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과 현대 미술의 만남,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의 샤넬 커미션 프로젝트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의 두 번째 샤넬 커미션 프로젝트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의 두 번째 샤넬 커미션 프로젝트는 리나 라펠리테의 <We Make Years Out of Hours>다. 40만 개의 목재 큐브를 활용한 변화무쌍한 조각 설치와 집단적 목재 조작 소리, 퍼포머들의 목소리가 겹치는 사운드를 통해, 영속성을 거부하고 관객과 함께 공동체의 기억을 쌓아가는 시간의 구조를 실험한다.

샤넬과 현대 미술의 만남,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의 샤넬 커미션 프로젝트

베를린 중앙역 바로 옆, 과거 철도역으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 건물 ‘함부르거 반호프(Hamburger Bahnhof)’는 오늘날 독일 현대미술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다. 19세기 산업 건축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공간은 높은 천장과 철제 구조, 길게 이어지는 축선 덕분에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라기보다, 작품이 공간 자체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만드는 거대한 무대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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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은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은 이를 기념하는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로 리투아니아 출신 작곡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리나 라펠리테(Lina Lapelytė)를 초대했다. 샤넬 커미션(CHANEL Commission) 두 번째 프로젝트로 공개된 <We Make Years Out of Hours>는 조각과 사운드, 퍼포먼스, 그리고 관객 참여를 결합한 대규모 설치 작업이다. 제목을 직역하면 ‘우리는 몇 시간으로 몇 년을 만든다’. 시간의 축적, 공동의 노동, 그리고 함께 존재하는 감각이 어떻게 기억과 공동체를 형성하는지를 묻는 작업이다.

현대 미술을 마주한 패션 하우스, 샤넬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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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a Lapelytė. We Make Years Out of Hours, Ausstellungsansicht Hamburger Bahnhof – Nationalgalerie der Gegenwart, Berlin, 2026 ©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샤넬은 최근 패션 하우스를 넘어 동시대 예술 생산을 지원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영역을 확장해 왔으며, 그 중심에는 장기적인 예술 후원 프로젝트인 샤넬 컬처 펀드(CHANEL Culture Fund)가 있다.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과의 협업 역시 단순한 브랜드 스폰서십이 아니라, 미술관의 상징적 공간 안에서 작가들이 기존 제도적 전시 형식을 넘어서는 대규모 실험을 시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커미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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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a Lapelytė. We Make Years Out of Hours, Ausstellungsansicht Hamburger Bahnhof – Nationalgalerie der Gegenwart, Berlin, 2026 ©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약 2,500㎡ 규모의 역사적 중앙 홀을 하나의 실험실처럼 활용하는 이 프로젝트는 매년 한 명의 국제 작가를 선정해 공간 특화형 신작을 제작하도록 한다. 2025년 체코 출신 작가 클라라 호스네들로바(Klára Hosnedlová)에 이어, 올해는 리나 라펠리테가 두 번째 커미션 작가로 선정됐다. 이번 작업은 샤넬 커미션이 지향하는 ‘예술과 공공성, 그리고 동시대 담론의 확장’이라는 방향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재료, 40만 개의 목재 큐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을 맨 먼저 압도하는 것은 바닥을 가득 메운 40만 개의 목재 큐브다. 각각 10×10×10cm 크기의 블록들은 전나무와 소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처음 마주했을 때는 하나의 거대한 미니멀 조각 설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 오브제들이 단순한 조형 요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고 재구성되는 살아 있는 재료임을 깨닫게 된다. 퍼포머들이 블록을 들어 올리고, 쌓고, 옮기고, 다시 해체하는 순간 공간은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화한다. 조금 전까지 수직으로 솟아 있던 구조물은 어느새 낮은 언덕처럼 펼쳐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형태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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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이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은 어떤 구조도 영구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조각 작품이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리나 라펠리테의 작업은 오히려 완성을 거부한다. 여기서 형태는 늘 잠정적이며, 누군가의 손에 의해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다. 하나의 구조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다른 구조가 무너져야 하고, 어떤 조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지속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작가는 이 단순한 행위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를 은유한다.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누가 그것을 유지하는가. 그리고 변화가 일어날 때, 그 무게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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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더 흥미로운 것은 관객 역시 이 구조 안으로 자연스럽게 초대된다는 점이다. 퍼포머들은 관객에게 직접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도, 명령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 큐브 하나를 집어 들고 구조에 참여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감상자가 아니라 작품 일부가 된다. 실제로 전시장에서는 아이들이 맨 먼저 반응한다. 블록을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고, 때로는 무너뜨리기도 한다. 어른들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도 아이들의 움직임을 따라 점차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참여는 강요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전염된다. 이 느슨한 참여 구조는 오늘날 참여형 예술이 종종 이벤트성 체험으로 소비되는 방식과는 분명히 다르다.

조각이 아닌 ‘소리’로 구축된 공간

리나 라펠리테의 작업이 단순한 설치 미술을 넘어서는 지점은 사운드다. 공간 곳곳에서는 퍼포머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처음에는 멀리서 들려오는 허밍처럼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치며 하나의 집단적 호흡으로 확장된다. 높은 천장과 철제 구조가 만들어내는 함부르거 반호프 특유의 울림은 이 사운드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노래는 공연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 안을 떠다니며,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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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이번 전시에 사용된 텍스트는 여러 시인과 작가들의 글에서 발췌한 구절들로 구성됐다. 사랑, 상실, 이주, 기억, 공동체에 관한 짧은 문장들이 반복적으로 불리고, 이는 마치 하나의 집단적 기도처럼 공간 안을 순환한다. 특히 ‘Ocean Vuong’, ‘Etel Adnan’, ‘Mahmoud Darwish’ 등의 언어는 서로 다른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면서도,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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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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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전시 카탈로그에서 샘 바르두일(Sam Bardaouil) 관장은 리나 라펠리테의 작업을 “완벽함을 포기하고, 집단적이고 불완전한 목소리를 선택하는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작가는 전문 성악가처럼 정제된 사운드를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때때로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호흡, 예상치 못한 리듬의 어긋남 속에서 더 강한 진실성을 발견한다. 그녀에게 목소리는 단순히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방식 자체다. 듣는다는 행위 역시 수동적인 감상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태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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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전시장 안에서 흥미로운 순간은 구조를 만드는 손의 움직임과 노래의 리듬이 어느 순간 하나로 맞물릴 때다. 큐브가 놓이는 소리,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이동하는 발걸음, 그리고 퍼포머들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겹치며 공간 전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작동한다. 그 순간 조각은 더 이상 물질적 오브제가 아니라, 시간과 리듬으로 구성된 살아 있는 구조가 된다.

리나 라펠리테가 기념비를 다루는 방식

리나 라펠리테는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오페라 <Sun & Sea>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해변이라는 일상적 풍경 속에서 기후 위기와 현대사회의 무감각을 다뤘다. 이번 함부르거 반호프 작업 역시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직접 공간 안에 머물고, 움직이고, 타인의 리듬을 감각하도록 만든다. 비판은 설명되지 않고, 경험을 통해 서서히 축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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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이 작업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기념비’를 다루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기념비는 오래 남기 위해 세워진다. 돌이나 금속처럼 영구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시간의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전시 <We Make Years Out of Hours>는 완전히 반대 방향을 택한다. 여기서 구조물은 계속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작품은 영속성을 거부한다. 전시가 끝나면 공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바로 그 점에서 새로운 기념비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남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함께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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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na Lapelytė. VG Bild-Kunst, Bonn 2026. Foto: Staatliche Museen zu Berlin, Nationalgalerie / art/beats, Florian Mag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와 끊임없는 생산성 속에서 살아간다. 효율과 결과 중심의 시스템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는 종종 비생산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리나 라펠리테는 그 시간을 가장 중요한 예술적 재료로 바꾼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리듬 안에서, 같은 구조를 만들고 무너뜨리는 몇 시간이 결국 몇 년의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이 이 전시 제목이 말하는 의미일 것이다. 전시장을 떠난 뒤 머릿속에 남는 것은 거대한 조형물의 이미지가 아니다. 대신 누군가와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손을 움직였던 감각, 나무 블록이 부딪히던 소리, 그리고 높은 홀 안을 천천히 떠다니던 목소리가 오래 남는다. 리나 라펠리테는 이번 작업을 통해 동시대 예술이 더 이상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보는 시간의 구조가 될 수 있음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증명한다.

리나 라펠리테 개인전

주소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Hamburger Bahnhof – Nationalgalerie der Gegenwart)
기간 2026년 5월 1일 – 2027년 1월 10일
기획 Sam Bardaouil, Till Fellrath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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