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의 배반인가, 무결점의 미학인가, 페라리 루체
페라리 최초의 순수 전기차
80년 순혈주의를 깨고 조니 아이브, 마크 뉴슨과 협업한 페라리 최초의 전기차 ‘루체’가 공개됐다. 하지만 파격적인 4도어 구조와 미니멀리즘 디자인에 시장은 주가 폭락으로 냉소했다. 전통 파괴라는 거센 비판과 혁신적 선점이라는 기대 사이, 위태로운 가치 증명이 시작됐다.

페라리(Ferrari)가 최초의 순수 전기차 ‘루체(Luce)’를 공개했다. 브랜드 역사상 첫 전동화 모델이다. 하지만 하이엔드 브랜드의 새 시대를 열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공개 다음 날 밀라노 증시에서 페라리 주가는 8.1%가 폭락했고, 뉴욕 증시에서도 5% 이상 떨어졌다. 시장은 페라리의 새로운 디자인과 방향성에 즉각 의문을 던졌다.
페라리가 전기차 시장에 뛰어든 배경
페라리. 그 이름은 자동차를 넘어 하나의 욕망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링 기술과 모터스포츠 역사를 바탕으로 80년 가까이 최고급 슈퍼카 시장을 호령했다. 그런 이들이 전기차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속내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엄격해지는 글로벌 환경 규제다. 유럽을 비롯한 주요국의 탄소 배출 기준은 내연기관의 생존을 압박한다. 최근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으로 불거진 고유가와 에너지 안보 위기도 전동화 전환을 재촉하는 배경이다.

하지만 진짜 본질은 시장의 공백과 주도권에 있다. 현재 전기차 시장은 테슬라나 BYD 같은 대중적인 보급형 브랜드 중심으로 흘러간다. 초고가 하이엔드 전기 스포츠카 영역은 사실상 비어 있다. 페라리는 이 빈틈을 노렸다. 새로운 독점적 세그먼트를 개척하겠다는 구상이다. 대중 브랜드의 전동화가 효율성에 집중할 때, 페라리는 순수 전기의 힘으로 압도적인 고성능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전동화 시대가 와도 최고급 슈퍼카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선제적 대응이다. 핵심은 기존 라인업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선택지를 추가하는 데 있다. 페라리는 전통적인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모델을 그대로 유지한다. 여기에 순수 전기차라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나란히 얹는 방식이다. 아날로그 엔진 감성을 원하는 충성 고객층인 ‘페라리스티(Ferraristi)’를 잃지 않으면서, 하이엔드 전기차라는 새로운 잠재적 수요까지 모두 선점하겠다는 계산이다.
순혈주의를 타파한 디자인
“우리는 기업이 과감하게 도전할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기술의 과제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리더십을 증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CEO의 말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디자인이었다. 오랫동안 페라리의 디자인을 전담해 온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Pininfarina)가 아닌, ‘러브프롬(LoveFrom)’에게 루체의 디자인 전권을 맡겼다. 여전히 애플의 디자인 아이콘으로 남아 있는 조니 아이브 와 또 다른 전설 마크 뉴슨 이 주도한 이 모델은 공개 전부터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가장 파격적인 변화는 차체 구조에 있다. 페라리의 오랜 상징이던 낮고 좁은 2인승 구조에서 벗어나 뒷좌석에 3인석을 더한 4도어 5인승 레이아웃을 채택했다. 페라리 스포츠카의 상징인 육중한 미드십 엔진과 후방 트랜스액슬 구조는 전동화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이들은 거대한 구동계가 사라진 빈 공간을 비워두는 대신, 아키텍처의 전면적인 재배치를 감행했다. 네 바퀴에 각각 독립적인 전기 모터를 하나씩 탑재한 ‘4 모터 시스템’을 도입해 구동 부품을 차량의 양 극단으로 완전히 밀어냈다. 이로써 차체 중앙 바닥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구동축 터널을 지워냈다. 내연기관의 흔적이 사라진 평평한 바닥과 뒷좌석 아래 공간에는 배터리를 납작하게 매립해 차체와 하나로 묶어내 일체형 구조를 완성했다. 아키텍처의 변화는 달리기 성능만을 쫓던 슈퍼카에서 여유로운 공간을 누릴 수 있는 고성능 모빌리티로 자동차의 목적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달라진 목적에 따라 외관 디자인도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창문과 루프를 아우르는 상부의 유리 구조물인 ‘글라스 하우스(Glass House)’가 대표적이다. 매끄러운 조개껍데기 같은 거대한 유리 돔은 러브프롬이 일관되게 고수해 온 ‘단순화(Simplification)’ 철학을 잘 보여준다.


전면부 디자인 역시 이 단순함의 철학을 충실히 따른다. 앞면을 길게 가로지르는 얇은 수평형 헤드램프는 평소 불이 꺼졌을 때 차체 표면 뒤로 완벽히 숨어 사라진다. 오직 작동하는 순간에만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외관의 이음새를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디자이너의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루체의 흠집 없는 외관을 완성한 비결은 과거 조니 아이브가 스마트폰 몸체를 설계할 때 선보인 ‘단일 구조(Integrated System)’ 공법에 있다. 수많은 금속 판을 조립하고 용접하는 전통 방식을 버리고, 차체 후면의 핵심 뼈대를 페라리 역사상 가장 큰 일체형 알루미늄 주조 부품으로 한 번에 찍어낸 것이다. 덕분에 조립 이음새를 완벽히 지워내는 동시에 기존 4도어 모델 대비 비틀림 강성은 35% 이상 높였고, 전체 무게는 줄여 ‘넓은 실내 공간’과 ‘슈퍼카의 주행 성능’이라는 모순된 과제를 영리하게 해결했다.
디지털 스크린에 심은 손맛
한편, 루체의 실내 디자인은 화려한 첨단 기술을 과시하는 여타의 전기차들과 궤를 달리한다. 러브프롬은 물리적 촉각과 디지털 정보가 단절될 때 인간이 느끼는 불쾌감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날로그의 직관성과 디지털의 확장성을 하나로 묶어내는 접근 방식을 택했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물리 버튼의 존재감이다. 최근 대다수의 전기차가 모든 기능을 거대한 터치스크린 속으로 집어넣는 트렌드와 달리, 루체는 기계식 버튼과 스위치, 다이얼을 고집했다. 단순히 과거를 향한 향수나 아날로그로의 회귀가 아니다. 정밀하게 설계된 기계식 제어 장치를 전용 디지털 화면과 결합한 조니 아이브식 ‘디지털 아날로그’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운전자가 탑승 시 맨 먼저 쥐게 되는 스티어링 휠은 그 대표적 예시다. 알루미늄 블록을 깎아내고 손수 마감한 아날로그 프레임 위에 가죽 손잡이를 더해 완성했다. 운전대 위에는 손끝 감각만으로 다룰 수 있는 기계식 스위치 모듈이 달려있다. 버튼을 조작하면 계기판과 중앙 화면의 디지털 정보가 운전자의 눈높이에 맞춰 실시간으로 연동된다. 특히 계기판은 화면 두 장을 위아래로 겹치고 위쪽 화면에 구멍을 뚫은 독특한 다층 구조를 채택해 눈길을 끈다. 평평한 디스플레이 위에 실제 아날로그 바늘을 얹었는데, 구멍 난 화면 사이로 아래쪽 디스플레이가 비치며 입체적인 깊이감을 만든다.

여기에 운전석을 향해 손으로 직접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한 중앙 패널도 아날로그식 조작의 즐거움을 더한다. 손맛을 강조한 기어 시프트 역시 과거 페라리 수동변속기 고유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레버를 움직일 때마다 찰칵 걸리는 확실한 조작감이 일품이라는 평이다. 그 주변부로는 단단한 코닝 고릴라 글라스를 비롯해 유리와 알루미늄, 가죽 등 만졌을 때 소재 본연의 질감이 느껴지는 마감을 택한 점도 돋보인다.
설명이 필요한 디자인
‘설명이 필요한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 업계의 이 해묵은 격언을 루체의 파격적인 모습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이 따라붙어야만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지는 디자인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무언가 결핍되었다는 방증일지 모른다. 루체가 선보인 시도와 조니 아이브의 철학은 분명 흥미롭지만, 시장과 대중을 이해시키기에는 아직 많은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그 탓인지 페라리가 쌓아 올린 80년의 브랜드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갈수록 거세다. 루카 디 몬테제몰로 전 페라리 회장은 루체가 페라리의 신화를 파괴할 위험이 있다며, 차라리 전면의 ‘프랜싱 호스(말 모양 엠블럼)’를 떼어내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일각에는 루체의 행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이탈리아 투자은행 인터몬테(Intermonte)는 루체 출시 직후 페라리의 목표주가를 상향 조정하며 강한 신뢰를 보냈다. 포르셰나 람보르기니 등 경쟁 브랜드들이 전기차 전환을 주저하며 발을 빼는 사이, 페라리가 하이엔드 EV 시장을 사실상 선점해 독점적 구도를 완성했다는 계산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은 “초기의 거센 반발은 하이엔드 브랜드가 혁신을 감행할 때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라고도 분석했다. 전통적인 페라리스티는 등 돌릴지 언정,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열광하는 신흥 부호들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결국 핵심은 가치 증명에 있다. 루체의 가격은 한화로 약 10억이다. 저가 공세로 시장을 장악한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과 비교하면 수십 배에 달하는 격차다. 과거 내연기관 자동차 시장에서는 강력한 엔진 기술력과 고유의 배기음을 바탕으로 초고가 프리미엄 시장이 단단하게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배터리와 모터가 평평하게 깔린 전기차 플랫폼 위에서도 페라리가 그들만의 독보적인 프리미엄 가치를 계속해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통과 혁신, 그리고 자본의 냉정한 저울질 사이에서 페라리가 전기차 시대의 새로운 신화를 써 내려갈 수 있을지, 그 위태롭고 과감한 질주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