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읽는 네 개의 디자인 키워드, iF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 2026
iF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 해부하기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 디자인 어워드'는 출품작 데이터와 리서치를 바탕으로 매년 ‘iF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를 발행한다. 이 미래 연구 보고서는 주요 사회적 전환을 분석하고, 변화가 디자이너에게 주는 새로운 가능성을 살핀다.

레드닷, IDEA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히는 iF 디자인 어워드는 올해 70여 개국에서 만 건이 넘는 출품작을 받았다. ‘iF 디자인 트렌드 리포트(iF Design Trend Report)’는 어워드 심사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와 별도의 리서치를 더해 매년 내놓는 미래 연구 보고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주요 전환을 분석하고, 그 변화가 디자이너에게 어떤 가능성을 만들어내는지 살핀다.

리포트는 프랑크푸르트에 기반을 둔 미래연구 싱크탱크 ‘더 퓨처 프로젝트(The Future:Project)’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iF 디자인 어워드와는 올해로 다섯 번째 협업이며,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와 연구기관을 인터뷰해 통계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역적 맥락까지 함께 담아 총 309쪽 분량으로 구성했다.

올해 리포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가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관점보다, 서로 반대되는 흐름이 동시에 나타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 시점을 둔다. 하나의 트렌드가 강해질수록 그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자라난다는 논리다. 사회 변화는 이런 몇 개의 근본적인 전환에서 비롯되고, 각 전환은 트렌드와 역트렌드가 부딪히고 종합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리포트는 이 원리를 따라 네 개의 트렌드 쌍을 골랐다. 서로 반대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은 앞으로 디자인이 붙들고 있어야 할 균형의 좌표들이다. 각 트렌드가 등장한 배경과 그것이 어떤 변화와 디자인적 가능성을 제시하는지 살펴보자.
AI 시대에 바깥을 모색하기, 리커플링 디자인
AI가 거의 모든 디자인 프로세스에 침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부터 이미지를 만들고 레이아웃을 짜는 단계까지 AI를 거치지 않는 구간이 드물다. 문제는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에 있다. 알고리즘은 과거 데이터를 학습해서 가장 무난하고 확률이 높은 답을 골라내도록 설계돼 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브랜드, 다른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이 점점 비슷한 외연을 띄게 하는 현상을 유도한다. 리포트는 이 상태를 ‘평균의 시대(Age of Average)’라 칭했다.



모두가 비슷해진 시장에서는 역설적으로 관심 자체가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된다. 브랜드는 익숙한 문법을 따라야 사람들에게 빠르게 인식되지만, 동시에 그 문법에서 남들과 달라 보여야 하는 이중의 압박에 놓인다. 이 압박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키워드가 리커플링 디자인(Recoupling Design)이다. 이는 디지털 환경으로부터 일시적으로 거리를 뒀다가 다시 연결하는 실천을 가리킨다. 원래 온라인 상태에 항시 머물면서 생기는 심리적, 사회적 부작용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개인적 실천에 가까웠다. 인프라 차원에서 이 리커플링은 기업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면, 디자인 분야에서는 평균의 시대가 만드는 획일성을 깨는 데 초점이 있다.


방법은 비교적 소박하다. 스케치북과 작업 일지를 쓰고, 손으로 낙서하고, 재료를 직접 만지고,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것. 화면 안에서만 벌어지던 작업을 잠시 화면 밖으로 꺼내 보자는 요청이다. 지각과 행동, 책임감을 디자인 과정 안으로 다시 통합하는 이 실천들은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평균값 바깥에서 디자이너 고유의 감각을 되찾는 통로가 된다.
배우는 수고가 주는 즐거움, 역량화
신제품과 서비스들은 걱정과 수고는 내려놓고 가장 단순한 선택만 하라고 유혹한다. 이는 사실 근대 사회가 오래전부터 해온 약속이었다. 기술 발전의 오랜 목표는 인간의 수고를 줄이는 데 있었고, 산업화된 사회에서 이 약속은 대체로 실현됐다. 이제 관심의 무게중심은 수고를 극복하는 일에서 편리함을 최적화하는 일로 옮겨갔다. 힘든 일을 줄이는 것을 넘어, 남은 편리함마저 더 매끄럽게 다듬는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적은 노력, 즉각적인 이용 가능성, 쉬운 사용성. 이 세 가지가 오늘날 편의 문화(Convenience Culture)를 이루는 핵심 가치다. 마찰을 줄이는 디자인, 콘텐츠를 짧게 소비하도록 만드는 스낵화, 모듈화된 서비스는 모두 이 문화의 산물이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조립하거나 조정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대신, 미리 정해진 조합 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되도록 만드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편의가 노력을 지운다는 생각은 절반만 맞다. 노력은 사용자의 시야 바깥으로 옮겨질 뿐이다. 즉각적인 배달은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인 배달 노동자에게, 간편식은 고도로 가공된 식재료에, AI 비서는 막대한 자본과 에너지 소비에 기대어 있다. 사용자는 편리함만을 경험하고, 그 편리함을 떠받치는 노동과 비용은 대부분 그 밖에 남는다. 결국 우리는 그 구조를 의식하지 못한 채 편리함에 더 깊이 의존하게 된다.


역량화(Skillization)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구조에 대한 의식적인 반작용이다. 무언가를 직접 배우고 참여하며 능력을 키우는 경험은 자기 효능감과 통제감을 준다. 모든 걸 대신해 주는 서비스가 오히려 이런 감각을 빼앗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디자인의 역할은 사용자 대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데 있지 않다. 이러한 학습 경험을 더 풍부하게 설계하고, 능력과 성장을 중심에 둔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다. 결국 다가올 UX의 과제는 마찰을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닌, 사용자를 성장하게 만드는 마찰을 골라 설계하는 일에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 확장하는 인간, 인간 증강
산업사회는 자연과 인간을 오랫동안 분리된 두 영역으로 다뤄왔다.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야생에만 존재하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문화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그 안에서 식물과 동물은 대개 인간에게 어떤 목적이나 기능을 제공하는 존재로만 다뤄졌다. 이 구도는 최근 들어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생태계가 실제로는 굉장히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는 과학적 근거와 더불어, 자연을 고려하지 않은 개발이 오염과 기후변화, 자원 고갈,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인간의 건강에까지 되돌아온다는 사실도 분명해졌다. 동시에 기술은 사회적 합의가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앞서 나가면서, 인간이 원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가능성까지 열어젖혔다.


리포트는 이 과제 앞에서 선형적 사고의 종료를 짚는다. 원인과 결과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지난 200년의 디자인은 대체로 이런 틀 위에서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고를 강화하며 지금의 생태 위기에도 한몫했다. 그 자리를 비선형성과 혼성성, 재통합이라는 개념이 채운다. 원인과 결과를 한 줄로 세우는 대신, 사람과 자연과 기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물 같은 관계로 다시 보는 방식이다. 넥스트 네이처(Next Nature)는 이런 관점 위에서 비인간 존재의 지능과 살아 있는 시스템을 디자인의 중심에 놓는다. 건축과 인프라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구조가 되고, 기후 조절이나 물 순환, 정화 같은 생태적 기능을 스스로 수행하는 존재가 된다.


리포트가 제시한 ‘인간 증강(Human Enhancement)’이라는 키워드는 동일한 관점을 인간 자신에게로 확장한다. 생명공학과 유전체학, 합성생물학, 로보틱스, 데이터 기반 의료는 인간의 신체와 능력을 넓히는 구체적인 도구가 되고 있다. 무엇이든 알고,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인류의 오래된 욕망이 이제 첨단 기술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두 개념이 가리키는 지점은 같다. 자연과 인간의 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던 시선에서 벗어나, 함께 진화하는 관계로 다시 짜는 일이다.
커지는 도시, 좁아지는 반경, 어반 빌리지
도시는 지구 표면의 약 2%만을 차지하지만 세계 인구의 57%가 그 안에 산다
UN Habitat, 2024
도시에 사는 인구 비율은 계속 늘고 있고, 좁은 면적에 인구가 몰리는 이 밀도야말로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도시화는 마을을 도시로, 도시를 메가시티로 바꿔왔다. 익명성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했고, 높은 밀도는 새로운 인프라를 요구했다. 오늘날 도시는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경제, 정치, 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하며 국제적 현안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다. 동시에 도시는 여러 위기의 영향을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인프라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도시계획이 부실해 슬럼이 확대되는 일, 기후변화와 식량안보 문제가 가장 먼저 가시화되는 일 모두 도시에서 벌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는 사회를 비추는 렌즈에 가깝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도시에서 먼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펼쳐지는 도시(Unfolding Cities)’는 이러한 팽창을 가리키는 말이다. 스마트 인프라, 새로운 모빌리티, 대규모 도시 개발은 하나의 프로젝트로 도시 전체나 신도시, 거대한 구역 전체를 단번에 계획하고 지어 올리는 수준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도시가 커질수록 사람들이 원하는 반경은 오히려 좁아진다. 집과 일터, 공원과 상점이 걸어서 닿는 거리에 있고 이웃과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생활 환경에 대한 요구가 함께 커지는 것이다.



‘어반 빌리지(Urban Villages)’는 이 요구에 대한 반응이다. 기존 공간을 창의적으로 재활용하고, 골목과 광장 같은 생활 공간을 되살리며, 밀도를 다시 채워 넣는 재밀집(Redensification)을 통해 도시 안에 작은 공동체를 짜 넣는다. 여기서 재밀집은 새 땅을 개발하는 대신, 이미 있는 동네의 빈 공간과 자투리 공간을 다시 채워 넣는 방식을 말한다. 개성 없던 구역은 활기 있는 생활권이 되고, 그저 지나치던 비장소(Non-place)는 마주치고 머무는 장소로 바뀐다. 흥미로운 지점은 두 흐름이 대립하지 않고 나란히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도시는 계속 커지는 동시에 그 안에 더 많은 작은 마을을 품게 될 것이다.
트렌드가 힘을 얻을수록 그에 반하는 흐름인 역트렌드도 함께 자란다. 하나의 방향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그 쏠림이 만드는 결핍과 피로도 함께 쌓이고, 그 결핍을 메우려는 힘이 반대편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둘은 서로의 자리를 빼앗는 대신 팽팽하게 맞선 채 공존한다. 그 긴장이 유지되는 동안 디자인은 계속 움직일 자리를 얻는다. 지금 이 균형이 우리의 작업 위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디자이너라면 주목해 볼 일이다.