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감각의 공간을 짓는 아티스트, 마리우스 트로이
상상이 먼저 도착하는 곳, 서울
AI로 상상의 공간을 짓는 노르웨이 아티스트 Marius Troy. 그가 서울을 처음 찾았다. 그룹전과 솔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물리적 경험으로 확장한다.

노르웨이 오슬로 피오르가 내려다보이는 예술가 마을 오스고르스트란. 뭉크가 사랑했던 이 해안 마을에서 마리우스 트로이(Marius Troy)는 가족과 함께 살며 작업한다. 숲과 바다가 맞닿은 이곳에서 그는 AI를 도구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짓는다. 미드저니(Midjourney)로 생성한 이미지를 수작업으로 편집한 작업은, 미술관에 실재하는 설치 작품을 마주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빛의 질감과 공기의 밀도, 재료의 촉각까지 느껴질 만큼 정교하다.

디자인과 시각 커뮤니케이션을 전공 후 아트 디렉터, 포토그래퍼, 뮤지션으로 20년 넘게 활동해온 마리우스 트로이. 작가에게 AI는 붓이나 카메라와 같은 도구에 가깝다. 그가 일관되게 탐구하는 것은 ‘상상이 현실에 미치는 힘’이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에 대한 피로를 말하며, 자연과 공생하는 거주지와 신경계를 다독이는 빛의 공간, 소리의 결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몰입형 설치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올봄, 그 상상이 서울에 도착했다. 메종 나비가 기획한 그룹 전시 《CONTRASTS》를 통해 그의 작업은 스크린을 벗어나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된다. Nerdy Artist Union(이하 NAU)과 협업한 인터랙티브 설치 〈ALETHEIA〉는 이미지 세계를 실제 경험으로 전환한 결과다. 포인트투파이브세컨드 성수 하우스에서는 프린트 작품 5점이 그 여운을 이어간다. 전시를 위해 처음 한국을 찾은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마리우스 트로이(Marius Troy)
노르웨이 오스고르스트란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AI를 도구로 고유한 미학을 구축하는 아티스트. 20여 년간 아트 디렉터와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축적한 시각을 바탕으로, 기술 너머의 인간적 깊이와 정서적 안식처를 탐구한다.

도구로서의 AI
AI를 창작 도구로 활용해왔다. 지금 시점에서 AI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나?
협업자보다 도구에 가깝다. 미드저니도 하나의 소프트웨어처럼 접근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시각적, 언어적 어휘를 익혀야 한다. 일단 체득하고 나면 빈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드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작업하게 된다. 물론 우연의 요소가 있지만, 나는 늘 특정한 감정이나 분위기를 찾고 있다.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파고든다.


작업의 출발점이 이미지가 아니라 감정이라는 이야기인가?
내 안에 맴도는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에서 시작한다. 나에게 상상력은 순간적인 불꽃이 아니라, 가능성이 서는 자리 같은 것이다. 무언가 실재하려면 먼저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분위기를 공간이나 특정 미감의 이미지로 포착한다. 제작 과정에서는 의식적으로 사고를 멈추려 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본능과 흐름에 따라 결정하기 위해서다. 처음 아이디어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드물지만, 과정에서 마주하는 ‘행복한 우연’에는 늘 열려 있다.

보통의 창작 과정이 궁금하다.
하나의 콘셉트를 완성하기까지 보통 나흘에서 닷새가 걸린다. 계속 탐색하고 쌓아가는 시간이다. 아이디어에서 모든 것을 끌어냈다는 확신이 들고 감정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그때 편집에 들어간다.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단계다. 이 과정 전체에서 판단은 직관에 맡긴다. 옳다고 느껴지는 감각을 따를 뿐이다.
이미지가 선별되면 색감을 조정하고 요소를 가감하며, 이 콘셉트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확인한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지성적으로 들여다본다. 작업을 처음 목격하는 타자가 되는 것이다. 콘셉트가 물리적 공간으로 옮겨지면 작업은 건축적이고 감각적인 성격을 띤다. 그때부터 물성과 빛, 소리, 스케일이 대화에 참여한다.

지중해 연안을 배경으로 텍스타일, 빛 투사, 안개를 활용해 구축한 설치 예술 콘셉트. 자연 지형과 인공적인 빛의 결합을 통해 상상과 실재의 경계를 허문다. © Marius Troy
AI가 “우리를 외부에서 바라본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AI로 작업하며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점이 있다면.
AI는 우리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다만 그 거울이 항상 기대하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학습한 데이터를 알고 있을 뿐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I가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적 감각의 메아리에 가깝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느낌이 우리를 매료시킨다. 결국 AI는 재조합하고 인간은 상상한다. 인간의 창의성은 집단 무의식에서 길어 올리는 깊은 차원의 신비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감각에 달려 있다.
디지털 풍경의 대위법



노스탤지어와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작업은 노스탤지어에서 시작된다. 느꼈던 감정, 가본 장소, 그리워했던 사람, 돌아가고 싶은 어떤 것. 늘 지독할 정도로 향수에 젖어 산다. 예술가로서 축복이자 저주다. 작년 오슬로에서 몰입형 공간 〈HEKA〉를 만든 이후 시선을 ‘원하는 미래’로 돌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고전적인 영원의 철학을 빌려오되 현대인이 즉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예술을 만들고 싶었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에는 강한 거부감이 있다. 그와는 다른 미래를 말하고 싶다. 치유와 조화, 자기 자신과 서로, 그리고 자연에 다시 연결되는 미래다.


〈L’Abri Doux〉 시리즈에서 그 감각이 특히 선명하게 느껴진다. 빛이 성소처럼 부드럽게 공간을 감싸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노르웨이 숲속에 살고 있다. 〈L’Abri Doux〉 시리즈는 매우 춥고 어두운 시기에 탄생했다. 안식처를 간절히 그리워하던 때였다. 문밖의 자연은 거칠고 가혹했기에, 포착하고 싶었던 분위기는 안전함, 온기, 부드러움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관점에서 이 작업들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안온한 감각을 깨워준다. 일종의 ‘시각적 신경계 조절 장치’다. 과도한 자극으로 가득한 디지털 환경에 대한 부드러운 대위법이다.

고전적인 오페라 무대를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시각 언어로 재해석한 시노그래피 콘셉트. 빛과 형태의 변주를 통해 극의 정서를 시각적 언어로 치환한다. © Marius Troy
한편 디올, 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 경험은 현재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글로벌 패션 하우스와 협업은 복잡한 것을 명료하게 증류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훈련은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예술은 더 추상적일 수 있지만, 두 길을 모두 걸어본 덕분에 ‘접근 가능한’ 예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면서도 누구든 초대받은 기분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작업이다.
서울에서 만나는 포털

서울에서 열리는 그룹전 《CONTRASTS》에서는 어떤 작업을 선보이나?
전시는 두 대조적 상태 사이를 흐르는 시적 여정을 다룬다. 보리스 아커, 김준수, NAU 같은 훌륭한 작가들과 함께 진행된다. Erased Studio 가 시노그래피를, 메종 나비가 기획을 맡았다. 서울의 NAU 팀과 협업한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 〈ALETHEIA〉를 선보일 예정이다. ‘알레테이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진실 혹은 드러남을 뜻한다. 이 설치 작품은 일종의 포털(Portal)이다. 관객이 작품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으로 직접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공간이다.

액체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황금의 물성을 의복의 형태로 치환한 작업. 상상된 미감이 현실의 질감과 만났을 때 발생하는 탐미적인 순간을 포착했다. © Marius Troy
또 다른 공간에서 개인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진다. 서울 곳곳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소감이 궁금하다.
성수에서 만날 수 있는 〈That Which Already Exists〉는 ‘금’이라는 소재를 통해 상상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을 다룬다. 여기서 상상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첫 한국 방문이다. 이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직접 경험한다는 사실에 무척 설레고 있다. 관객들이 내 작품을 통해 희망과 연결의 감각, 새롭게 깨어난 감수성을 안고 돌아가길 바란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좇지 말고,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 기여하라. 세상의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라. 기술은 빠르게 진화한다. 그러나 깊이와 주의력, 감수성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CONTRASTS — The Poetics of the In-Between》
기간ㅣ2026년 4월 1일 – 6월 28일
주소ㅣ 메종 나비 팝업 (서울 성동구 금호로 3길 14)
주최·주관ㅣ메종 나비
공동 기획 및 공간 연출ㅣErased Studio
《CONTRASTS — Seongsu Extension》
기간ㅣ2026년 4월 1일 – 6월 28일
주소ㅣ포인트투파이브세컨드 성수 하우스 2층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14길 20)
웹사이트ㅣ 홈페이지,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