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로 변신한 독일 백화점, 카데베(KaDeWe)의 쇼윈도
KaDeWe X 베를린 갤러리 위켄드, <DISPLAY, PAUSE, REPEAT>
매년 5월 베를린 아트씬을 뜨겁게 달구는 갤러리 위켄드가 올해도 열렸다. 3일 동안 50개 갤러리가 80여 명의 작가 작품을 선보이는 이 행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갤러리가 아니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120년 역사의 백화점 카데베(KaDeWe)의 쇼윈도였다. 카데베는 갤러리 위켄드 기간에 맞춰 열 개의 쇼윈도를 전시 공간으로 전환했다. 상품 대신 현대미술 설치 작품이 들어선 이 쇼윈도는...

매년 5월 베를린 아트씬을 뜨겁게 달구는 갤러리 위켄드가 올해도 열렸다. 3일 동안 50개 갤러리가 80여 명의 작가 작품을 선보이는 이 행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곳은 갤러리가 아니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120년 역사의 백화점 카데베(KaDeWe)의 쇼윈도였다. 카데베는 갤러리 위켄드 기간에 맞춰 열 개의 쇼윈도를 전시 공간으로 전환했다. 상품 대신 현대미술 설치 작품이 들어선 이 쇼윈도는 24시간 내내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기획은 크리에이티브 트리오 TADAN의 공동창립자이자 베를린 출신 큐레이터 세바스티안 호프만(Sebastian Hoffmann)이 맡았다.

쇼윈도는 오직 바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무대나 디오라마처럼, 3차원의 공간이면서 마치 그림처럼 한 면만 보이는 공간이다
세바스티안 호프만
기획의 출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이 어떻게 달라 보일 수 있을까’란 질문이었다. 제목 ‘DISPLAY, PAUSE, REPEAT’는 그 시간적 구조를 가리키며 답을 담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퍼포먼스가 아니지만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서서히 펼쳐지며, 움직임은 작품 안이 아니라 주변에서 생겨난다.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 유리에 맺히는 빛과 반사가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 속에서 작품은 매 순간 다르게 보인다.
열 개의 쇼윈도, 열 명의 작가
첫 번째 쇼윈도의 주인공은 하네 다르보벤(Hanne Darboven)이다. 독일 개념미술의 거장으로, 숫자와 기호, 텍스트를 통해 시간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일생의 과제로 삼았다. 이번에 출품된 ‘Leben, leben/Life, living'(1998)은 삶과 시간의 흐름을 그녀 특유의 시스템으로 담아낸 작업으로, 쇼윈도라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전시 구조와 맞물리며 시간과 디스플레이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기억과 흔적을 탐구하는 작가 이안 바엘더(Ian Waelder)는 신작 ‘Bystander (Clockwise)'(2026)를 선보였다. 신문지나 판지 같은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개인의 역사와 집단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다루는 그는, 쇼윈도 앞을 오가는 행인들의 시선과 움직임을 포착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오른쪽) Kayode Ojo, Up to here, 2021 Courtesy of Sweetwater ⓒ Ludger Paffrath
베를린 출신의 화가 소피 라인홀트(Sophie Reinhold)도 참여했다. 황마 위에 대리석 분말을 겹겹이 쌓고 갈아내는 독특한 기법으로 빛을 반사하는 회화를 만드는 그녀는,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 그리스 신화의 도상과 동독 시절의 기억, 정치적 상징들을 함께 품는다. 이번에 선보인 ‘Bewusste Vernachlässigung ist auch keine Lösung'(2019~2026)과 ‘Water of Life'(2019)는 그 이중적 표면이 유리창을 통해 또 한 겹의 반사와 만나는 작업이다. 뉴욕 기반의 카요데 오조(Kayode Ojo)는 소비 문화의 오브제들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작가다. 패션, 음악, 기술 분야에서 수집한 파운드 오브제를 유리와 거울 위에 위태롭게 쌓아 올리는 그의 ‘Up to here'(2021)는 야간에 특히 강렬하게 빛나,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록밴드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프론트맨이자 시각예술가인 데이비드 번(David Byrne)은 음악, 미술, 퍼포먼스, 디자인을 넘나들며 일상의 사물을 낯선 맥락에 놓아 다시 읽히게 한다. 그의 작품 ‘Fake Apps'(2011)은 스마트폰 앱 아이콘의 시각 언어를 차용한 드로잉 작업으로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을 형성하는지를 묻는다.


(오른쪽) Claudia Mann, Headrests, 2019–2022 Courtesy of PSM ⓒ Ludger Paffrath
뉴질랜드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사이먼 데니(Simon Denny)는 디지털 기술과 정보 권력의 구조를 탐구하는 작가다. 이번에 선보인 ‘Digital Globe ESRI Earth observation WorldView-4 satellite Extractor pop display'(2019)는 위성 관측 기술과 데이터 추출 시스템의 시각적 언어를 팝 디스플레이 형식으로 전환한 작업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정보 시스템의 이면을 드러낸다. 뒤셀도르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각가 클라우디아 만(Claudia Mann)은 신체와 땅, 사회적 관계의 잠재성을 개념적이고 과정 지향적인 방식으로 탐구한다. ‘Headrests'(2019~2022)는 머리를 받치는 형태에서 비롯된 조각으로, 신체와 사물, 휴식과 긴장 사이의 관계를 묻는다.



Leila Hekmat, Gloriette Cavallo a Dondallo, 2024 Courtesy of Galerie Isabella Bortolozzi ⓒ Ludger Paffrath
Ken Lum, I can’t believe, I am in Paris, 2008 Courtesy of Galerie Nagel Draxler ⓒ Ludger Paffrath
Harry Nuriev, Hinter Glas, 2026 Courtesy of Dittrich & Schlechtriem ⓒ Ludger Paffrath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레일라 헥마트(Leila Hekmat)의 작업은 언제나 과잉과 유머로 가득하다. 코메디아 델라르테, 보드빌, 1970년대 텔레비전 이미지를 참조해 권력과 욕망, 사회적 역할을 해체하는 그녀는 ‘Gloriette Cavallo a Dondallo'(2024)에서 말과 기수, 회전목마의 이미지를 통해 지배와 순환의 구조를 탐구한다. 밴쿠버 출신의 켄 럼(Ken Lum)은 광고판과 간판의 시각 언어를 빌려 정체성과 세계화의 모순을 드러내온 작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에 참여한 바 있는 그는 ‘I can’t believe, I am in Paris'(2008)를 통해 타지에서 느끼는 낯섦과 동경, 그 감정의 아이러니를 간결한 문장으로 포착했다. 마지막 쇼윈도는 발렌시아가, 나이키 등과의 파격적인 협업으로 주목받은 크로스비 스튜디오스(Crosby Studios) 창립자 해리 누리예프(Harry Nuriev)의 신작으로 마무리됐다. 러시아 출신으로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하는 그는 변화와 변형 자체를 주제로 삼는 ‘트랜스포르미즘’ 철학으로 알려져 있다. ‘Hinter Glas'(2026)는 유리 너머에서 바라보는 행위 자체를 주제로 삼은 작업으로, 쇼윈도라는 매체의 본질을 정면으로 다룬다.
외부에서 내부까지, 작품이 된 백화점 공간
전시는 건물 내부로도 확장됐다. 전시 기간 내내 매 정각, 카데베 전체에 하네 다르보벤 ‘Opus 25A: Ludwig van Beethoven'(1988) 일부가 울려 퍼졌다. 숫자를 음표로 변환하는 그녀 특유의 수학적 음악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오르간 작품으로, 쇼윈도의 다르보벤 작업과 호응하며 건물 전체를 하나의 사운드 공간으로 만들었다. 2층에는 하이너 프란젠(Heiner Franzen)의 신작 ‘STEP+LEAP'(2026)이 자리했다. 에스컬레이터 상단의 네 개 스크린에서 걸음과 도약 동작을 담은 영상이 반복 재생되며, 방문객들은 올라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새 작품의 일부가 됐다.

쇼윈도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예술가들이 탐해온 매체였다. 1930년대 살바도르 달리가 뉴욕 본윗 텔러(Bonwit Teller)의 쇼윈도를 예술 실험의 장으로 삼은 이래, 앤디 워홀과 로버트 라우션버그가 그 형식을 이어받았고, 1970년대 말 린 허시먼 리슨(Lynn Hershman Leeson)은 처음으로 쇼윈도를 상품 없이 예술로만 채웠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카데베와 갤러리 위켄의 협업은 그 역사를 소환한다.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 그것이 이 전시가 말하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