞으로도 계속 다양한 공간 실험을 이어갈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온은 먼 훗날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을 수 있는 건물을 짓는 데 집중하도록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