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성난 사람들〉시리즈 속 그 공간, 누가 디자인했을까?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부터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까지
에미상 등 미국 주요 시상식을 석권한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이 시즌 2로 돌아왔다. 이번 시즌은 사계절로 인물의 내면을 치환한 감각적인 공간 디자인으로 몰입도를 높였다. 영화 〈유전〉, 〈패스트 라이브즈〉에 이어 이 매혹적인 세계를 완성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그레이스 윤의 독창적인 디자인 철학을 만난다.

지난해 에미상 8관왕을 비롯해 골든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등 미국 주요 시상식을 석권하며 기염을 토했던 〈성난 사람들(BEEF)〉이 새로운 시즌으로 돌아왔다. 지난 4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시즌 2는 전작의 명성을 잇는 강렬한 흡인력으로 다시 한번 글로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이번 시즌에서 특히 평단과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요소는 단연 ‘공간’이다. 인물들의 뒤틀린 욕망과 팽팽한 서사의 긴장감이 기묘하면서도 감각적인 비주얼을 통해 시각적으로 완벽히 구현해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이 매혹적인 세계를 완성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작에 이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윤이 맡았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유전〉의 기괴하고 압도적인 공간감부터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보여준 절제된 인연의 시각화, 그리고 <성난 사람들> 시즌 2에서 사계절로 치환해 낸 인물들의 내면세계까지.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공간들은 단순히 서사의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인물의 감정과 영혼을 투영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함께 살아 숨 쉰다. 예술적 야심과 제약된 현장 사이에서 언제나 집요하게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그레이스 윤. 텍스트 너머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축해 나가는 디자인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Interview
그레이스 윤 프로덕션 디자이너

영화와 시각 예술의 접점인 프로덕션 디자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건축이나 순수 미술이 아닌, 서사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뉴욕의 파슨스(Parsons) 재학 시절 디지털 영화 제작을 탐구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이 매체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미술, 디자인, 철학, 심리학 등 내가 관심 두던 모든 분야를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 형식(time-based form)’ 안에서 전부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유전〉(2018), 〈라미〉(2022), 〈패스트 라이브즈〉(2023) 등 주로 A24 제작사와 협업하며 커리어를 쌓아왔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인만의 디자인 철학을 확립하게 된 결정적인 커리어 포인트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실 커리어 패스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세워본 적은 없다. 매 순간 나를 자극하는 기회들을 좇았을 뿐이다. 선택의 기준은 늘 개인적인 표현의 욕구와 탐구심이었다. 신인 디자이너 시절에는 주어지는 환경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고 대안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해준 프로젝트들과 인연이 닿았다는 것 자체가 내겐 과분한 행운이다.
전작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한국과 뉴욕이라는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절제된 디자인으로 표현해 찬사를 받았다. ‘인연’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공간 안에 녹여내기 위해 가장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
셀린 송 감독과 나, 그리고 샤비어 커슈너(Shabier Kirchner) 촬영 감독은 시간의 흐름과 시간의 붕괴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태양의 위치나 물 같은 자연적 요소를 활용해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노라(그레타 리 역)와 해성(유태오 역)이 지구 반대편에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얼마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고심했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노트북으로 대화를 나누는 스카이프(Skype) 통화 장면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뉴욕과 서울이라는 각자의 방은 지리적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시각적으로는 서로를 투영하는 듯한 대칭을 이루어야 했다.




의도적인 촬영과 편집을 통해 두 사람의 책상은 모두 외부를 향한 창문을 바라보게 배치했고, 노트북 화면 역시 서로를 향한 또 하나의 ‘창’이 되도록 연출했다. 한 공간에서 해가 저물어갈 때, 다른 공간에서는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한편, 〈성난 사람들〉 시즌 2에서는 네 가지 공간을 사계절에 빗대어 설계했다. 특히 극 중 린지와 조쉬의 ‘가을(퇴락)’과 박 의장의 ‘겨울(냉소)’처럼 인물의 파멸이나 권위를 계절감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준 구체적인 사물이나 텍스트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계절적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정말 수많은 레퍼런스를 수집했다. 하지만 가장 구체적인 영감을 준 것은 역시 시나리오였다. 나는 인물들이 각자의 파트너와 맺고 있는 관계의 역학 관계에 주목했다.



문득 칼 융(Carl Jung)의 ‘그림자 자아(shadow self)’가 어떻게 촉발되고 타인에게 투영되는지에 관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품 속 커플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공간 안에서 이러한 심리적 상태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발현해 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내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시즌 1에서도 두 주인공의 극명한 대비를 공간으로 보여줬다. 이번 시즌 2에서는 시즌 1과 비교해 어떤 점에 가장 큰 차별점을 두고자 했는지? 특히 이성진 감독으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요구를 받았는지도 궁금하다.
이번 시즌에서 이성진 감독과 내가 가장 집중한 지점은 ‘캘리포니아 엘리트’와 ‘서울 엘리트’ 세계가 지닌 고유한 특성을 명확히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두 세계 사이에는 세대와 계층, 문화는 물론 미학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깊은 격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작업 내내 “박 의장에게, 린지에게, 그리고 애슐리에게 성공과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그에 대한 각기 다른 답을 공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예술적 야심과 예산, 일정, 장소 제약 등의 제작 환경 사이에서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 작업 중 난관에 부딪혔을 때, 이를 돌파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면?
원치 않는 예외 상황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차분하고 신속한 판단이 이를 극복하고 회복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을 준다는 것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협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다. 해결책이라는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실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장애물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거치면서 함께 작업하는 것이 가진 마법 같은 힘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디자인적 영감을 얻기 위해 영화 외에 즐겨 찾는 분야가 있나? 이번 시즌 2에서 ‘삼사라(윤회)의 원’을 시각화한 것처럼, 평소 철학이나 역사, 혹은 일상적인 관찰이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듣고 싶다.
평소 공상을 하거나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고, 주변 사물을 가만히 관찰하곤 한다. 페인트의 갈라진 틈새, 말라가는 튤립, 죽어가는 벌, 혹은 글자의 세리프(serif)처럼 하나의 작은 디테일에 천천히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아이디어가 피어난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끌리는 대상을 파고들다 보면, 또 다른 흥미로운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생각이 고여 있거나 불안함이 엄습할 때는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몸을 움직인다. 영감을 얻는 데는 숙면도 좋은 방법이다. 가끔 잠을 청하지 않았을 때 몽롱한 환각 속에서 찰나의 영상이 스치기도 하지만,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취할 가치는 드물다.
독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매일 아침 글을 쓰고 낙서를 하며, 아직 정제되지 않은 감정적 감각들을 끄집어내 정리하곤 한다. 이 과정이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일종의 명확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이나 나에게는 온전한 고독의 시간도 필수적이다. 다른 장르의 예술을 경험하며 인간의 독창성과 기술에 감탄하기도 하고,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교감하거나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들으며 함께 역할놀이에 몰입하기도 한다. 철학 서적은 아쉽게도 한동안 읽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에 접했던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 존 듀이의 『경험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키케로의 『수사 고안론』만큼은 여전히 깊은 잔상을 남기고 있다.
인공지능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프로덕션 디자인에서 인공지능 활용은 어느 정도의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나?
이미지에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전달하려는 핵심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등의 단순 작업을 위한 도구로 AI를 활용해 왔다. 이러한 편집 보조 방식에서는 꽤 효과적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콘셉트를 생성하는 단계에서는 결코 AI를 사용하지 않는다. AI가 출력한 결과물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감정적인 차원에서 울림을 주는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 콘셉트 아티스트와 마주 보며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 같은 협업이 훨씬 더 깊은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 및 인물의 삶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데이터를 분류하고 정보를 정리하는 영역에서 AI의 도움을 받는 것은 유용할지 몰라도, 그것이 예술가의 고유한 창의성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고 본다.


‘좋은 프로덕션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프로덕션 디자인은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의 가장 능동적인 구성 요소다. 내가 디자인한 물리적 환경이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환기할 수 있다면, 그 디자인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대사로 뱉어내는 언어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을 때, 혹은 관객이 기대했던 것 너머의 무언가를 소통해 낼 수 있을 때 프로덕션 디자인은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들을 반추해 보면, 때로 그 안의 디자인은 지극히 미시적이어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투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가 구축한 세계 전체의 공기와 분위기, 그리고 그 작품이 품은 정신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잔상처럼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문다. 나는 이처럼 스크린 너머로 스며들어 영원히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디자인’의 본질이라 믿는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계속 일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하는 호기심, 어떤 경험을 어떻게 시각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 그리고 감독의 비전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이를 명확히 구현해 내고 싶다는 열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 때문이다. 공간을 다루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내가 세상을 향해 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선택한 매체다. 실제로 이를 현장에서 실행하고 증명해 내는 과정은 매번 지난하고 까다로운 도전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인내하며 끝까지 버텨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어 스스로 무척 행운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 아름다운 세계가 나를 기꺼이 계속 반겨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