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건축사협회(AIA)가 선정한 올해의 건축가, 반 시게루
반 시게루의 대표 건축 프로젝트 4
미국건축사협회(AIA)가 선정한 올해의 건축가는 반 시게루다. 그는 마천루 대신 종이 파이프로 재난 현장의 안식처를 짓는다. 낮은 곳을 향한 그의 인도주의 건축은 사회적 위기에 응답하는 진정한 실천이자 위로다. 반 시게루의 철학이 깃든 대표 건축 프로젝트를 살펴본다.

우리는 보통 ‘건축’이라고 하면 도심 속에 높게 솟은 마천루나 화려한 유리 빌딩을 떠올린다. 건축은 오랫동안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힘을 뽐내는 수단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런 화려함 뒤편에서, 오로지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만 집중해 온 한 건축가가 세계 건축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섰다. 바로 2026년 미국건축가협회(AIA) 금메달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의 건축가, 반 시게루(Ban Shigeru)다. 그는 2014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데 이어, 이번 수상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적 거장임을 인정받았다.
반 시게루의 건축은 웅장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대신 낮은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는 남들이 단단한 콘크리트와 철강에 매달릴 때,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벼운 ‘종이 파이프’에 주목했다. 그의 작업실은 세련된 도심의 사무실이 아니라, 지진으로 무너진 마을이나 전쟁으로 집을 잃은 이들이 울고 있는 재난 현장이다. 이번 AIA 금메달 수상은 단순히 그가 건물을 예쁘게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건축가는 사회적 위기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가 몸소 보여준 실천에 대한 찬사다. 그는 한 번 지으면 영원할 것 같은 콘크리트 건물보다, 비록 종이로 만들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안식처가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냈다.
반 시게루 그리고 종이의 의지
195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반 시게루는 목수인 아버지와 패션 디자이너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재료의 물성을 익혔다. 나무를 다루는 정교한 손길과 천의 유연한 질감을 이해하는 감각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감각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기존 건축계의 관성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재료를 선택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미국 쿠퍼 유니언(Cooper Union)에서 수학하며 당시 건축계의 거장이자 교육자였던 존 헤이덕(John Hejduk)의 지도를 받은 그는 건축의 기본 기하학적 구성과 재료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 정신을 전수받았다. 헤이덕의 가르침은 그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기술자를 넘어, 건축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사상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를 상징하는 가장 독보적인 혁신은 바로 재생 종이를 압축해 만든 ‘종이 파이프(Paper Tube)’ 구조의 발견이다. 1980년대 중반, 시게루 반은 저렴하면서도 구하기 쉽고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재료를 고민하던 중 종이 파이프가 가진 놀라운 구조적 가능성에 주목했다. 대중은 흔히 종이가 물에 취약하고 하중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편견을 가졌으나, 그는 방수 처리와 과학적인 구조 보강을 통해 이를 콘크리트 못지않은 훌륭한 건축 자재로 탈바꿈시켰다. 그가 이토록 종이라는 재료에 집착한 이유는 건축이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화려한 전유물이 아니라, 집을 잃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실질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종이로 만든 집이라도 사람들이 사랑하고 소중히 사용하면 영구적인 건물이 되지만, 거대 자본을 위해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도 금방 헐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임시 건축물’에 불과하다는 철학을 전파하며 건축의 영속성을 재정의했다.

이러한 그의 진가는 인류가 위기에 처한 재난 현장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19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비인간적인 환경에 놓인 난민들을 위해 종이 쉼터를 제공하며 시작된 그의 행보는 1995년 고베 대지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지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비극의 최전선을 향했다. 그는 단순히 건물을 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비를 출연해 재난 구호 네트워크인 ‘VAN(Voluntary Architects’ Network)’을 설립하여 보다 체계적인 구호 활동을 펼쳤다. 특히 체육관 등 대규모 수용 시설에서 생활하는 이재민들에게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인간다운 존엄을 보장해 주는 ‘종이 파티션 시스템(PPS)’은 그의 인도주의적 건축 철학이 낳은 최고의 산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시게루 반은 건축가의 사회적 책무를 몸소 실천하며, 가볍고 유약해 보이는 종이 기둥 위에 인류애라는 거대한 가치를 세워 올린 시대의 장인으로 거듭났다.
구조의 시학, 재료의 윤리
반 시게루의 건축은 재난 현장의 긴급 구호소와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미술관이라는 양극단의 지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이 상반된 공간들을 관통하는 핵심은 재료의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혁신적인 실험 정신과 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에 두는 단단한 철학이다. 그는 ‘종이’라는 가장 유약한 재료를 통해 구조적 견고함과 심미적 가치를 동시에 증명하며 건축의 공공성을 새롭게 정의해왔다. 기술적 정교함과 인도주의적 미학이 결합하여 현대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연, 반 시게루의 네 가지 결정적 프로젝트를 살펴본다.
종이 칸막이 시스템(PPS)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수많은 이재민은 임시 주택이 마련되기 전까지 체육관 같은 대형 수용 시설에서 수개월을 머물러야 했다. 칸막이 없는 개방된 공간에서의 생활은 프라이버시 부재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고, 이는 이재민들의 심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시게루 반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종이 파이프와 캔버스 커튼만으로 구성된 ‘종이 칸막이 시스템(PPS)’을 고안했다. 별도의 도구나 전문 인력 없이도 단시간에 조립할 수 있는 이 가벼운 구조물은 차가운 체육관 바닥 위에 가족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해주었다. 전 세계의 후원으로 실행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물리적 구획을 넘어, 재난으로 무너진 개인의 일상과 존엄을 복원하는 ‘종이 안식처(Paper Sanctuary)’로서 건축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정직하게 증명했다.
퐁피두 메츠 센터

프랑스 메츠에 위치한 이 현대미술관은 반 시게루의 구조적 정교함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다. 중국 전통 삿갓에서 영감을 얻은 거대한 육각형 목조 격자 지붕은 기둥 하나 없이 광활한 공간을 덮으며 압도적인 해방감을 선사한다. 무려 18km에 달하는 집성재를 엮어 만든 지붕 위로 반투명 막 구조를 씌워, 밤이면 건물 전체가 도시를 밝히는 은은한 등불로 변모한다. 캔틸레버 구조로 뻗어 나온 갤러리는 도시의 랜드마크를 액자처럼 담아내며 건축과 도시의 유기적인 호흡을 완성한다.


지붕 아래 형성된 거대한 아트리움 공간인 ‘포럼’은 외부 광장과 경계 없이 이어지며 시민들의 열린 휴식처가 된다.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핵심은 서로 다른 각도로 엇갈리게 쌓인 세 개의 직사각형 갤러리 튜브다. 각 튜브의 끝단은 거대한 통유리로 마감되어 메츠 대성당이나 기차역 같은 도시의 역사적 랜드마크를 액자처럼 조망하게 한다. 관객은 전시를 관람하는 도중 의도적으로 배치된 창을 통해 도시의 풍경을 마주하며, 건축과 도시 사이의 유기적인 시각적 대화에 참여한다. 반 시게루는 이처럼 난도 높은 공학적 과제를 서정적인 조형미로 풀어내며, 공공 미술관이 가져야 할 미학적 성취와 지역 사회와의 교감을 완벽하게 증명했다.
아스펜 미술관

미국 콜로라도의 산세 속에 자리한 아스펜 미술관은 ‘우븐 우드(Woven Wood)’ 외벽이 자아내는 리듬감이 특징이다. 종이와 수지를 압축한 신소재로 나무를 엮어 만든 외벽은 거친 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내부로 따뜻한 빛을 투과시킨다. 특히 엘리베이터 대신 건물 외벽을 따라 이어지는 ‘그랜드 스테어’를 통해 옥상 테라스로 먼저 안내하는 동선이 백미다. 방문객은 아스펜의 풍경을 한눈에 담은 뒤 아래로 내려오며 전시를 관람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허물려는 그의 의도가 투영된 결과다.
내부로 발을 들이면 천장을 가로지르는 기하학적 문양의 지붕 구조가 단번에 시선을 압도한다. 정교하게 맞물린 삼각형 목재 프레임은 별도의 기둥 없이 광활한 공간을 지탱하며, 그 틈으로 쏟아지는 채광은 마치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듯한 ‘코모레비(木漏れ日)’ 효과를 내부 곳곳에 구현한다. 화이트 큐브의 정형성에서 탈피한 전시실은 외부의 거친 자연과 대비되는 정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곳곳에 배치된 시게루 반 특유의 종이 튜브 구조물들은 재료에 대한 실험 정신과 인도주의적 미학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옥상에서 시작해 아래로 흐르듯 이어지는 이 여정은 건축을 단순한 시설이 아닌 대자연의 일부로 확장하며, 공간이 인간에게 전하는 공공의 위로를 완성한다.
블루 오션 돔
2025 오사카·간사이 엑스포에서 선보인 일본 재단 파빌리온 ‘블루 오션 돔’은 시게루 반의 환경 철학이 집대성된 정점과도 같은 공간이다. 바다의 보호와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한 이 돔은 그가 오랜 시간 연구해온 종이 파이프(Paper Tube)와 목재를 정교하게 맞물린 탄소 중립 구조를 띠고 있다.
거대한 반구형 골조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리듬은 내부로 투과되는 부드러운 채광과 만나, 마치 심해의 고요한 수면 아래에 머무는 듯한 몰입형 경험을 관람객에게 선사한다. 특히 시공 단계부터 폐기물 발생을 원천 차단하고, 전시 종료 후 모든 자재를 다른 건축 요소로 100% 재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순환 경제 모델은 일회성 이벤트로 소모되는 엑스포 건축의 고질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이는 단순한 조형미의 추구를 넘어, 기후 위기 시대에 건축이 지향해야 할 도덕적 책무와 실질적인 기술적 해법을 전 세계에 타전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